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쪽방촌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 타계 후 요셉의원

“언제나 부족했지만 언제나 채워져 있었다”

  • 김일동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ildong@donga.com

    입력2008-06-10 16: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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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의학을 공부하며 사람을 살리는 데 이용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밤늦게 퇴근하는 길, 길가에 쓰러져 있는 환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 치료하고 나면 한 사람을 더 살렸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 지인들에게 개원 20주년을 맞아 보낸 글에 요셉의원 선우경식 원장은 이렇게 썼다. 그랬던 그가 4월18일 암으로 세상을 떠나 요셉의원의 앞날이 어둑해졌다. 그가 떠난 요셉의원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쪽방촌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 타계 후 요셉의원
    미국 플로리다 주 웨스트팜비치에서 가정의 겸 한의사로 일하는 심재훈(73) 선생은 지난 5월 초부터 7주 예정으로 요셉의원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2003년 4월 처음 요셉의원에 온 이후 이번이 네 번째 방문이다.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8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92년까지 뉴저지주에서 가정의로 일했다. 그 후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변신해 11년간 플로리다주 올랜도 시 소재 연방 교도소 의무과장을 지냈다. 연봉만 16만9000달러에 달하는 고위직이었다.

    그가 은퇴를 결심한 것은 더 늦기 전에 봉사를 해야겠다는 의과대학 신입생 시절의 각오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의사가 돼서 돈 벌면 가난한 이웃에 도움 되겠다고 결심했었는데,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생각해낸 것이다. 의료봉사 하기 적당한 곳을 물색하던 그는 뉴욕에 있는 가톨릭의료선교본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케냐, 멕시코 등지의 시설과 함께 한국의 요셉의원을 소개했다. 직원이 미국인인데도 요셉의원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서울 영등포역 부근에 있던 요셉의원은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고 한다. 날씨는 더운데 냉방이 안 돼 땀이 비오듯하고 화장실 냄새가 가시지 않는 곳으로, 미국생활에 익숙했던 그로서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첫해 3개월을 근무했던 그는 2년 뒤인 2005년 4월에 와서는 6개월을 일했다. 이후 지난해 4월에 와서 3개월 있었다. 2004년에는 전해 가을에 시작한 한의대 공부 때문에 오지 못했다. 그가 한번 오면 이처럼 장기체류하는 이유는 비행기 삯이 아깝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못 올까 싶어서다. 남부 플로리다 한인감리교회 권사인 그는 “환자들에게 베푸는 것보다 내가 훨씬 많은 은혜를 받는다”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었다.



    어려운 이웃들의 버팀목

    ‘쪽방촌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 타계 후 요셉의원
    가내 철공소와 쪽방들이 엉켜 있는 서울 영등포역 부근의 요셉의원은 가난하고 병들어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찾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병원이다. 선우경식 원장이 1987년 서울 신림동에서 개원하고, 1997년 5월1일에 이곳으로 옮겼다. 신림동 시절 달동네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면, 이곳에서는 노숙자, 출소자, 외국인 노동자 등 아파도 갈 곳이 마땅찮은 사람들이 주로 온다. 건강보험증은커녕 주민등록증 없는 사람도 많다.

    환자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급으로 일하는 봉사자 덕분이다. 전문의 80명을 포함해 의료봉사자 200명과 일반봉사자 400명 등 연 600여 명의 봉사자가 이곳에서 일한다. 21년간 요셉의원을 지켜온 선우경식 원장이 지난 4월18일 별세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요셉의원은 다른 병원들이 문을 닫는 저녁 7시부터 진료를 시작한다. 의사들이 자기 병원에서 퇴근해 이때부터 일을 하기 때문이다. 대신 낮에는 상주의사, 은퇴의사가 내과진료를 한다. 앞서 소개한 심재훈 선생 등이 낮 시간에 환자를 본다. 1일 내원 환자는 100여 명. 의사가 약 처방을 내면 약사가 바로 약을 내준다. 약값은 없다.

    병명도 고혈압부터 당뇨병, 관절염, 피부병, 간질환까지 7, 8개 질환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종합병동’이다. 알코올 질환자는 부지기수고, 막노동하다 다친 정형외과 환자도 많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강남성모병원, 도티기념병원 등 10곳의 협력병원으로 응급 이송한다. 그러나 협력병원에 병실이 없으면 이곳 돈으로 일반 병원에 입원시킨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는 방법이 없다는 것.

