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숨 쉬고 살아가고 활약할 터전은 일본”
- 정대세의 재능, 혼자만 몰라본 오카다 감독
- 사인할 때 꼭 ‘민족의 혼’ 문구 넣어
- ‘독도는 우리땅’ 부르며 일본인들과 논쟁
- “한국도 어머니들이 잔소리를 많이 합니까?”
- 히로시마 출신 동포여성과 1년째 교제…결혼할 것
- “여자와 처음 잔 것 말입니까? 고1 때였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는 일본 J리그의 평범한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조총련계 재일동포들과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인이었다. 지난해 6월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북한대표로 출전해 3경기에서 혼자 무려 8점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그때 정 선수 스스로 자신에게 붙인 별명이 ‘인간 불도저’였다. 공격수로서 상대팀을 향해 저돌적으로 밀고 나아간다는 의미인데, 실제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적이지만 잘한다”
그러나 J리그에서는 달랐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국내외 축구천재들이 득실득실한 그곳에선 그저 전도유망한 신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까지 싸잡아 매도하는 분위기 탓에 웬만큼 두각을 나타내지 않으면 주목을 받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일본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한순간에 반전시킨 것은 지난 2월17일 동아시아선수권대회 북한-일본전과 사흘 후 벌어진 한국-북한전이었다. 두 경기에서 정대세는 각각 한 골씩 넣었다. 일본인에게 북-일전은 경악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경기내용 면에서 굴욕적인 시합이었다.
정대세는 전반 6분 일본 문전을 향해 선제골을 작렬시켰다. 그것도 가와사키 프론타레 소속의 동료 골키퍼 가와시마 에이지를 향해 카운터펀치를 날리듯 말이다. 게다가 선제골을 넣은 그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동포 3세라는 것, 그리고 J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 프로선수라는 사실이 일본인들의 가슴을 찔렀다. 일본인들이 받은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고, 그런 애증만큼이나 그에 대한 일본 언론과 국민의 관심도 폭발적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어느 정도 쇼크를 받았는지, 한 축구담당 기자의 기사를 인용해본다.
“…우리 편 볼을 빼앗을 때의 기동성, 볼이 (정 선수에게) 넘어왔을 때의 판단력과 처리 능력. 정 선수는 톱클래스 선수의 플레이를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퍼포먼스에 ‘적이지만 잘한다’라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대세가 일본대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 일본에 그처럼 저돌적인 스트라이커가 없는 것은 왜일까. 올해 FC도쿄에 복귀한 곤도 유스케가 비슷한 타입이지만 스피드와 순발력, 집중력과 정확성에서는 정 선수 쪽이 더 우수하다. 앞으로 일본대표팀이 북한과 경기할 때는 대단히 위협적인 정 선수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특히 북한 축구는 일본 축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준차가 난다고 생각했던 일본 축구계는 정대세에게 선제골을 내준 후 간신히 한 골을 만회한 상황을 놓고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에 대한 책임과 비난은 고스란히 일본대표팀 오카다 감독에게 돌아갔고, 그 비난만큼의 찬사를 정대세가 받았다.
인터뷰 3가지 조건
일본 언론은 정대세의 플레이를 경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몸을 사리지 않고 적진을 향해 파고드는 그의 빠른 돌파력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가 재일동포라는 사실을 많이 아쉬워했다. 더욱이 일본인들이 가장 거부감이 심한 조총련계라는 사실에. 일부 축구담당 기자들은 “어떤 조건을 내세워서라도 그를 귀화시켜 일본대표팀 선수로 뛰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대세 선수는 내년 유럽 진출을 꿈꾸고 있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섭외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의외로 길었다. 한일 양국에서 인터뷰 신청이 너무 많이 몰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J리그가 시작된 탓에 경기출전과 합동훈련까지 겹쳐, 시합 전후의 간단한 코멘트 외에는 정식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본에서는 인터뷰를 신청하려면 먼저 인터뷰 신청서와 함께 언론매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인터뷰 목적, 인터뷰 질문 내용 등을 작성한 서류를 해당 홍보실로 보내야 한다. 심지어 인터뷰어의 경력서까지 요구하는 곳도 있다. 한국처럼 전화 몇 통으로 정해지는 예는 없다. 이는 형식과 격식을 대단히 중요시하는 일본인들의 습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 사회가 워낙 철저한 시스템에 따라 돌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정대세 선수에 대한 인터뷰 신청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창 떠오르는 스타인지라 단독 인터뷰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남일은 동료, 박지성은 라이벌?
