
그렇다면 ‘피서산장’을 내건 약 170만 평 뜨락에는 강희와 건륭이 각각 선정한 36경(景)이 산재해 있는데 그것들은 변방 민족의 견제와 변방 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피서산장의 숨은 목적은 바로 ‘수원고변(綏遠固邊)’, 곧 먼 곳을 회유하고 변방을 안정시키는 행정이었다. 정치·국방말고도 건륭 때 편찬한 3457종의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피서산장의 문진각(文津閣)에서 완성돼 그곳에 수장됐다.
연암은 그걸 간파했다. ‘막북행정록’ 도입 부분에서 그는 ‘열하가 몽골의 목구멍을 막고, 천자가 북녘 오랑캐의 남하를 막는 요새’라고 했다. 어쩌면 연암이 열하에 발을 디디던 1780년 전후가 열하의 정치적 시운의 전성기였을지 모른다. 건륭이 매년 열하에서 4~5개월을 보낼 정도이니 열하는 명실상부 제2의 수도였다.
그러나 열하의 지기(地氣) 또한 100년을 넘지 못했다. 그 역사(1703~2007)의 성쇠가 역력했다. 최초 18세기가 청나라의 중심과 번영을 열하로 연신하면서 강·옹·건(康·雍·乾)제의 피서적 태평성대였다면, 두 번째 19세기는 외국의 침략과 유린말고도 걷잡을 수 없는 내우에 휘말린 혼돈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북벌·항일·국공합작 등의 전쟁으로 쇠락한 열하를 신중국 건설과 개혁 개방의 재건으로 부활시켰다.
필자는 내친김에 열하의 정치적인 지위와 300년 열하 역사의 평가를 섭렵해 봤다. 연암은 그때 오늘날만큼 내다볼 수 없었으리라. 연암에게 열하는 의식의 초점이었다. 70일 여정에 피로가 누적됐고, 만일 열하를 갔다가 거기서 곧장 귀국하면 연경이나 변경 구경을 놓치게 될 판이었다. 거기에다 경축 사절의 제한으로 마두를 모두 없애고 견마잡이만 대동키로 한 결정도 못마땅했다. 그러니 장복이는 떨구고 창대만 데리고 갈 수밖에.
그러나 연암은 열하에 큰 호기심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앞서 방문한 조선 사람들이 열하를 보지 못한 터라 새로운 견문으로 우쭐할 수 있으리라는 약간의 치기도 있었다. 그래서 연암은 열하가 가고 싶기도 가기 싫기도 한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다.
장복이와의 이별
연암이 열하에 경외를 느낄수록 장복이와의 생이별은 연암에게 비극으로 다가왔다. 사람과 말이 모두 시들시들 병색이 짙어가면서 가려운 살을 긁으면 굶주린 이들이 더덕더덕 떨어지는 고난에 겹친 이별은 연암을 옥죄었다. 과연 8월5일자 일기에 토로한 이별론은 천하의 명문으로 떠오를 만큼 감동적이었다.
서관을 나선 일행이 첨운패루와 지안문을 지나 다시 북경의 동북쪽 동직문에 다다랐을 때, 장복은 말등자를 잡고 흐느끼다가 다시 창대와 울며불며 이별했다. 그리고 문 열자 산을 보듯 이별론의 정곡을 찔렀다. 요컨대 사람이 살면서 가장 괴로운 것은 이별인데 이별 중에도 생별이 사별보다 슬픈 거라 했다. 하나는 살고 하나가 죽는 것은 순리의 이별이며, 순리를 따르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라는 논리를 상기시켰다.
슬픔에 절절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라 했다. 곧 산 사람의 느낌에 따라 슬픔은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있다는 환경론을 제기했다. 이별 장소로 어슴푸레 안개 속에 다리도 나무도 늙어버린 물가, 멀리서 물새가 부침하고 가까이서 단 두 사람이 보내고 떠나는 하량(河梁), 거기 물살이 돌을 끌어안고 흐느끼듯 우는 곳이 제격이라 했다. 그리고 중국문학사상 감동의 이별시인 소무(蕭武)의 ‘별이릉(別李陵)’을 비롯해 강엄(江淹)의 ‘별부(別賦)’, 장자의 ‘남화경’에 나오는 시남료(市南僚)의 이별사, 유우석(劉禹錫)이 상수(湘水)에서 유종원(柳宗元)을 애도하던 시를 예로 들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별가로 대악부의 한 가락인 ‘배따라기곡’을 들면서 그 또한 중국에 들어가는 뱃길, 곧 물가임을 상기시켰다. ‘닻 올려라! 배 떠난다 이제 가면 언제 오리’라고.
그러나 연암은 지금 하필 하량이나 물가여서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반전할 수밖에 없었다. 장복이와 부자·군신·붕우의 관계가 아님에도 이토록 절절해서 말이다. 그러한 예를 또 하나 들었다. 연암은 비록 ‘내가 이나 벼룩 같은 신민(臣民)’일지라도 100년 전 심양으로 잡혀온 소현세자를 위해 당시 우리나라 신료들이 심양이란 타국타향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행색이나 정경을 이렇게 그렸다.
‘저 요동 벌은 끝이 없고 심양의 버들은 아득히 우거졌는데, 사람은 팥알처럼 아물거리고 말은 겨자씨만큼 작아질 때 시력은 다하고 땅 끝과 물시울이 맞닿았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