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들의 축구전쟁’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07~2008시즌이 5월12일 박지성이 소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지난해에 이은 연속 우승. 22년간 맨유를 이끌고 있는 퍼거슨 감독은 25경기 연속 무패행진을 하고 있는 박지성에게 끊임없는 신뢰를 보낸다. 맨유의 연승 비결은 뭘까. 15년 전부터 ‘우승 꿈나무’를 키워온 퍼거슨의 용병술과 그가 선택한 세계적 선수들, 그리고 박지성 집중분석.
우승 메달을 걸고 환호하는 맨유 선수들. 박지성은 선수들의 팔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함께 매달을 걸었다.
알렉스 퍼거슨(67)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에게 팀은 유기적 생명체다. 거꾸로 선수에게 그는 ‘불’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헤어드라이어’일까. 그가 선수들에게 호통을 칠 때면 선수들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다. 선수들 얼굴 가까이 입을 바짝 들이대고 ‘불같은 육두문자’를 퍼부어댄다. 선수들은 행여 그 ‘뜨거운 욕설’에 얼굴을 델세라 꼼짝 못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다. 헤어드라이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바람을 대책 없이 맞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베컴(33·LA갤럭시)이 세계 곳곳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릴 때도 퍼거슨 앞에 서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퍼거슨이 홧김에 던진 축구화에 그 잘생긴 이마가 찢어져도 찍 소리 한번 못했다. 특급 골잡이 반 니스텔루이(32·레알 마드리드)가 반기를 들자 가차 없이 방출했다. 맨유를 떠난 필립 네빌(31·에버턴)은 아예 ‘퍼거슨의 신도’를 자처할 정도다. 그가 맨유에 있을 때 여러 팀에서 러브콜을 보내오자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난 누가 뭐래도 맨유에서 뛰고 싶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내게 팀에서 나가라고 말할 수 없다. 퍼거슨 감독이 ‘이제 필요 없으니 팀을 떠나라’고 한다면 군소리 없이 그와 악수를 나누고 보따리를 꾸리겠다. 그와 나는 선수와 감독의 사이가 아니다. 퍼거슨은 내게 양아버지 같은 존재다. 퍼거슨은 내 운명의 관리인이다. 퍼거슨이 죽으라면 죽겠다.”
‘헤어드라이어’ 퍼거슨, ‘전설’의 긱스
대단하다. 역시 퍼거슨이다. 그의 그런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맨유가 있었을 것이다. 문득 히딩크 감독이 떠오른다. 히딩크는 한국대표감독 계약 사인에 앞서 대한축구협회 관계자에게 묻는다. “내가 만약 지금 한국선수들에게 아무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저 나무에 올라가라고 한다면 올라가겠느냐”고. 축구협회 관계자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하자, 히딩크는 비로소 사인을 한다. 나중에 결국 한국선수들도 히딩크의 신도가 됐다. 히딩크가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한몸이 됐다. 그리고 그것이 월드컵 4강으로까지 이어졌다. 퍼거슨은 말한다.
프리미어리그 16시즌 중 10번을 맨유에서 우승한 퍼거슨 감독.
퍼거슨은 스타보다는 팀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는 선수를 좋아한다. 불같은 투지와 축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선수를 선호한다. 검증이 끝난 스타플레이어보다는 가능성이 큰 젊은 선수를 좋아한다. 지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끄는 선수들도 대부분 퍼거슨이 유소년시절부터 키웠거나 어릴 때 다른 팀에서 데려온 선수들이다.
맨유의 살아 있는 전설 라이언 긱스(35)가 그 좋은 예다. 긱스는 원래 지역 라이벌 팀인 맨체스터시티 유소년 클럽에서 훈련하고 있었다. 퍼거슨은 그 어린 소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경기장을 날아다니듯 툭툭 쉽게 공을 차는 긱스의 플레이는 ‘축구천재’ 바로 그것이었다. 긱스는 드리블을 하든지 공을 받으러 나가든지, 상대편 수비수들을 갖고 놀았다. 퍼거슨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긱스가 17세 때인 1990년 7월9일 공식계약을 맺었다. 긱스는 곧바로 90~91시즌 1군 무대에 투입돼 펄펄 날았다.