마침내 4월14일로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 그를 만나기 위해 훈련구장을 찾은 날은 봄볕이 따뜻했다. 도쿄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쯤 걸리는 가와사키(川崎)시 아소(麻生)구에 위치한 가와사키 프론탈레의 아소그라운드 전용구장은 야트막한 산허리 중턱에 한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정 선수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에이전시 ‘에볼루션’의 남태화 대표는 인터뷰 승락 조건으로 세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국적에 대한 질문을 삼갈 것, 둘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질문을 하지 말 것, 셋째 북한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묻지 말 것. 남 대표는 “그동안 한국 언론으로부터 수없이 똑같은 질문세례를 받아 이젠 정 선수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약속시각 1분 전에 나타난 정 선수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자신의 ‘애마’인 지프를 직접 운전해 훈련장에 도착한 그는 ‘민족학교’ 출신 특유의 어투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거구(180cm, 79kg). 그리고 누가 조선인이 아니랄까봐 한일자로 날이 선 실낱같은 눈, 거기에다 강한 인상을 풍기는 까까머리. 만약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마주쳤다면 분명 공포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직한 독특한 외모였다. 오죽하면 한국 기자들이 한국에서 인기가 있다고 전해주자 대뜸 “이 얼굴로요?” 하고 되물었을까. 그만큼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묘한 카리스마를 동반하고 있었다.
구단 사무실에 마주앉아 인터뷰에 들어가자 좀전의 밝은 표정과는 달리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먼저 한국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작년 4월에 가와사키팀이 전남팀과 시합을 하기 위해 광양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흘간 머물렀는데, 시골이어서인지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불고기요? 먹어보았는데 일본보다 맛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이른바 ‘민족학교’를 다닌 재일동포들의 어투는 매우 독특하다. 된발음이 자주 튀어나오고 남녀를 불문하고 말끝마다 ‘습니다’를 붙인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런 재일동포들이 딱딱하게 느껴져 긴장한다고 말한다.
정 선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답 말미는 언제나 ‘습니다’로 끝났다. 한국 언론에서 하도 불고기를 좋아한다고 보도해서 평소 육식을 즐기느냐고 물었더니 정색을 하며 그렇지 않다고 한다. 불고기는 좋아하지만 육식을 많이 하면 몸이 무거워지기 때문에 시합 전에는 절대로 먹지 않고 평소 균형 맞춰가며 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데, 가족과 주위의 반응은 어떤가요.
“솔직히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해봤는데, 마음으로까지 전해오지는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일본에 살고 있어서 못 느끼는가 봅니다. 다만 한국에 있는 재일동포 친구가 전화로 ‘네가 한국에서 꽤 유명해졌다’고 전해온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요즘도 ‘주위에서 비행기(인기) 태워주는 것에 절대로 휩쓸리지 말고 늘 겸손하라’고 매일같이 충고를 합니다. 저도 어머니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인기는 거품 같은 것이니까요.”
정대세는 북한에 대한 조국애는 투철하지만 손으로 하트를 만드는 20대 청년이었다.
“조건에 따라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역시 간다면 인기 있는 팀으로 가야겠지요.”