    요셉과 요셉의원

    ‘쪽방촌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 타계 후 요셉의원

    고 선우경식 원장과 요셉의원 건물.

    진료가 전부는 아니다. 잘 데 없는 사람은 숙소(성모자헌의 집)로 보내고, 알코올 재활이 필요한 사람은 시설(목동의 집)로 보낸다. 옷 없는 사람은 옷 입혀서 보내고, 밥 굶는 사람은 밥 먹여서 보낸다. 냄새나는 사람은 목욕시키고 노숙자들에게는 동사하지 않도록 이불도 덮어준다.

    1973년 가톨릭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킹스브룩 메디컬센터에서 유학한 선우경식 원장은 1980년 한림대 의대 부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그저 수많은 의사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1983년 후배인 가톨릭의대생들의 주말진료 봉사단에 참가해 서울 신림동 철거민촌을 찾으면서 그의 인생은 뒤바뀌게 된다.

    크고 작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의료혜택은 꿈도 못 꾸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봉사단을 찾아왔다. 입원해야 할 사람, 수술이 필요한 사람, 지속적인 간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1주일에 한 번뿐인 주말진료는 턱이 없었다. 게다가 소문이 나자 봉천동 월계동에서, 멀리 구리시에서도 환자가 왔다.

    급기야 매일 진료가 가능한 자선병원을 만들자는 말이 나왔다. 지역주민, 봉사자들이 모여 모금을 하고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선우 원장도 1987년 방지거병원 내과과장을 그만두고 관악구 신림시장 내 낡은 건물 2층에 방 한 칸을 세내어 요셉의원을 열었다. 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되기 2년 전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가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약속했던 후원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3개월 후에는 제약사의 약품 공급이 끊어졌다. 선우 원장은 환자 진료보다 동료, 선후배 의사 찾아다니기 바빴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환자들이 계속 밀려와 도망갈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무렵 미국에서 약품 샘플을 제법 얻어와 약을 처방했는데, 미제 약을 써서 용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왜 병원 이름이 요셉인가. 첫째는 선우 원장의 가톨릭 세례명이 요셉이고, 둘째는 예수의 양부인 요셉 성인이 노동자와 죽음을 앞둔 임종자의 수호성인이라는 설명이다. 내원 환자의 대부분이 일용직 노동자였음을 감안하면 걸맞은 작명같이 들린다.

    요셉의원 후원자는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1000명을 돌파했다. 현재는 약 2500명. 정부나 교구 지원은 일절 없다. 개인 기부와 기업의 장비 지원이 전부다. 몇 년 전 한 대기업에서 병원 건물을 새로 지어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 외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 등 음악인들이 9년째 자선음악회를 열어 수익금을 기탁하고 있고, 김경인 인하대 교수 등 미술인들이 5회의 자선 전시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선우 원장의 인간적인 치료

    요셉의원 개설자는 정진석 추기경으로 돼 있다. 선우경식 원장은 이 병원 ‘근무의사’로 돼 있었다. 선우 원장 타계 후 근무의사는 2006년부터 이곳에서 상근해온 최영아(38) 내과의사로 바뀌었다. 그는 1주일에 네 번, 월·수·목·금 오후에 하루 4시간씩 환자를 본다. 나머지 시간은 집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생활한다. 의사 되고 나서 제대로 월급 받은 적이 없다.

    2001년 1월 내과 전문의를 취득한 최영아 원장은 그해 바로 요셉의원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곧 문을 열 최일도 목사의 다일천사병원 개원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무료병원 운영의 노하우를 어느 정도 익힌 그는 2002년 10월부터 만 2년간 다일천사병원에서 의무원장 겸 상근의사로 일했다. 그리고 2006년 7월부터는 다시 요셉의원에서 붙박이로 일하고 있다.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알코올 중독과 관계되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 표현이 어눌해 의사는 그런 환자와 의사소통하는 데 애로가 있다. 말이 안 통하니까 화를 잘 내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변한다. 의사도 사람이므로 환자가 말 안 들으면 짜증나게 마련이다. “저 인간 또 왔어?”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때로는 그런 환자의 블랙리스트가 병원들 사이에서 돌기도 한다.

