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인간의 본성(들)’

유전자냐 문화냐…인간 진화에 대한 연구

  • 장대익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과학사 및 과학철학 daeik@chol.com

    입력2008-06-09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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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본성(들)’

    ‘인간의 본성(들)’ : 폴 에얼릭 지음, 전방욱 옮김, 이마고, 544쪽, 1만8500원

    폭행치사 혐의로 기소된 어떤 남성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은 잘못이 전혀 없다고 법정에서 강력히 변론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그는 폭행 사실 자체는 인정하지만 폭행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식으로 발뺌한다. 즉,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폭력 유전자’가 문제라는 것이다. 내 유전자 탓이오!

    아직 이런 사례들이 현장에서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생물학의 급속한 발전이 핑계 대기에 능숙한 우리들의 습성과 좀 더 자주 만나게 된다면 법정과 학교는 ‘누구 탓’인지를 놓고 시끌벅적할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깊어가는 과정에서 삐져나올 수밖에 없는 한바탕 소동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 이 시점에 인류가 자신의 본성을 탐구하겠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발상이 아니다. 우리는 150년 전에 이미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을 알게 됐고, 50년 전쯤에는 유전의 비밀을 풀어줄 DNA의 기본 구조를 알아내지 않았던가. 그래서 학자들은 이 두 발견에 감히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다윈의 ‘진화 혁명’과 왓슨·크릭의 ‘분자 혁명’. 화가 고갱이 말년에 타이티 섬에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작품을 그렸듯이, 지금 우리 인류는 과학의 이름으로 똑같은 화두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인간 본성에 관해 본격적으로 과학적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다윈의 ‘인간의 유래’(1872)부터다. 이후로 다윈의 사촌인 골턴으로부터 시작되어 세계 양차대전을 거치면서 끔찍한 오명을 남긴 우생학(eugenics)도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우생학의 암흑 터널을 통과한 본성 담론은 하버드대 진화생물학자 윌슨의 ‘사회생물학’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옥스퍼드대 동물행동학자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 결과 ‘인간 본성(human nature)’이라는 키워드는 지난 몇 년 동안 세계의 출판계를 뜨겁게 달군 주제 중 하나가 됐다. 예컨대 하버드대 인지과학자 핑커가 쓴 ‘빈 서판’이나 저명한 과학 저널리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은 영미권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인간 본성’에 관한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킨 문제작이다.



    ‘유전자 결정론’의 치명적 결함 지적

    본성 담론의 범람 속에서 스탠퍼드대의 세계적인 진화생태학자 폴 에얼릭은 인간 본성론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지적 틈새(intellectual niche)를 점유하기 위해 이 책을 출간했다. 우선 제목에서 ‘본성’을 복수로 취급해 ‘본성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기존 본성론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유전자가 우리를 통제할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유전자와 상관없는 ‘문화’라는 것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유전자 중심의 기존 본성론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치명적 결함이란 구체적으로 유전자 결정론이다.

    유전자 결정론이란 인간의 몸과 행동 등이 특정 유전자 또는 여러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인데, 저자는 본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결정론에 근거를 두고서 인간의 본성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불평한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는 저자가 던지는 비판의 화살이 어떤 이들을 향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과녁 중심에는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편 도킨스가 있고 그 둘레에는 사회생물학에 멋진 새 옷을 입힌 일단의 진화심리학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 만만치 않은 상대들과 어떻게 싸움을 하겠다는 것일까.

    저자의 주무기는 관련 주제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지난 반세기 동안 진화생물학, 인구학, 생태학 등을 넘나들면서 중요한 연구 성과들을 남긴 석학이다. 그 업적으로 1990년에는 윌슨과 공동으로, 노벨 생물학상에 해당하는 크러포드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30여 권의 저서를 통해 생물다양성 보호와 환경윤리의 중요성을 알리는 전방위 지식인 노릇을 해왔다. 이 중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인구 과잉, 자원 고갈, 환경 파괴에 관한 연구는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에게 ‘20세기 맬서스’라는 애칭을 선사했다.