그러면서 “사실은 얼마 전에 한국에서 그런 이야기가 잠깐 오간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 선수 본인이 아직은 현재의 소속팀을 떠날 의사가 없어 그 얘기는 없던 일로 했다고 한다. 한국 선수 중에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김남일 선수”라고 했다. 아직 개인적으로는 친하지 않지만 같은 J리그에서 뛰고 있어서인지 동료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반면 한국-북한전에서 부딪친 적이 있는 박지성에 대해서는 “라이벌 의식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언젠가의 유럽 진출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꾸준히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영어회화 실력이 어느 정도냐고 묻자 지난 3월26일 한국-북한전에 출전하기 위해 상하이에 갔던 일화를 소개했다. 북한대표팀이 묵은 호텔에서 우연히 독일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그 독일인과 두 시간 넘게 영어로 대화를 나눴는데, 주로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나 경제 같은 전문적인 내용으로 이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위화감이 들더라고 한다. 영어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뼈저리게 느꼈다고.
유럽 진출 준비
“일반적으로 ‘스포츠 선수’ 하면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어머니가 축구선수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셔서 공부는 늘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대학 때 최우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아이큐요? 그것은 무서워서 재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본 기자들 사이에서 두뇌 회전이 빠른 선수로 통한다. 몸으로만 축구를 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경기의 흐름을 읽고, 머리로 공의 속도와 움직임을 계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유럽 축구에 진출하면 나카다 히데토시처럼 대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는 사람이 많다. 그도 이 같은 평가를 알고 있는 듯, “지금은 완벽한 몸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 유럽에 진출해서 성공할 자신이 있나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매일 경기 내용을 점검하고 분석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해가고 있습니다.”
▼ 프로축구선수로서 자신에게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성장가능성을 포함해서 점수를 준다면 50점입니다. 나머지 50점은 앞으로 제가 노력해서 채워가야 할 점수입니다.”
▼ 자신의 장단점을 꼽는다면.
“장단점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장점이라면 피지컬하고 강한 헤딩과 슈팅, 스피드가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무방비 상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갭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또 다른 단점은 제가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성격인데요, 그런 소심함을 없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축구와 정치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포츠엔 국경이 없잖습니까. 역시 축구는 정치를 앞서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어려운 일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축구가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정치가 축구를 따라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 그럼 정 선수는 축구선수로서 스스로 북한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조선은 오늘날 저를 있게 한 조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구심점이 되고 있지요. 저는 제가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것이 곧 조국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활약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우리 공화국에 대한 이미지도 높아져갈 테니까요. 실제로 북조선에 대해 무섭다고 생각했던 일본인들의 인식이 저의 활약으로 인해 많이 희석됐습니다. 그동안 북조선은 실체가 없는 나라라고 비판하는 기자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런 인식을 제가 좀 더 열심히 활약함으로써 불식시키고 싶습니다.”
이쯤 되면, 비록 ‘인터뷰 조건’이 신경 쓰이긴 해도 그의 국적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팀은 싸워 이겨야 할 존재
정대세 선수의 중고 ‘애마’. 정 선수는 “새 차를 사고 싶은데 어머니가 반대해서 못 사고 있다”며 웃었다.
“한마디로 공화국은 부모와 같은, 나를 항상 지켜봐주는 조국입니다. 한국은 그 다음이고, 일본은 제2의 고향입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나고야는 그래서 애정이 듬뿍 담긴 곳이지요. 또 친척도, 친구도 많고요. 역시 제가 숨 쉬고 살아가고 또 활약할 터전은 일본입니다.”
▼ 귀화하면 일본대표선수로 뛸 수도 있는데, 귀화를 생각해본 적은 있습니까.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귀화하면 안 되지요. 물론 일본대표선수들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대표는 제가 설 자리가 아니라 북조선 대표선수로서 대립해야 할 상대입니다. 싸워 이겨야 할 그런 존재지요.”