긱스는 맨유에서만 정규리그 10회, FA컵 4회, 리그컵 2회, 유럽챔피언스 리그 1회 등 17차례 챔피언에 올랐다. 5월11일 현재 맨유에서 758경기 출전으로 보비 찰턴이 가진 최다 출전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있다.
긱스는 세계 축구 역사상 기록에 남을 명장면의 주인공이다. 1999년 4월14일 아스널과의 잉글랜드 FA컵 원정 준결승 재경기 연장 19분에 터뜨린 결승골이 바로 그것. 60m를 현란하게 단독 드리블(상대선수 4명을 제치고)한 끝에 골을 넣었다. 당시 ‘더 타임스’는 1개면 전면을 할애해 펜화로 긱스의 골 경로를 스케치해 보도하기까지 했다. 축구인들은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월드컵 잉글랜드와의 8강전 후반 9분에 넣은 두 번째 골과 함께 긱스의 이 골을 ‘최고의 골’로 친다. 마라도나는 당시 하프라인 부근(약 50m)에서 볼을 잡아 골키퍼까지 6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
스콜스, 킨, 호날두
폴 스콜스(34)는 17세이던 1991년 7월8일 맨유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4시즌 뒤인 94~95시즌에 1군에 데뷔했다. 당시엔 힘과 경험 모두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퍼거슨은 주저 없이 그를 뽑았다.
“투지가 좋았다. 고질병인 천식만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 팀에 밝은 미래를 가져다주리라고 확신했다. 그는 대담한 선수다. 소란스러운 경기장에 가만히 들어가 그라운드 구석구석을 조용히 누비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일을 내는 스타일이다.”
퍼거슨이 옳았다. 지난 4월30일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스콜스는 퍼거슨의 믿음을 그대로 증명했다. 스콜스는 전반 14분 바르셀로나의 지안루카 참브로타가 걷어낸 볼을 아크 왼편 바깥쪽에서 차단한 뒤 주저 없이 오른발로 중거리포를 날렸고, 빨랫줄처럼 뻗어간 볼은 그대로 골문 오른쪽 상단 구석에 꽂혔다. 맨유는 이 골로 1-0 승리를 거둬 결승에 올랐다.
맨유의 영원한 주장 로이 킨(37·선더랜드 감독)은 불같은 투지와 체력을 높이 샀다. 퍼거슨은 1993년 7월에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당시 22세이던 킨을 영입했다. 맨유는 93~94시즌에서 곧바로 리그 우승과 FA컵을 차지했다.
“로이 킨은 상대 페널티 지역과 우리 편 페널티 지역을 계속 오갈 정도로 체력이 좋은 선수다. 그는 용맹심이 강한 젊은 아일랜드선수였다.”
맨유의 스타들. 투지의 스콜스(왼쪽), 살아있는 전설 긱스.
하지만 그는 그 포지션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상대 수비수들이 ‘호날두가 조롱하듯 볼을 다룬다’며 불평하는 현란한 드리블, 무회전 대포알 프리킥 슈팅, 발뒤꿈치로 불쑥불쑥 패스와 슛까지 해대는 라보나 킥, 방향을 순식간에 90도로 바꾸는 발목 꺾기, 지단보다 더 자연스러운 마르세유 룰렛, 헛다리짚기…. 오늘날 호날두는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겨우 스물다섯에 불과하다. 포르투갈 대표팀 선배인 루이스 피구는 “호날두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호날두가 나의 계승자라고? 아니, 내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그동안 내가 왜 피눈물 나게 운동을 했겠는가? 호날두는 빠르고 지능적이고 강하고 기술적으로 흠이 없다. 그는 완벽한 선수다”라며 극찬한다.
퍼거슨이 박지성을 부른 까닭
퍼거슨은 왜 박지성을 영입했을까. 위에서 언급한 선수들의 사례를 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박지성에게서 무한한 미래 가능성을 엿봤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로이 킨보다 더 많이 뛴다. 폴 스콜스보다 더 투지가 좋다. 퍼거슨의 권위에 절대 순종한다. 말썽 부리는 일도 전혀 없다. 비록 기술은 호날두만큼 좋지 않지만 경기 내내 쉴 새 없이 경기장을 헤집고 다닌다. 경기가 풀리지 않을 땐 박지성 같은 선수가 절대 필요하다.