    ‘쪽방촌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 타계 후 요셉의원

    의사가 약을 처방하면 약사가 바로 약을 내준다.

    요즘은 노숙자도 구청 등에서 증명서를 발급받으면 국공립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급식이나 숙박시설은 서울에만 150곳에 이른다. 그런데도 지하도나 역에는 홈리스들이 자리다툼을 한다. 그런 시설에서 구속되기 싫어서다.

    최영아 원장은 선우 원장으로부터 사람 대접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환자나 직원에게 일절 화내지 않고 주정뱅이 환자를 끝내 재활시켜 직원으로 채용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고 말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과 퇴원을 60차례 반복한 사람을 끝까지 치료해 술을 끊게 만드는 것에 “감동 먹었다”고 한다. 가난한 병원이어서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도 끔찍하게 아끼지만, 환자를 위해서는 비싼 CT나 MRI도 서슴없이 이용하는 것에 놀랐다고 그는 말했다. 일반 장애시설에서는 직원과 수용된 사람들 간에 갈등이 일게 마련인데, 여기는 화합이 잘되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선우 원장 타계, 그 후

    심재훈 선생은 미국에서 하던 식으로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양복 차림으로 환자를 맞는다. 미국의 개인 병원 중에는 환자를 자연스럽게 맞기 위해 가운을 안 입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 병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미국에서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한다.

    “예컨대 당뇨병 환자 치료는 약이 ⅓, 운동이 ⅓, 음식이 ⅓입니다. 설명을 제대로 안 해주면 약만 먹고 음식 조절과 운동을 소홀히 할 것 아닙니까. 반대로 위궤양 환자는 속이 안 쓰려도 6주에서 8주는 약 복용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증상이 없어졌다고 약을 그만두면 재발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깨알같이 적어 설명해줍니다.”

    그는 환자들이 자존심 상할까 말도 조심스럽게 한다. 물론 그도 말 안 듣는 환자 만나면 속상하다. 1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해도 안 오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처방을 내리고 약 달라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병을 컨트롤하는 단계에 든 환자를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건강한 사람도 나이가 들면 치과를 찾게 된다. 행려자, 노숙자들은 예외없이 치과 질환자들이다. 이를 잘 안 닦고, 제때 치료를 못 받아 치아가 엉망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무료봉사병원은 대개 내과와 치과 중심이다. 서울 서초동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김정식(64) 원장은 1987년 요셉의원 개원 때부터 치과 진료를 맡고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퇴근을 서두르고 이곳으로 달려온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달려 한때 그만둘까도 생각했으나, 선우 원장이 몸이 불편한 것을 안 뒤로는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한다. 현재는 16명의 치과의사로 구성된 치과진료팀장을 맡고 있다. 치과가 다른 과보다 의사가 많은 것은 치료시간이 많이 걸려 1일 3, 4명의 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셉의원에서는 단순히 치주질환만 봐주는 데 그치지 않고, 보철까지 책임진다. 때로는 수백만원에 이르는 ‘사랑의 틀니’를 해준다. 음식물 씹는 기능이 어떤 기능보다 중요하므로, 심미적으로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기능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게 해준다는 설명이다.

    무료진료를 받는 환자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해한다. 공짜라서 엉터리로 해주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 있다. 틀니도 마찬가지다. 공짜라서 적당히 해준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면 제대로 관리할 리가 없다. 수백만원짜리 틀니가 헛일이 될 수도 있으므로 항상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김정식 원장은 강조한다.

    대학생들이 치과 진료를 도와주는 것도 유쾌한 풍경이다. 목요일 저녁에는 을지보건대학 치위생과 학생들이, 금요일에는 여주대학 치위생과 학생들이 자원봉사하고 있다. 학생들은 치과 유닛 의자 옆에서 기구 준비와 석션(suction·흡인) 작업을 보조한다. 기자가 방문한 5월2일에는 꽤 더운 날씨임에도, 학생들이 실습생답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가난한 병원 돕는 ‘착한이웃’