일본 언론에서는 재일동포 3세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해 일본대표로 뛰고 있는 이충성(일본명 大山忠成) 선수와 정대세 선수를 곧잘 비교한다. 같은 시기, 같은 J리그에서 활약하면서 이 선수는 한국 국적에서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대표팀이 됐고, 정 선수는 한국국적을 가졌으면서도 굳이 일본이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 ‘북조선’ 대표선수로 뛰고 있다. 일본인에게 두 사람의 선택과 삶의 향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 이충성 선수가 일본에 귀화해 일본대표팀 선수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건 이 선배가 선택한 길입니다. 제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요. 다만 그 자신이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뛰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정 선수는 재일동포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 꼭 ‘민족의 혼’이라는 문구를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이런 사고를 온몸으로 대변해주는 일화가 있다. 북한-일본전과 한국-북한전에서 양국 국가가 연주될 때 그가 그라운드에서 뒷짐을 진 채 말없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모습은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는 “우선 조국인 북조선의 대표선수로서 한국, 일본과 대등하게 축구 기량을 겨룰 수 있다는 벅찬 감정과, 한국이든 일본이든 꼭 이겨 조국을 빛내야겠다는 일념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정 선수가 북한에 가본 것은 고3 때의 수학여행. 그때 2주 동안 북한을 여행한 후 아직까지 가본 적이 없다. 현재 그의 국적은 ‘한국’. 정 선수의 아버지(정길부)가 경북 의성 출신인 까닭에 자연스럽게 한국 국적이 됐다. 지금은 일본법이 바뀌어 어머니 국적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때만 해도 아버지 국적을 따르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주민등록신고는 하지 않아 호적이나 주민등록증은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주민등록번호가 없다. 다만 일본구청에서 발급하는 외국인등록증에 국적이 한국으로 돼 있을 뿐이다.
투철한 민족의식
현재 조총련계로 지칭되는 ‘재일조선인’은 그들이 북한을 선택했기에 국적을 ‘조선’으로 한 것이 아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이었던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북한을 조국으로 삼은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조선’ 국적을 가진 이들은 무국적자가 된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1965년 한일협정을 맺어 국교정상화가 된 후에 한국 국적으로 바꾼 사람도 많았지만, 국적에 대해 무지했거나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던 재일동포들의 국적은 식민지 시절과 변함없이 ‘조선’으로 남았다. 그중에는 막연히 언젠가 남북통일이 되면 한국도 북조선도 아닌, 제3의 국명이 만들어질 것이라며 국적을 바꾸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다.
정 선수의 어머니 리정금(58)씨는 어릴 때부터 조총련계인 민족학교를 다녀서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그 영향으로 정 선수도 민족학교에 보냈다. 누나와 형도 같은 민족학교에 다녔다.
민단계 한국학교에 보내고 싶다 하더라도 보낼 학교가 없어 민족교육을 시킬 수가 없었다. 현재 일본에는 민단계 학교가 도쿄 오사카 등 일본 전국을 통틀어 4개뿐이다. 반면 조총련계 민족학교는 유치원에서부터 조선대학교까지 80여 개가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260여 개가 있었는데 재정 문제로 20여 년 사이에 3분의 1로 줄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초·중·고에서 대학까지 우리말, 우리글로 수업을 하는 곳은 조총련계 학교뿐이다. 그래서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우리말을 할 줄 알면 조총련계, 할 줄 모르면 민단계로 자연스럽게 인식될 만큼 민족교육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민족학교 출신들의 특징은 이념에 관계없이 민족심이 매우 강하다는 것. 북한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철 같은 데서 교복 치마저고리가 일본인들에 의해 찢겨나가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입고 다니는 이들이 민족학교 학생들이다. 그런 민족교육을 정 선수는 초·중·고는 물론 대학도 조선대학교를 다니면서 받았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축구만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축구로 시작해서 조금 쉬는 시간까지 오직 축구만을 했어요. 축구는 제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즉 축구는 내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그는 어릴 때부터 프로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취미도 특기도 모두 축구였을 만큼 축구는 그의 인생 전부였다. 일본에서 프로축구선수가 되려면 축구부가 있는 일본의 일반 대학이나 구단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전국 규모의 대회에 출전할 기회가 주어지고, 그러는 가운데 프로구단에 입단할 기회가 생긴다. 그럼에도 정대세는 일부러 조선대학을 선택했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조선대학교에도 축구부가 있다는 것. 비록 조선대학 축구부가 도쿄도 3부리그에 속해 있었지만 그는 프로진출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대학에서 J리그에 진출하는 최초의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도쿄도 3부리그 팀에 관심을 갖는 축구인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부리그에 속한 대학 축구선수들은 서클 차원의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정 선수처럼 치열하게 볼을 차지도 않았다. 그것이 그를 더 못 견디게 만들었다.
