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과학문화와 공학문화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7-11-05 16: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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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문화와 공학문화
    최근 ‘샌드위치 위기론’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 같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서 경쟁력을 상실해가는 한국 경제가 샌드위치를 연상시킨다는 자조적인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양전닝(楊振寧) 중국 칭화(淸華)대 교수가 지난해 3월에 강연한 내용이 떠오른다.

    그는 ‘중국 고등교육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학술보고회에서 산업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해 화제가 됐다. 양 교수는 창조와 혁신의 4가지 유형으로 아인슈타인, 두보(杜甫), 빌 게이츠, 닌텐도를 꼽으며 이 가운데 중국에 필요한 것은 아인슈타인이나 두보가 아니라 빌 게이츠나 닌텐도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처럼 뛰어난 기초과학자나 두보처럼 문학적 창조력을 지닌 시인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나 일본 게임업체인 닌텐도처럼 아이디어를 기업화, 상품화해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인재와 기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한두 분야의 노벨상을 받는 것이 중국인들을 기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빈곤 탈출을 위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기초이론식 혁신이 아니라 초고속 생산효과를 거두는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양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우리 사회에 적용하기에는 무리한 면도 있지만, 세계적 물리학자로서 기초과학 못지않게 산업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탁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9월 하순 한국공학한림원에서 정책총서로 내놓은 ‘창조적 혁신으로 새 성장판을 열자’는 일독을 권하고 싶다. 특히 12월 대통령선거에 나설 각 정당의 후보들을 위해 과학기술 정책을 입안하는 전문가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은 먼저 한국 경제는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어 정체의 늪에 빠질 잠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하고, 과학기술의 수많은 아이디어와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한국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글로벌 경쟁에 요구되는 높은 자유도를 지닌 시장 친화적 마인드와 행동 양식을 바탕으로 민간이 주도하는 창조형 기술혁신체제로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정부는 기술혁신정책에서의 관제탑 역할을 충분히 하고 민간부문과의 상생에 주력해야 한다. 최근 과학기술 투자의 양적 확대에 따라 자원 배분을 관료가 주도하고 있다. 이런 세태에서 벗어나 전문가 그룹과의 상생을 추구하는 노력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라고 강조한다.

    기술혁신 주체들의 변화도 촉구한다. ‘기업과 대학이 전면에 나서고 정부가 이를 뒷받침함으로써 말 그대로 시장주도, 민간주도 혁신체계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과학기술계를 향해 능동적으로 사회적 책무를 다해달라고 당부하는 마지막 대목은 자못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흔히 예산 당국은 예산을 잡아먹는 3대 하마로 농민, 군대, 그리고 과학기술을 꼽는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과학기술은 이제 여기서 빠져나와야 한다. 무엇을 해달라는 과학기술계가 아니라 무엇을 하겠다는 과학기술계가 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하며 경제와 연계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점점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공론화되고 있는 이공계 위기 문제도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학기술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정책총서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하나만 꼽으라면 ‘창의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창의적 실용지식 창출’이 아닌가 싶다. 양전닝 교수가 제시한 혁신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창조 한국을 향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는 것은 국민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지적이다. 말하자면 공학문화가 결코 소홀히 다뤄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셈이다.

    공학문화는 여러 측면에서 과학문화와 다르다. 먼저 관심의 대상이 다르다. 과학문화는 학교에서 배우는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 기초이론을 다루는 반면에 공학문화는 실생활과 산업현장에서 곧잘 접하는 정보기술, 생명공학기술, 환경기술 등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두 문화의 기본 특성이 구별된다. 과학문화는 기초과학 이론을 소개하기 때문에 지식 위주이며 아무래도 과거 지향적이지만 공학문화는 끊임없이 발전하는 기술을 확산시켜야 하므로 정보 중심이며 미래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문화의 생산 방식도 판이하다. 과학문화는 도서관의 자료를 뒤적여 과거의 축적된 지식을 여러 형태로 변형해 내놓는 반면 공학문화는 세계 곳곳의 연구현장에서 새로 출현하는 첨단기술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추적해 산업현장에 제공한다. 주요 수요자 역시 계층이 다르다. 과학문화는 기초과학 이론을 지식으로 습득해 공부에 활용하려는 학생들을 겨냥하지만 공학문화는 산업정보를 획득해 제품 개발에 적용하려는 기업인이나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상식을 얻으려는 일반인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처럼 과학문화와 공학문화는 여러 면에서 차이점이 두드러짐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두 문화를 차별화하지 않은 채 과학기술 문화로 뭉뚱그려 각종 시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공학문화는 과학문화에 떠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딱한 실정이다.

    우선 과학기술 독서교육의 현장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과학 수필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과학자가 쓴 글이 국어 책에 4편이나 실렸다고 해서 한때 언론에서 대서특필한 적이 있지만, 반색할 일만은 아닐 성싶다. 왜냐하면 4편의 글이 모두 나무나 곤충 따위의 생물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생물 이야기는 첨단기술에 관한 것과는 달리 덜 딱딱하고 생명을 다루므로 맛깔스러워서 문학작품 위주의 국어 교과서에 안성맞춤일 수 있다. 그러나 4편 중에 첨단기술에 관한 글이 1편이라도 들어 있었더라면 우리 학생들이 공학기술자의 꿈을 꿀 수 있었을 터이므로 생물학 일색으로 글을 고른 국어학자들의 안목이 한심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2005년 초에 서울시교육청이 펴낸 독서 지도 지침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중학교 국어 과목의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된 과학 책들이 모두 생물학 책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국어 교사들이 첨단기술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생물에 관한 기초상식은 갖고 있어서 생물학 책만 선정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는가. 어쨌거나 기술에 문외한인 국어 전공자들이 공학문화 보급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과학문화와 공학문화
    이인식

    1945년 광주 출생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금성반도체 최연소 부장, 대성산업 상무이사,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역임

    現 과학문화연구소장

    저서 : ‘미래교양사전’ ‘유토피아 이야기’ 등


    다행스럽게도 몇몇 유관 단체에서 공학문화 확산을 위한 고육책을 강구하고 있어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그중에서도 한국공학한림원이 의욕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교양공학도서 출판 사업이 돋보인다. 2001년부터 한국공학한림원이 민간단체인 해동과학문화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 발간 중인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시리즈는 불모의 공학도서 시장에 씨앗을 뿌린 첫걸음으로 높이 평가될 줄로 안다. 그간 30종 가까이 펴낸 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교양공학 도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정부가 과학기술 소양이 부족한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설립한 기관은 한국과학문화재단이다. 한 해 300억원 가까운 재단 예산은 국민의 혈세로 충당된다. 그러나 공학문화에 투입되는 예산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업인이 설립한 해동과학문화재단이 해마다 출연하는 1억원으로 공학도서가 발간되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한국과학문화재단의 직무 유기는 국민적 비판을 면치 못할 것 같다.

    공학문화에 대한 국민의 올바른 이해 없이는 양전닝 박사나 한국공학한림원 정책총서가 언급하는 ‘창의적 기술 혁신’은 제대로 성취될 리 만무하다. 공학문화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분위기가 하루 빨리 조성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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