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돈 없는 사람의 자제를 공부시켜 무엇 하느냐?”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8-06-09 17: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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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년 12월 총독부는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철폐하고 ‘계발교육’을 실시하겠다며 ‘획기적인’ 입시 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력’만으로 평가하던 것에서 ‘신체검정’과 ‘구두시험’ ‘출신학교장 소견표’까지 더해져 4가지 전형 요소로 다양화했을 뿐이었다. 결국 ‘계발교육’ 실시로 학생들은 학과공부 외에도 구두시험을 대비한 ‘군국주의 이념 학습’과 신체검정에 대비한 ‘체력단련’ 부담까지 떠안아야 했다. 1930년대판 죽음의 트라이앵글에 갇힌 것이다. 죽음의 트라이앵글은 2000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30년대 학생들도 학과 시험은 물론 구두시험과 신체검증까지 대비해야 했다.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1925년 3월12일, 교복 차림의 청년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야산으로 올라갔다. 청년은 청년회학관(靑年會學館) 모표가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낡고 커다란 책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 질척질척한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랐다. 개나리 꽃봉오리가 듬성듬성 맺혔지만, 밤기운은 아직 섬뜩하게 추웠다. 청년은 산등성이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지가 무성한 아름드리 소나무에 기대 앉아 드문드문 불빛이 비치는 아랫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청년은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가방을 뒤져 물병을 꺼냈다. 병마개를 열고 꼭지를 입술로 가져갔지만, 그대로 머뭇거리다 도로 내려놓았다. 청년이 심호흡을 크게 들이쉬어 숨을 고른 후 다시 물병을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병에 든 액체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지 못하고 주저했다. 청년이 물병을 집어던지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했다.

    “병신, 그것도 못해! 도대체 넌 할 줄 아는 게 뭐야!”

    청년이 한참을 흐느껴 울다가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구두끈을 풀어 나뭇가지에 매달고 목을 맸다. 청년이 가느다란 구두끈에 매달려 신음했다. 숨이 막혔고 얼굴에 핏대가 섰다.

    툭. 꽈당.



    구두끈이 청년의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끊어졌다. 차가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청년은 혁대를 풀어 나뭇가지에 매달고 다시 목을 맸다. 혁대에 목이 졸려 숨통이 끊어진 청년의 몸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밤새 싸늘하게 식어갔다.

    청년의 시체는 이튿날 오전 부근을 지나가던 수리조합 사무원에 의해 발견됐다. 소사주재소 경관과 부검의가 현장으로 출동했을 때, 시체 주위에는 양잿물이 담긴 물통, 끊어진 구두끈, 책가방 등이 흩어져 있었다. 사망시간은 오전 1시로 추정됐다. 가방 안에는 일기장과 유서가 들어 있었다. 일기장에는 진로와 연애에 관한 고민이 씌어 있었고,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호라! 나는 생양가(生養家) 부모님께 길러진 지 19년. 부모님의 은혜를 만 분의 일도 못 갚고 죽으니 불효가 막심하다. 여러 가지 말을 쓰고자 하나 눈물이 앞을 가려서 못 쓰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 가치도 없이 죽는 것이 무엇보다도 분하고 억울하다.” (‘시험에 낙제하고 청년 학생 자살’, ‘조선일보’ 1925년 3월15일자)


    교복 주머니에는 구겨진 경기도 사범학교 수험표가 들어 있었다. 수험표에는 466호라는 번호만 적혀 있을 뿐 수험생의 이름과 주소는 씌어 있지 않았다. 경찰은 시체를 계남면장에게 인계해 가매장하고, 경기도 사범학교에 신원 확인을 요청했다. 경기도 사범학교 입시 담당자는 ‘466호 수험생은 서울 옥천동에 사는 19세 청년 이인복이며, 이번 입시에 불합격했다’고 확인했다. 살인적 입시경쟁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을 또 한 명 잡은 것이었다.

    입시 비관 자살자 속출

    입시를 비관해 자살한 청년은 이인복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2년 앞서 서울 체부동에 사는 18세 청년 박경복이 양잿물을 마셨다. 박경복은 1922년 3월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연속 고등보통학교(중등학교, 이하 고보) 입학시험에 떨어진 ‘고보 삼수생’이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맛본 박경복은 아내에게 수시로 말하곤 했다.