그런 만큼 정 선수의 고민도 깊어갔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대학시절이 정신적으로 가장 불안정하고 방황하던 때”였다고 했다. 매일 운동장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하면서도,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늘 그를 괴롭게 했다. 집안이 넉넉한 것도, 그렇다고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닌, 그저 동포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재일동포 3세라는 위치에선 막연하게라도 잡히는 진로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축구에 매달렸다. 불안한 그 농도만큼 연애하듯이 그는 볼과 진실된 사랑을 했다. 그리고 볼에게 속삭였다. “너는 내 인생의 전부야”라고.
그는 남들이 핸디캡이라고 하는 ‘재일’레테르를 달고 프로선수가 되어 자랑스럽게 그라운드를 누비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슴속에 조국으로 방점을 찍어놓은 북조선의 대표가 되어 국제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싶었다. 실제로 같은 재일동포 3세인 안영학(삼성) 선수나 이한재(J리그) 선수가 북조선 대표로 뛰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꿈은 저만치 물러나 있었다. 여기서 그는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게 된다.
“조선대 시절에 공화국 대표가 되고 싶었습니다. 감독님도 적극 추천했고요. 그런데 국적이 한국으로 돼 있어 안 됐습니다. 그러잖아도 저는 심정적으로 내 조국을 공화국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국적을 바꾸려고 했지요. 하지만 일본법이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꿀 수는 있어도,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꿀 수는 없게 돼 있었습니다. 그때 참 괴로웠습니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꿈을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튼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결론은 하나였지요. 프로의 눈에 띌 만큼 조선대학 축구부의 실력을 높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FIFA에 청원서 제출
대학 4년 동안 열심히 뛰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대학 축구부가 도쿄도 3부리그에서 1부리그(2007년에는 관동지역 대학 2부리그로 승격했다)로 승격했다. 1부리그 팀이 되면 J리그 팀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실업팀의 게임 상대로 실전에 나설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런 시합이 훗날 그가 J리그에 진출하는 초석이 됐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2005년 제35회 조일친선축구대회에 출전한 것이다. 그는 실업팀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마침 그 모습을 에이전트가 지켜봤다. 당연히 다음 수순은 스카우트였다.
물론 에이전시의 눈에 들었다고 곧바로 프로구단에 입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구단의 테스트를 거쳐 검증을 받아야 했다. 그 일환으로 J리그 팀을 돌며 프로선수들과 함께 연습하면서 검증을 받았고, 마침내 가와사키 프론타레 팀과 계약을 맺었다.
지난 2월17일 북-일전에서 정 선수가 일본인에게는 정말 뼈아픈 선제골을 넣었을 때 일본대표팀 감독이 오카다 다케시였다. 2005년 정 선수가 프로구단을 돌며 훈련을 받을 때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구단이 요코하마였는데, 당시 감독이 바로 오카다였다. 정 선수는 그때 요코하마 팀에서 정식 입단 테스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카다 감독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순발력이 뛰어나고 패스와 볼 장악력이 특출한 선수라는 걸 주변 사람들은 모두 느꼈는데도 정작 오카다 감독은 깨닫지 못하고 계약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선수를 제대로 알아본 가와사키 프론타레 덕분에 정 선수는 꿈에 그리던 J리그 입성이 결정됐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다. 일본 프로축구는 상위 리그인 J1리그와 하위 리그인 J2리그가 있다. J1리그에서 팀 성적이 최하위권이면 J2리그로 내려가고, J2리그에서 최상위권에 오르면 J1리그로 승격한다.