    표지에 ‘요셉의원을 돕는 잡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잡지가 있었다. ‘착한이웃’이라는 잡지다. 2003년 5월 창간호를 내서 5년 가까이 끌고 오다 올해 3월호를 끝으로 무기 휴간한 잡지다. 이동진 전 나이지리아 대사가 발행인으로 여러 곳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꾸려왔지만, 경영난이 심각해 부득이 무기 휴간하기로 했다는 것. 이 전 대사는 지난 4년여 동안 약 1억원을 요셉의원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착한이웃’을 발행하기로 한 것은 2001년 여름, 요셉의원 직원과 봉사자들이 야유회 겸 성지순례로 관악구 삼성산 성지에 갔을 때라고 한다. 그 자리에서 정기간행물 하나 만들어서 병원 도와주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 후 앞장서는 사람이 없어 출판사를 하는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쪽방촌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 타계 후 요셉의원

    치과진료실. 서 있는 봉사자는 실습 나온 학생이다.

    이 전 대사는 처음 10명의 후원자에게 1인당 1000만원 기부를 약속받았다. 실제 받아보니 1인당 100만원이었다. 자신의 돈 100만원을 합쳐 1100만원으로 시작한 책이다. ‘가난한 병원을 돕는 가난한 잡지’를 표방했다. 필자는 저명인들이 수두룩하다.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시인 강은교·안도현·황동규·마종기, 소설가 공지영·이청준·은희경·최인호,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등 이름만 대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다. 원고료는 일절 없고, 대신 잡지 한 권 보내주는 것으로 끝냈다. 그래도 원고청탁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잡지를 서점에 뿌리기도 했으나, 관리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곧 방침을 바꿨다. 대신 성당을 찾아다니며 정기구독자를 모았다. 그러나 교회기관에서 발행하는 잡지만도 10여 개 이상인 현실에서 신앙서적도 아닌 ‘착한이웃’이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고 한다. 만 5년에서 한 달 모자란 통권 59호로 문을 닫은 것에 대해 이 전 대사는 “돌아가신 선우 원장이 더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잡지 판매로 인한 후원금 액수보다, 이 책을 보고 사람들이 요셉의원 후원회에 가입하는 등 홍보효과가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그는 요셉의원이 밑천 없이 20년을 끌어온 것도 기적이듯, ‘착한이웃’이 월 평균 250만원씩 보태준 것도 작은 기적이라고 했다.

    수도자처럼 살다간 사람

    선우 원장은 수도자가 아니지만, 수도자처럼 살았다고 한다. 예수회 작은형제회 제3회원으로, 수도회 재속회원이다. 이 단체 회원은 결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다만 수도자처럼, 수도자와 같은 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입하는 단체다. 서원(誓願)만 없을 뿐 사실상 수도자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선우 원장은 결혼하지 않았다. 후원자를 열심히 모았지만, 매스컴에 얼굴 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상 주겠다는 것도 대부분 거부했다. 알릴 일이 아니라는 신념이었다. 2003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은 그가 잠시 미국에 가 있는 사이, 지인들이 그를 강력 추천해 ‘어쩔 수 없이’ 받게 된 것이다.

    선우 원장을 닮아서일까, 봉사자들도 언론과 얘기하기를 내켜하지 않는다. 홍익대 교직원으로 있다 정년퇴직하고 9년째 상근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변수만(70) 선생은 이름 적는 것조차 싫어했다. 서울 당산동에서 치과를 개업하고 있는 김평일 원장은 지난해 열린 20년 개원 기념식에서 ‘20년 봉사자’상을 받은 베테랑인데도, 자신은 ‘쫄병’이라서 아는 게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선우 원장 타계 후의 요셉의원 운영에 대해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다. 60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상당수 후원자가 사실은 그의 얼굴 보고 따라왔는데, 그 역할을 누가 대신할 것인가. 누가 선우 원장이 해왔던 병원 운영자(organizer)를 맡아 총대를 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다. 그의 반이라도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적지 않다.

    최영아 원장은 이에 대해 리더가 없어도 잘 굴러가는 구조가 건강한 구조라며, 선우 원장이 2년 넘게 병원을 잘 돌보지 못했어도 문제가 없었던 걸로 봐서는 앞으로도 잘될 것으로 기대했다.

    요셉의원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언제나 부족했지만, 언제나 채워져 있었다.”

    선우 원장 타계 후에도 봉사자들이 변함없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요셉의원 후원문의 : 02-2636-2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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