    “나는 재주가 없어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모양이오. 부모님 뵈올 낯이 없소. 차라리 죽어버리겠소.” (‘낙제로 자살’, ‘조선일보’ 1923년 10월18일자)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입시 실패를 비관해 철도에 투신자살한 이종희 사건을 보도한 1928년 3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

    입학시험이 5개월 앞으로 다가온 1923년 10월14일, 박경복은 양잿물을 들이켜고 이틀 동안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자살 충동은 남학생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1925년 4월11일 밤 8시, 서울 가회동에 사는 19세 여학생 정국만이 한강 인도교로 나가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그해 3월 이화학당 입학시험에 떨어진 정국만은 절망과 수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자살을 결심했다. 하지만 한강으로 뛰어내리기 직전, 순찰 중이던 인도교파출소 경관에게 발견돼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입시경쟁은 지방이라고 덜하지 않았다. 1928년 3월, 평안북도 강계군에 사는 21세 청년 유찬수는 춘천고보 입학시험에 응시하려고 불원천리 춘천까지 달려왔다. 그해 춘천고보 지원자 숫자는 지난해보다 두 배나 늘었다. 유찬수는 허름한 여관방에서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떨며 코앞에 다가온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입학시험이 치러진 3월13일, 유찬수는 시험장에 나갔다가 연령 초과라는 이유로 시험을 치러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유찬수는 여관방에 틀어박혀 세상을 비관하다가 끝내 독약을 들이켰다. 여관 주인이 신음하는 유찬수를 발견하고 즉시 강원도 도립병원으로 호송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독약에 목구멍이 녹아내려 평생 말 못하는 불구자로 살았다.

    아버지들도 자살 대열에

    같은 달 20일, 전라북도 익산군에 사는 18세 청년 이종희가 호남선 강경역에서 2km 떨어진 철로에서 질주하는 열차에 뛰어들어 즉사했다. 이종희는 지난해 전주농업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서울로 올라가 비인가학교인 중동학교에 다니면서 재수 준비를 했다. 그의 실력으로 전라도에서 손꼽히는 명문학교인 전주농업학교 입학시험에 통과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이번에는 기필코 시험에 통과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3월20일, 이종희는 전주농업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려고 부모에게 여비 10원을 얻어 전주로 출발했다. 전주행 열차를 타려고 강경까지 왔지만 이번에도 역시 합격할 자신이 없어 자기의 재주가 미치지 못함을 극도로 비관한 끝에 세상과 이별하기로 작정했다. 가지고 온 돈 10원 중에 남은 돈 7원은 인편으로 자기 집으로 보내고 달려드는 열차에 뛰어들어 황천길을 밟았다. 시체를 찾으러 온 유족들이 비통해 하는 모습은 차마 사람으로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시험지옥의 또 한 희생’, ‘동아일보’ 1928년 3월25일자)


    1929년 4월13일에는 경상북도 의성군에 사는 18세 청년 오항수가 서울 봉래정 하숙집에서 양잿물을 마셨다. 오항수는 지난해 봄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낙제의 고배를 들었다. 그대로 서울에 머물면서 고보 재수 준비를 해서 올봄 입학시험을 치렀으나 또다시 떨어졌다. 하숙집 주인이 양잿물을 마시고 신음하는 오항수를 급히 고려의원으로 호송해 입원 치료했으나 워낙 많은 양을 마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1931년 쥐약을 먹고 자살한 16세 소년 김재기, 1933년 경부선 제204호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양산보통학교 5학년생 이창석, 1935년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한 19세 청년 윤학병, 1936년 수백척 벼랑에서 투신자살한 17세 청년 김홍배, 1938년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한 16세 청년 이해정, 1939년 역시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한 14세 소년 우석규, 1940년 다량의 칼모틴을 마시고 자살한 18세 청년 정정모 등. 해마다 입시철이면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했다.