그는 J2리그 팀에서 주전멤버를 약속받았다. 반면 J1리그 팀을 선택하면 십중팔구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다. 가와사키에는 외국 선수를 비롯해 기량이 뛰어난 공격수가 많았다. 신인에 불과한 그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그때 중·고교 시절 축구감독인 이태용 선생이 조언을 해줬다.
“진짜 축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톱클래스인 메이저에 도전하라!”
은사의 충고대로 가와사키를 선택했다. 2006년이었다. 연봉은 480만엔에 불과했다. 예상대로 처음 1년 동안은 실전에 나서는 횟수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횟수가 훨씬 많았다. 총 22게임에 출전해 3골을 넣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가 두각을 드러낸 것은 2007년 중반부터다. 운도 따라줬다. 외국인 주전 공격수가 연봉 문제로 운동을 소홀히 할 때 그가 주전 멤버가 됐다. 이런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 한 해 33게임에 출전해 17골을 넣었다. 2년차 신인치고는 괄목할 만한 성적이었다.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일본 팬도 부쩍 늘었다.
그의 플레이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본 북한대표팀 감독이 그를 불렀다. 국적 문제는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가 재일동포들의 역사, 한국 국적을 조선 국적으로 바꿀 수 없는 일본 현행법을 자세하게 설명한 문서, 그리고 정 선수가 직접 쓴, 북한대표로 뛸 수 있도록 인정해달라는 청원서를 FIFA에 제출했다. 마침내 FIFA로부터 북한대표선수로 뛸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
한 게임 9골
“정 선수가 공에 대한 한이 많았나 봅니다. 북한대표선수로 그라운드에 나서자마자 소나기골을 퍼부었으니까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본 축구관계자, 특히 가와사키 구단 관계자가 많이 놀랐다지요.”
지난해 6월 동아시아선수권대회 예선전에서 북한대표선수로 출전한 정대세 선수가 8골을 뽑아내며 득점왕을 차지한 것을 두고 ‘스포츠닛폰’의 도카시 기자가 한 말이다. 그의 맹활약이 일본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그는 가와사키 팀에서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된다.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놀라운 기록은 전에도 많았다. 조선대학교 시절엔 한 게임에서 혼자 9골을 넣은 적도 있다. 지난 4월2일 홋카이도 삿포로팀과의 원정경기에서도 혼자 두 골을 넣어 상대팀을 2대 0으로 이기는 데 수훈을 세웠다.
현재 그의 연봉은 2000만엔(약 2억원) 정도. 그는 어머니가 수입을 관리한다고 했지만 구단 관계자는 “토목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불경기로 자금난을 겪고 있어 대부분 부모님 생활비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정 선수 역시 돈을 많이 벌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부모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건강이나 체력관리는 구단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정 선수 스스로 챙길 수밖에 없다.
“전화는 매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그렇게 잔소리가 많습니까? 물론 나를 많이 사랑하시니까 그런다는 것을 잘 알지만 우리 어머니는 특히 심합니다. 바로 어제 저녁에도 한바탕 했어요.”
그러면서 껄껄 웃었다. 뭣 때문에 어머니하고 말씨름을 했느냐고 묻자 “별것 아닌 것 가지고 투덜댔다”고 했다.
“마음으로는 안 그런데 어머니가 똑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하니까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역시 나는 나쁜 아들입니다.”
나중에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현재 그는 중고차를 타고 다니는데, 새 차로 바꾸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면서 반대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제 축구인생이 이제부터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좀더 열심히 간바루(열심히)한 다음에 좋은 차를 타도 늦지 않다는 말씀을 하세요. 아직 축구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한 단계에서 좋은 차부터 타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맞는 얘기지만, 뻔히 안 되는 줄 알면서 괜히 응석부리듯이 졸라보는 거지요. 그럼 어머니는 예의 그 잔소리를 또 하시고…(웃음). 매일 되풀이되는 우리 모자 간의 대화입니다.”