박지성은 동료들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는 데 능숙하다. 자신이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의 움직임이 창조적이다. 상대 수비가 꼭 있어야 할 지점에 한 발 앞서 지키고 있다가 동료의 앞길을 터준다. 박지성의 움직임은 주로 좌우 횡쪽에서 이뤄진다. 그러다가 공간이 생기면 득달같이 골문을 향해 달려든다.
어느 땐 최종 수비수로 변신해 위험한 볼을 걷어내기도 한다. 박지성이 아인트호벤에서 맨유로 떠났을 때 아인트호벤 동료들은 “박지성 1명이 떠났지만 실제는 1.5명이 떠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오죽하면 프랑스 TV의 한 해설자는 “빠흐크(박지성)는 분명 하나밖에 없는데, 마치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진에 빠흐크가 1명씩 있는 것 같다(챔피언스리그 아인트호벤-리옹전)”라고 했을까. 퍼거슨은 말한다.
“라이언 긱스의 나이(35세)를 생각해야 한다. 긱스는 지난 18년간 왼쪽 측면에서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했고 프리미어리그에서 그렇게 오래 그 역할을 해낸 선수도 없었다. 긱스가 경기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어떤 팀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긱스는 갈수록 트레이드 마크인 화려한 드리블과 패스의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박지성을 영입한 것은 그가 측면에서 놀라운 에너지와 스피드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훌륭한 양발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곧 팀의 돌파력 향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 박지성은 스피드와 돌파력이 뛰어나지만 특히 에너지는 환상적이다. 박지성이 아인트호벤에 있을 때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보여준 플레이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박지성이 아인트호벤에 있을 때 인상 깊은 경기들은 왼쪽 측면에서 뛸 때와 중앙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그래서 나는 박지성을 그 자리에 놓고 시작하면서 어떻게 발전하는지 볼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내게 ‘박지성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여러 가지 선택권을 갖고 있다. 박지성이 가진 넘치는 에너지와 폭발적인 스피드는 팀 전체 플레이 속도와 경기 내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난 아인트호벤에 괜찮은 선수가 입단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수십 차례나 박지성의 경기를 보며 움직임을 분석했다. 그 결과 박지성의 움직임은 환상적(fantastic movement)이었고 집중력도 돋보였다. 더구나 박지성은 젊고 잉글랜드에서 뛰고 있는 기존 선수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플레이를 펼친다. 앞으로 2~3년 경험만 좀 더 쌓인다면 매우 훌륭한 선수가 돼 있을 것이다.”
맨유의 천재 골잡이 호날두.
영국 맨체스터 지역 일간지 ‘맨체스터이브닝뉴스’는 “상식을 넘어선 스태미나를 보여줬다. 단지 열심히 뛰는 것 이상이었다. 전반에는 골을 넣을 뻔했고, 루이스 나니가 반드시 성공시켰어야 할 빛나는 크로스를 건네기도 했다”며 팀내 최고 평점인 9점을 줬다.
박지성은 바르셀로나 에이스 리오넬 메시, 티에리 앙리 등을 효과적으로 막아냈고, 공격에서도 두 차례나 공격 포인트를 올릴 뻔했다. 박지성은 전반 20분 호날두의 패스를 받은 뒤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오른발 슈팅을 날렸지만 골대를 살짝 벗어났다. 전반 40분에는 왼쪽 측면 돌파 후 정확한 크로스로 나니의 위협적인 헤딩슛을 이끌어냈다.
최강의 미드필더 박지성
잉글랜드 축구 칼럼니스트 랍 휴스는 말한다.
“박지성이 오기 전 맨유는 미드필더진에서 특유의 역동성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로이 킨은 젊음의 파워가 사라진 노쇠한 주장일 뿐이었다. 그라운드의 리더 역할은 할 수 있지만 34세의 나이에서 오는 체력 저하와 잦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31세의 폴 숄스도 골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은 살아 있지만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서른둘의 라이언 긱스도 효력이 다 떨어진 건전지처럼 흐느적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을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에 지능적인 위치 선정, 게다가 골 결정력, 아인트호벤과 AC밀란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세계 최고 수비수들이 즐비한 밀란의 수비라인을 휘젓는 그의 플레이에 퍼거슨 감독은 매료됐다. 박지성은 녹초가 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뛴다. 미드필드에서 공격라인까지 폭발적인 파워를 자랑하며 내닫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볼과 경기, 그리고 이겨야 한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뜨거운 열정이 몸속에서 불타고 있다.”