    어린 학생들만 입시지옥에 희생된 것은 아니었다. 1936년 광주에서는 아들이 고보 입학시험에 낙제한 것을 비관해 아버지가 방죽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광산군 서방면 오치리에 사는 정해군(48세)은 지난 19일 오후 그 동리 방죽에서 뛰어내려 익사했다. 정해군의 사랑하는 아들 정경모는 올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100명 모집하는 데 542명이 응시한 입학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수백 석 추수하는 부호 정해군은 아들의 낙제를 극도로 비관한 끝에 방죽에서 투신자살했다. (‘애자의 낙제를 비관 투신자살한 부친’, ‘동아일보’ 1936년 3월23일자)


    1939년 서울에서는 딸이 여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을 비관한 아버지가 목을 매 자살했다. 영락정 중앙시장에 있는 생선가게 하마다상점 점원 신덕길은 불혹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고용살이를 하면서 넉넉지 않은 보수로 아내와 4남매를 부양했다. 자녀를 잘 교육시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는 것이 신덕길의 유일한 꿈이었다. 하지만 열다섯 살 난 큰딸 신정조가 경성여자상업학교 입학시험에서 지난해에 이어 연거푸 낙제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졌다. 길에서 교복 입은 학생만 마주쳐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3월23일, 신덕길은 용산중학교 기숙사에 생선 배달을 나갔다가 교정에서 즐겁게 뛰노는 학생들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그길로 기숙사 뒷산에 올라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개 다리가 몇 개냐?”

    “우리 집에는 올봄 만 7세가 된 아이가 있습니다. 만 6세면 보통학교에 입학할 적령기라, 작년(1933년) 수송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작년에 그만 낙제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린 것이 낙제했다고 낙심하며 몹시 부끄러워했습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원래 우리 애는 7살이라도 다소 어린 맛이 있고, 신체발육이 늦은데다가 체질이 허약합니다. 집의 할머님께서 늘 귀여워하셔서 그만 응석받이가 되었습니다. 머리도 그다지 총명한 편은 못됩니다. 그래서인지 작년 입학시험에 불합격되었습니다. 초등과정의 보통학교를 입학하는 데도 시험을 보게 한다는 것부터 우스운 일이지만, 그 시험에 떨어진 다음, 6살짜리 코흘리개가 언짢아하는 것도 부모 된 마음에 적잖이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신경환, ‘입학준비의 고심담’, ‘중앙’ 1934년 4월호)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입시 비관 자살은 학생뿐이 아니었다. 딸 입학 실패를 비관해 아버지가 목매 자살한 일도 있었다. 신덕길이 딸 입학 실패를 비관해 목매 자살했다는 동아일보 기사(1939년 3월 25일자).

    일곱 살배기 보통학교 재수생을 둔 학부형 신경환은 이태 동안의 마음고생을 생각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수업을 받아보지 않은 철부지 어린애한테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는 교육 당국의 처사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아이가 합격하기만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정보도 수집하고 시험공부도 시켰다. 주위 사람에게 초등학교 입학시험에 무슨 문제가 나오나 알아보았더니, ‘국문’(일본어)으로 이름을 써보라거나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를 써보라는 문제가 나온다 했다. 신경환은 아이의 형과 누이를 동원해서 부지런히 가르치고 닦달해서 ‘국문’과 ‘조선어’를 깨치게 했다.

    두 명 중 한 명은 떨어지는 시험이라 마음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 준비했으면 아이가 너끈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고 집에 온 아이는 시험에 아빠가 가르쳐 준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며 울먹였다. 간단한 ‘국문’과 ‘조선어’ 읽기 능력을 평가하던 예년과 달리, 그해 입학시험에는 취학아동의 상식과 인성을 묻는 문제가 출제된 것이었다.

    “개 다리가 몇 개냐?”

    “자동차가 어떻게 다니느냐?”

    “밤 다섯 개가 있는데 세 개를 먹었다. 그러면 몇 개가 남니?”

    (여러 가지 색의 색지를 내놓고) “어느 것이 붉은색이냐?” “어느 것이 노랑이냐?”

    “다른 사람이 네 발등을 밟아 피가 나면 어떻게 할 테냐?”

    덮어놓고 ‘가나다라’니 ‘아이우에오’만 익힌 아이는 면접교사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잘못된 입시전략 탓이었다. 신경환은 작년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올해에는 반드시 아이를 입학시키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밝혔다.

    “작년에는 입학하기 전부터 글을 가르친다든지, 선생님 앞에 나아가 인사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융통성 없는 방법을 써서 낙제의 쓴잔을 들이켰습니다. 금년에는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서 시야도 넓혀주고, 명석한 태도도 가지도록 지도해 눈물겨운 입학난을 뚫어보겠습니다.” (신경환, ‘입학준비의 고심담’, ‘중앙’ 1934년 4월호)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입학 문제 특집’, ‘중앙’ 1934년 4월호

    입학희망자가 입학정원을 초과한 1920년부터 광복 직전까지, 조선에서는 보통학교에 들어가려 해도 입시전략이 필요했다. 세계유일 전대미문의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조선의 명물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시험?