솔직히 새 차 구입은 오래전에 포기했다고 한다. 새 차를 구입할 만큼 높은 연봉을 받을 때 바꾸겠다는 것. 하지만 동료선수들이 새 차를 사서 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화려한 세계의 여자는 무서워”
그의 한 달 용돈은 20만~40만엔. 대부분 식비와 음악CD를 구입하는 데 쓰지만,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비용으로도 많이 나간다고 했다.
“같은 조선대학을 나온 히로시마 출신 동포여성으로, 사귄 지 1년 됐는데 사랑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는 모름지기 남자는 여자로부터 사랑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시고, 어머니는 지금 관망 상태입니다. 제가 유럽 진출 꿈도 있고, 아직 결혼할 시기가 아니어서 교제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그 친구와 결혼할 생각입니다. 여자친구 아버지가 축구를 하신 분이어서 저에 대해 흔쾌히 허락도 하셨고요”
유명 스포츠 스타들 중에 연예인과 결혼하는 이가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즉각 “부담스럽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편으론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세계에 있는 사람은 좀 무섭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축구를 그만두고 보통사람으로 돌아갈 텐데, 연예인은 연애는 할 수 있지만 결혼은 솔직히 많이 부담스럽지요.”
그가 연예인 못지않게 끼가 많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유도에서 격투기선수로 전향한 추성훈이 넘치는 끼를 발산하려 틈만 나면 가라오케에 가서 노래를 불러제꼈다는데, 정대세도 그 못지않다. 게다가 그는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다. 그래서 웬만한 노래는 피아노로 칠 줄 안다.
올 초에는 이런 끼를 한껏 뽐낸 적도 있다. 평소 그는 취미가 DJ라고 말해왔다. 실제로 지난 1월21일과 22일, 이틀에 걸쳐 요코하마FM의 ‘모닝스탭스’라는 프로그램의 생방송에 출연해 DJ를 맡기도 했다. 프로DJ 못지않게 매끄러운 진행으로 담당 스태프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물론 방송에 나갈 곡도 그가 직접 골랐다. 그의 생방송 DJ 출연은 두고두고 일본 팬들에게 화제가 됐다.
“일본 사람들과 함께 가라오케에 가면 제가 꼭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독도는 우리땅’인데, 그래서 일본인들과 자주 정치적 논쟁을 벌입니다. 저는 정치적 논리에서도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조선대학 시절 그의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운동뿐만 아니라 노는 자리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여학생들과 짓궂게 장난을 잘 치는 이도 그였고, 후배들을 잘 챙겨주는 선배도 그였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 늘 그를 따르는 여학생이 많았다는 것.
지금까지 여자를 몇 명이나 사귀어봤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여섯 명 정도…”라며 낄낄댔다. 자기 나이에 그 정도는 보통이라는 것. 내친김에 여자와의 첫 경험은 몇 살 때였느냐고 묻자 “같이 잔 것 말입니까?” 하고 되묻더니 신세대답게 “고1 때였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멋쩍게 웃었다.
J리그 득점왕 목표
올해 그의 목표는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해 내년에 유럽 진출을 하는 시금석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2010년에 북한대표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것이다. 현재 그는 12게임에 나가 5골을 넣어 J리그 개인성적 공동 6위에 랭크돼 있다. 가와사키 프론타레 선수로서 상위권에 랭크된 선수는 그가 유일하다.
“어머니 말씀처럼 저의 축구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재일동포가 저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축구선수로서 잘하면 잘할수록 우리 재일동포들에게는 그만큼 큰 용기와 지표가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전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그리고 노력도 지금보다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덩치 큰 유럽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체력단련도 더 많이 해야 하고,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영어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저에게 관심이 많은 한국 팬들께는, 지금은 그저 감사하다는 말과 앞으로도 계속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주십사 하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