퍼거슨은 2008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둔 5월초 자신 있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7~2008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한 현재의 맨유 팀 미드필더진이 98~99시즌 트레블(정규리그·FA컵·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뤘던 맨유 팀보다 더욱 강하다. 한마디로 지금 이끌고 있는 팀이 맨유 사상 최고의 팀이다.”
트레블 당시 데이비드 베컴-로이 킨-폴 스콜스-라이언 긱스의 허리진보다 지금의 호날두-나니-안데르손-캐릭(박지성-긱스-스콜스)의 미드필더진이 더 낫다는 것이다. 맨유는 전통적으로 허리가 최강인 팀이다. 그만큼 공격적이다. 골잡이 드와이프 요크와 앤디 콜이 이끌던 트레블 팀 시즌 골은 모두 101골이었지만, 올 시즌 맨유 골은 총 108골(정규리그 88골에 22골 실점)이나 된다.
최전방 스트라이커 웨인 루니도 루니지만 윙 포워드 호날두의 골이 더 무섭다. 어디서 언제 터질지 모른다. 게다가 트레블 팀의 야프 스탐-게리 네빌이 이끌던 수비진도 막강했지만 현재 리오 퍼디낸드-네마냐 비디치의 두 장신 중앙수비수가 이끄는 방어벽도 그에 못지않게 탄탄하다.
“뛰어난 선수보다 꿈나무를 데려오라”
퍼거슨은 1986년 11월6일 마흔다섯에 맨유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맨유에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절망을 느꼈다. 맨유는 직전인 85~86시즌 성적이 꼴찌에서 두 번째. 게다가 19년 동안 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맨유 선수들은 천하의 술꾼들이었다. 당연히 체력도 경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이었다. 전후반을 뛸 수 있는 선수는 겨우 3명이나 될까. 게다가 이들도 못 말리는 술꾼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참새 방앗간 들르듯 술집으로 직행했다. 토요일은 아예 고주망태가 되는 날로 알고 있었다.
클럽 규칙도 ‘선수들은 경기 이틀 전부터 술을 마실 수 없다’로 돼 있었다. 그렇다면 사흘 전 까지는 얼마든지 마셔도 된다는 말인가. 퍼거슨 감독은 당장 규칙부터 바꿨다. ‘어떤 선수도 연습기간 중에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매일 연습하는 선수들에겐 사실상 금주령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선수들은 시큰둥했다. ‘어느 집 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퍼거슨이 호통을 쳐도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냐”며 대들었다. 선수들은 승부욕도 전혀 없었다. 이겨보겠다는 열정, 즉 뜨거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하나’라는 팀 정신이 너무도 부족했다. 한마디로 모래알 팀이었다.
퍼거슨은 하나 둘 말 안 듣는 술꾼들을 방출했다.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키 플레이어라도 개의치 않았다. 고참 선수들을 정리하고 도전에 겁내지 않는 젊은 피를 수혈했다. 10년을 내다보고 유소년축구센터도 만들었다. 스카우트요원도 5명이던 것을 22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뛰어난 선수보다는 뛰어난 꿈나무를 데려오라.”
그러나 1989년 11월 팀이 바닥을 기었다. 해임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후임 감독 이름까지 언론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FA컵 우승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그 다음 시즌에도 리그 6위에 그쳤지만 유러피안 위너스 컵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아슬아슬하게 목이 잘리는 것을 피했다.
퍼거슨은 부임 후 86~87시즌 11위, 87~88시즌 2위, 88~89시즌 11위, 89~90시즌 13위, 90~91시즌 6위, 91~92시즌 2위로 6년 동안 성적이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그럴수록 퍼거슨은 젊은 피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에겐 영원한 승리를 갈망하는 피가 끓고 있었다. 감독으로서 나의 목표는 구단이 여러 해 나아가 수십 년 동안 좋은 성적을 낼 기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한두 번 반짝 우승하는 건 나의 목표가 아니었다. 한 손 가득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위대한 구단’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어린 선수를 키워야 했다. 나는 구단주가 선수 문제에 관여하는 걸 철저하게 막았다.