    “보통학교 취학아동에게 입학시험을 보게 했다고요? 글쎄 나는 금시초문이올시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아마도 입학지원자는 많고 학교 교실은 좁으니까 임시변통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 무슨 특별한 규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이오.”

    1920년 4월, 사이토 레이조(齊藤禮三) 경성부윤(京城府尹·서울시장)은 초등학교 취학아동에게 입학시험을 치르게 한 이유를 따지는 기자에게 몹시 당혹해하며 해명했다. 경성 부민 모두가 다 아는 일을 부정(府政)을 책임진 부윤이 모른다고 발뺌했다. 기자가 날을 세워 되물었다.

    “입학지원자 중 반수 이상이 입학허가를 받지 못했소. 장차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오? 방침은 세워두었소, 아니 세웠소?”

    사이토 부윤이 난처한 듯 연신 머리를 어루만지며 얼버무렸다.

    “글쎄 무슨 일이고 돈이 문제가 아니오. 지금 경성부내에는 13개소나 되는 보통학교가 있소. 모두 지은 지 10년 이상 되어서 시설이 몹시 낡고 협소하오. 이것만 개축하려 해도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오. 부(府)의 예산으로는 어림도 없고, 도청의 지방비로도 감당할 수가 없소. 국고 보조를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니, 아무래도 어느 곳에서든지 빚을 내어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우선 빚을 내어 쓴다면 납세자인 부민이 분발하여 갚아야만 할 것이오. 취학아동에게 시험을 보게 한 것도 교실이 부족하여 별 수 없이 그리된 것이오. 부족한 교실을 늘리려면 아무래도 여러분이 분발하여 당국자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보통학교 입학시험 문제’, ‘동아일보’ 1920년 4월11일)


    수용할 교실이 없어 수천명의 아동이 학교에 못 가는 한심한 일이 벌어졌는데, 부윤은 한가하게 예산타령이었다. 세금 안 낸 부민 탓이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며 오리발까지 내밀었다.

    “당국이 성의만 보이면 조선 사람도 자기네 자식을 가르치는 일인데 외면하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현재 있는 학교의 개축도 이와 같이 막막하면, 앞으로 몇 배 이상이 늘 입학 아동을 장차 어떻게 수용할 터이오. 추가로 보통학교를 신축할 계획은 있소?”

    정곡을 찌르는 기자의 질문에 사이토 부윤은 침묵을 지키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솔직히 아직은 보통학교를 더 설치할 능력이 없소.”

    사이토 부윤에게는 호화판으로 관공서 짓고, 헌병과 고등계 형사 월급 줄 돈은 있어도 학교 짓는 데 쓸 돈은 없었다.

    입시지옥의 탄생

    19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각급 학교는 수업료를 면제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교과서와 학용품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학생 유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191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경향 각지의 학교에 입학지원자가 쇄도해 지원자를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 구실을 하려면 모름지기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인식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까닭이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밥을 굶을지언정 어떻게든 자식 공부는 시키려 했다.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평균 2: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보통학교 신입생.

    세계 유일, 전대미문의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정원을 초과한 인원을 탈락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도입된 제도였다. 1910년대 후반 교육 환경이 열악한 지방에서 시작된 초등학교 입학시험은 1920년부터는 교육도시를 자부하던 서울에서도 실시됐다. 대학이나 중등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르는 나라는 간혹 있었지만, 초등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른 곳은 조선이 유일했다. 다른 나라의 입학시험이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데 목적이 있었음에 반해 조선의 입학시험은 오로지 정원을 초과한 지원자를 걸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입학난을 완화시키려는 교육 당국의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건이 되는대로 학교를 지은 결과, 1919년 517개소에 불과하던 보통학교는 1935년 2358개소로 늘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4~5년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입학지원자를 모두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연도와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초등학교 입시 경쟁률은 대체로 2대 1 이상이었다. 심한 경우 6대 1을 넘는 학교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난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자 “서울 시내에서 보통학교 들어가기가 다른 나라 대학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936년 보통학교 입학시험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그해 서울 시내 25개 공립보통학교 입학 정원이 4800명이었는데, 1만21명의 아동이 지원했다. 평균경쟁률은 2대 1이었지만, 지원자가 많이 몰린 학교는 3대 1을 넘었다. ‘멘탈 테스트(mental test)’라는 이름의 입학시험은 치졸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이가 너무 많다든지, 너무 적다든지 하는 갖은 이유를 갖다 붙여 정원을 초과한 인원을 탈락시켰다.