    이런 경력들을 종합해볼 때 이 책에서 다뤄진 지식의 범위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결코 놀랍지 않다. 저자는 영장류의 진화, 사고와 언어의 진화, 종교, 예술, 농경, 전쟁, 정치의 기원, 문명의 융성과 붕괴, 생태 문제, 진화와 윤리 문제까지 우리의 본성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잘 정리했다.

    그렇다면 지식의 내용, 논증, 주장은 다른 대가들의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논의 스케일과 디테일이 비슷하다고 해서 책의 메시지와 가치마저 비슷하다고 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평하자면, 이 책은 스케일과 디테일 면에서는 특급 저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그런 자료들로부터 이끌어낸 결론과 주장은 본성론을 제시한 기존의 다른 학자들의 것과는 대립각을 형성한다.

    우선 저자는 진화심리학자들이 유전자 결정론에 빠져 있어서 본성이 시대와 문화, 즉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기존의 본성론이 여전히 낡은 이분법-즉 ‘유전자 대 환경’ ‘본성 대 양육’ 등-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유전자는 김치찌개 요리법?

    문제는 저자가 겨냥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유전자 결정론이나 ‘본성 대 양육’ 이분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저자는 지금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화살만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왜 제대로 된 생물학자들 중에 유전자 결정론을 믿는 사람이 없는지부터 살펴보자. 이유는 간단하다. 치사 돌연변이 유전자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적절한 환경이 없이 유전자만으로는 그 어떤 표현형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전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해 특정한 표현형(인간의 몸, 마음 그리고 행동)을 산출한다는 이론이 입증된 지 오래고, 이것은 도킨스와 진화심리학자들이 모두 받아들이는 기본 전제다. 예컨대 사람의 키는 대체로 유전자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만 영양 상태에 따라서도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한편 또 다른 극단에는 인간이 어떤 유전자들을 갖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환경에 의해 표현형이 산출된다는 환경 결정론이 버티고 있다. 인간이 백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믿었던 존 로크에서부터 비둘기를 잘만 훈련시키면 파일럿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공언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에 이르기까지 환경 결정론에 발을 담근 이는 의외로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견해 역시 유전자에 관한 진실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이 그 유전적 기초 없이 나올 수는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 행동에서 유전자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유전자는 마치 김치찌개를 끓이는 요리법과도 같다. 이 요리법에는 김치찌개를 어떻게 끓이라는 기본적인 지시사항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이려면 기본적인 요리법 이외의 것들이 잘 갖춰져야 한다. 예컨대 맛깔 나는 김치, 잘 다져진 양념 등이 적절한 시점에 들어가지 않고는 요리법만으로 맛있는 김치찌개가 끊여질 리 없다. 마찬가지로 유전자는 적절한 환경적 요인들과 상호작용해 인간의 몸, 마음, 그리고 행동을 만들어낸다. 보다 중요한 물음은 이 상호작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에 관한 것이다.

    본성 대 양육 논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 본성이 오랜 진화 과정을 겪은 유전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그것은 고정된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불행하게도 이런 믿음은 유전자 결정론의 한 형태로서, ‘인간 본성’(즉, 우리의 진화된 심리)과 그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저자가 비판하는 견해이지만, 주류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대체로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즉 준보편적이고 거의 변하지 않으며 인간 종(種)의 전 역사를 통해서 태어난 (정상적) 아기들 모두에게 공통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본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간의 행동은 가변적이며 다양하다. 고정된 규칙들(본성 또는 심리 기제)이 다양한 환경의 입력 속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다윈이 주장했던 자연 선택은 우리의 심리 메커니즘을 설계함으로써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게 했다.

    살인에 관해 잘 알려진 진화심리학적 연구는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연구에 따르면 살인율은 사회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지만 살인 양상은 정확히 일치한다. 예컨대 1970~80년대 미국 시카고의 살인율은 연 100만명당 900명 정도인 데 비해 영국 웨일스의 살인율은 100만명당 30명 정도였고 아일랜드에서는 살인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이 지역들 간에는 유의미한 유전적 차이도 인간 본성의 차이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살인율을 다르게 만든 요인은 유전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의 차이다. 이것이 바로 리들리가 말한 ‘양육을 통한 본성’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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