내가 독자적으로 유소년 축구클럽 육성을 주도하고 활성화할 수 있었던 것도 구단주가 나의 뜻을 이해하고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어린 선수들을 지도할 땐 축구를 뛰어넘어 인생의 선배로서 삶의 자세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선수들이 경력을 쌓아가면서 직면하는 위험과 유혹이 너무도 많다는 걸 일러주고 싶다. 특히 술 마시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명심해야 한다. 어린 선수가 너무 많은 경기에 출전하면 선수 생명이 단축되는 경우가 많다.”
맨유 우승의 뿌리 ‘칸토나’
아무리 훌륭한 젊은 선수가 많아도 리더가 없으면 우승은 요원하다. 퍼거슨은 1992년 12월 리즈 유나이티드로부터 프랑스의 천재스타 에릭 칸토나(1966년생·당시 26세)를 과감하게 영입했다. 처음엔 주위에서 너도나도 말렸다. 성격이 불같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앙팡 테리블’이라는 것이었다. 괴팍한 데다 제멋대로여서 십중팔구 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리즈 유나이티드 구단도 ‘돈만 많이 받는 골칫덩이를 하루빨리 떠넘겨버리겠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역시 퍼거슨의 판단이 옳았다. 에릭 칸토나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맨유의 어린 선수들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그 덕분에 91~92시즌을 리그 2위로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92~93시즌엔 마침내 26년 만에 24승12무6패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에릭 칸토나는 열 살 가까이 아래인 게리 네빌-니키 버트-데이비드 베컴(이상 1975년생)-폴 스콜스(1974년생) 같은 10대 어린 선수들을 ‘어미 닭 병아리 품듯’ 완벽하게 이끌었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승리하는 방법’을 몸으로 알려줬다. 칸토나보다 7개월 늦게(1993년 7월) 들어온 열혈아 로이 킨(1971년생)도 칸토나 앞에선 꼼짝 못했다.
한번 우승 맛을 본 맨유는 이후 우승 단골 후보가 됐으며 그 밑바탕엔 칸토나가 있었다. 퍼거슨의 장기 전략이 마침내 꽃을 피운 것이다. 맨유는 지금도 신구(新舊)의 절묘한 조화가 하나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른바 ‘퍼거슨식 해지지 않는 나라’ 구축이다. 이번 시즌 우승도 긱스(35)-스콜스(34)의 두 노장이 루니-호날두 박지성 등 젊은 피들을 이끌었다.
칸토나는 93~94시즌 우승, 94~95시즌 2위, 95~96시즌 우승, 96~97시즌 우승을 이끌고 1997년 4월 영원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사실 94~95시즌도 칸토나가 자신의 성격만 잘 다스렸다면 맨유가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다. 칸토나는 1995년 1월25일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관중에게 ‘이단옆차기’를 해 8개월간의 경기출장 금지(1995년 10월1일 복귀)와 법원으로부터 120시간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퍼거슨은 말한다.
“에릭 칸토나는 내가 감독을 하면서 만난 선수 가운데 가장 재능 있고 패기 넘치고 생산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 내 50대의 축구인생을 칸토나 같은 멋진 선수와 함께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그는 어디에서건 동료들이 받기 쉬운 패스를 해줬다. 기발한 패스가 필요한 상황에서, 또 기술적인 재치로 공을 드리블해 수비수 사이를 헤쳐 나가야 할 때 칸토나만한 실력을 갖춘 선수는 찾기 힘들었다.
진정 비범하고 창조적인 선수들이 그렇듯이 칸토나 역시 필요한 순간에 진가를 드러냈다. 그는 중요한 순간에 꼭 결승골을 기록하곤 했다. 칸토나는 돈으로 따지기 힘든 존재감과 스타일을 팀에 제공했다. 그는 자부심이 매우 강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길 원했다. 그러나 성격이 불같았다.”
식스맨 박지성과 승부사 퍼거슨
퍼거슨은 퀴즈광이자 경마광이다.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퍼거슨의 맨유 재임 성적은 702승 286무, 221패. 그는 올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맨유가 1878년 창단 이래 17번째 리그 챔피언 컵을 안도록 했다. 92~93시즌 출범한 프리미어리그 16시즌 중 그가 10번이나 맨유 우승을 이끌었다. 지금과 같은 기세라면 1970~80년대 전성기를 보낸 리버풀의 18번 우승 기록 추월도 시간문제다. 5월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첼시와의 챔피언스리그까지 우승한다면 그가 98~99시즌 달성한 맨유의 챔피언스리그 첫 번째 우승에 이어 두 번째 우승까지 이룩하게 된다.