    다행히 공립학교 입학에 실패한 5221명의 아동에게는 사립학교에 지원할 기회가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립학교의 수용인원도 수요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1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공립학교, 사립학교 연이어 낙제한 4000여 명은 험난한 재수의 길로 내몰렸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입시경쟁이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무작정 1년을 기다린다고 입학이 허가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 기회는 재수, 삼수, 사수 식으로 무한정 주어지지 않았다.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10세 이상 아동에게는 ‘학령(學齡) 초과’를 이유로 시험 치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입학시험에 두세 번만 떨어지면, 영원히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만화가 최영수는 몇 분 동안의 ‘멘탈 테스트’로 아동의 장래를 결정하는 터무니없는 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명태 알 테스트’인지 ‘멘탈 테스트’인지 천진난만한 유아를 앞에다 놓고 사십 넘은 선생들이 마주 앉아 질문하는 게 20세기 문명한 시대에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아동심리에 대해 얼마나 연구를 철저히 했다고 그 몇 분 동안에 묻는 말로 구만리 같은 인생의 앞날을 내다본단 말인가. 보통학교에 입학 못한 아이들은 모두 저능아란 말인가. (최영수, ‘학교는 눈물인가? 한숨일런가?’, ‘신동아’ 1936년 6월호)


    당국자들이 한가하게 예산 타령을 하는 사이, 수많은 철부지 아이의 가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있었다.

    코흘리개들의 ‘눈물시위’

    1922년 해주공립보통학교의 입학정원은 180여 명이었는데, 입학지원자는 600여 명에 달했다. 3명 중 2명을 탈락시키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에서 학교 당국은 예년과 같이 입학시험을 실시했다. 합격자 발표일인 3월25일, 학부형들은 7~8세 코흘리개 ‘수험생’의 손을 잡고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발표 몇 시간 전부터 게시판 앞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합격자 명단이 적힌 방이 붙자 희비가 엇갈렸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돌아가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태반은 얼굴을 붉히며 분노를 터뜨렸다. 어느 집 아이가 합격했고 어느 집 아이가 떨어졌는지 부형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낙제한 아이를 둔 부형들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운동장에 그대로 남아 삼삼오오 모여 대책을 강구했다. 잠시 후 학교 교무실에 성난 부형들이 들이닥쳤다. 부형들은 교장을 불러놓고 선발기준을 따져 물었다. 교장은 아동의 처지는 딱하나 시설이 부족하여 더 수용할 여력이 없다며 땅에 코를 박고 사죄했다.

    성난 부형들은 교문 밖을 나와서도 헤어지지 않고 청년회관에 모여 난상토의를 벌였다. 장시간에 걸친 숙의 끝에 만장일치로 진정서를 채택하고 군청에 제출했다.

    “400여 명의 불합격 아동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가.”

    “금년에 입학하지 못하면 학령 초과로 내년에 입학이 불가능한 아동은 전부 입학시키라.”

    “금번 신입생의 선발 방법과 채점 결과를 공개하라.”

    (‘낙선 부형의 진정’, ‘동아일보’ 1922년 3월31일자)


    하지만 낙제 아동을 둔 부형의 애끊는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입학시험을 둘러싼 진통은 해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해 3월29일, 광주공립보통학교에서는 예닐곱 살 먹은 아동 400여 명이 운동장을 점거하고 하염없이 우는 ‘눈물시위’를 벌였다.

    지난달 29일 하오 1시경 광주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는 나이 예닐곱 살가량 된 어린아이 400여 명의 울음소리가 낭자하여 일장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번 학기에 그 학교에 입학하려고 지원서를 제출했다가 학교의 수용력 부족으로 입학 허가를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였다. (‘교정의 곡성’, ‘동아일보’ 1922년 4월2일자)


    有錢入學, 無錢落第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1930년 제2고보 입학시험 문제 -국어(일본어)와 제2고등보통학교(경복고등학교의 전신) 교사.