“축구팀을 제대로 컨트롤하는 유일한 방법은 승리하는 것이다. 성공만이 감독 고유의 권한을 충분히 행사할 수 있게 한다. 우승컵을 자꾸 따내면 대우가 달라진다. 감독은 선수들의 정신력과 훈련 자세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할 선수들을 골라내야 한다. 선발을 정할 때는 한 포지션에 2명 이상의 선수를 놓고 집중 관찰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평가가 나올 수 있다. 감독은 효과적으로 팀을 정비하기 위해 구성원의 개성을 모질게 억제하고 팀 전체를 총체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많다. 물론 감독의 명성은 궁극적으로 선수들의 승부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 감독이 가장 큰 좌절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감독은 지도력을 발휘해 선수들의 플레이를 빛내야 한다. 때로는 선수들로부터 제기되는 숱한 압력에 굴하지 않는 맷집도 갖춰야 한다. 최상의 팀이라고 해서 꼭 감독이 선호하는 선수들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선수들 절반 정도는 저녁을 함께 먹고 싶지 않은 녀석들이다. 그렇지만 그 녀석들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뛰어서 경기에서 이긴다.”
박지성은 ‘승리의 사나이’로 불린다. 이번 시즌 13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12승1무를 기록했다. 지난해까지 포함하면 25경기(23승2무) 연속 무패 행진. 그만큼 그에게는 행운까지 따른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의 연봉은 약 57억원. 여기에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5억7000만원의 보너스를 받는다. 여기에 5월22일 결승전을 치르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출전해 우승하면 11억원의 보너스를 더 챙긴다. 말콤 글레이저 맨체스터 구단주가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 2관왕을 할 경우 선수들에게 약속한 5억1000만원의 보너스도 기다리고 있다. 출전 수당도 더해야 한다. 대충 따져도 80억원 가까이 이른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실력이다. 잘 뛰면 돈과 명성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돼 있다. 박지성은 아직 붙박이 주전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전급의 백업 멤버라고 봐야 한다. 농구로 말하면 식스맨이다. 그만큼 박지성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피 말리는 경쟁을 하고 있다. 실력이 부쩍부쩍 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멀었다. 우선 골 결정력에서 경쟁자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올 시즌 1골 1도움. 부상으로 얼마 못 뛰었지만 어쨌든 지난 시즌의 5골 2도움보다 부진하다.
다시 시작점에 서다
영국 일간지 ‘더 선’은 맨유의 우승영웅 16인에 대한 시즌평점을 매겼다. 시즌평점은 시즌 내내 전체 활약상을 10점 만점으로 매긴 것. 1위는 단연 오른쪽 윙포워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평점 10점. 2위 중앙수비수 리오 퍼디낸드 평점 9점, 3위 네마냐 비디치(중앙수비수), 파트리스 에브라(수비수), 카를로스 테베스(포워드), 웨인 루니(포워드), 에뒤윈 반데사르(골키퍼) 평점 8점, 4위 웨스 브라운(수비수), 마이클 캐릭, 안데르손, 오언 하그브리스,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이상 미드필더) 평점 7점, 5위 박지성, 나니(이상 미드필더), 존 오셔(수비수) 평점 6점씩이다. 16명 중 사실상 꼴찌다. 이 신문은 박지성을 평하면서 “부족한 재능을 엄청난 노력으로 메웠다. 그라운드 구석구석을 누비는 모습은 특별한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지적했다.
퍼거슨은 냉정하다. 퍼거슨은 박지성이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처럼만 뛰어준다면 그를 계속 중용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지지부진하면 가차 없이 칼을 빼들 것이다. 박지성은 이제 시작이다. 다음 시즌이 정말 중요하다. 다음 시즌에 뭔가 보여줘야 한다. 공격 포인트도 10골 8도움 정도는 돼야 한다. 박지성은 해낼 것이다. 그는 아직 젊다. 성실하다. 소리 없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