    1924년 인천공립보통학교 입학시험은 3월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에 걸쳐 실시됐다. 가슴에 큼지막한 수험표를 붙인 6~7세 수험생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차례가 오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코흘리개 수험생들은 교사 앞에 한 명씩 불려나가 차례로 구술고사를 치렀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학교 수업을 들어보지 않은 아이에게 교사는 초등학교 3~4학년생도 답하기 곤란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부모가 선행학습을 시킨 아동은 그럭저럭 대답했지만, 그렇지 않은 아동은 눈만 껌벅거렸다. 교사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아동은 대부분 가난한 집 자녀였다.

    가난한 집 자녀를 걸러내기 위한 교사의 노력은 집요했다. 학력 검정을 마친 교사는 가정 형편을 물었다.

    “부모가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하였느냐?”

    “가산은 넉넉하냐?”

    거듭 확인한 덕분에 학교 당국은 ‘학교에 꼭 필요한 학생’을 얻을 수 있었다. 합격자 발표 결과 예상대로 재산도 넉넉하고 학교에 기부도 많이 한 집 자녀는 무난히 합격했고, 가난한 집 자녀는 낙제의 고배를 들었다.

    터무니없는 시험 문제와 불공정한 선발 기준을 두고 항의가 빗발쳤다. 비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관할 인천부 내무과장은 용감히 ‘소신’을 밝혀 또 한 번 구설에 올랐다.

    “돈 없는 사람의 자제를 공부시켜 무엇 하느냐?”

    ‘학교에 꼭 필요한 학생’을 얻기 위해 학교 당국은 문제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100원권 지폐 문제’였다. 1935년 서울 시내 한 공립보통학교는 입학시험에서 100원권 지폐를 꺼내놓고 “이것은 얼마짜리 지폐냐?”고 물었다. 당시 보통학교 교사 월급이 50원 내외였다. 교사조차 자주 구경하기 힘든 100원권 지폐를 중산층 이하의 가정에서 자라난 6~7세 아동이 보았을 리 만무했다. 100원권 지폐를 쌓아놓고 사는 부잣집 자녀는 땅 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운 문제였지만, 가난한 집 자녀는 ‘신기한 물건’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하고 많은 시험 문제 중에 하필 돈으로 시험을 보이느냐?”

    “100원권 지폐를 늘 만지는 집에서 자라난 아이가 아니면 알아맞힐 수 없는 문제다. 돈 모르는 아이는 그대로 돌아가란 말인가?”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여학교의 영어 수업 광경.

    비난이 쏟아졌지만, 100원권 지폐 문제는 확실한 ‘변별력’을 인정받아 다음해에도 출제됐다.

    가난한 집 자녀는 입학시험에 통과했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1935년 부산의 한 보통학교에선 신입생에게 교사 한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50원을 ‘비공식 입학금’으로 걷었다. 당시 보통학교는 수업료는 받을 수 있었지만, 입학금은 받을 수 없었다. 학교 당국은 ‘비공식 입학금’에 ‘학부형회비’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갖다 붙이고, 이를 내지 않은 아동에게는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입학시험에 통과한 가난한 집 자녀는 ‘비공식 입학금’ 장벽에 막혀 배움의 꿈을 접어야 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학교 당국은 교실 증설을 위해 학부형회에서 자발적으로 징수한 것이지 강제로 징수하진 않았다고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했어도 10~20%는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매달 70~80전씩 징수하는 수업료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서울 시내 균일제 택시비 정도에 불과한 금액이었지만, 도시빈민이나 소작민은 그 정도 금액도 마련하지 못해 체납하기 일쑤였다. 수업료를 체납하는 비율은 평소 20% 정도였고, 불황 시에는 60%에 달했다.

    교장은 교사에게 체납 수업료 징수를 독려했고, 실적이 부진한 교사에게는 가차 없이 징계처분을 내렸다. 1927년 군산공립보통학교는 수업료 징수 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교사 20여 명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 극단적인 처분까지 내렸다. 교사는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구타, 욕설, 가정방문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수업료를 징수했다. 수업료를 장기간 체납한 아동에게는 정학, 퇴학 조치가 취해졌다. 수업료를 낼 때까지 성적표를 발급하지 않거나 졸업장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세무서가 직접 나서 학부형의 재산을 압류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극을 사전에 예방하려면 신입생을 ‘신중히’ 가려 뽑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 잡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입시경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입시의 꽃’은 단연 중등학교 입시였다. 1937년 2만8172명의 중등학교 입학지원자 중 합격자는 겨우 4489명이었다. 전국 평균 6대 1을 넘었고, 제일고보 10대 1, 양정고보 11대 1, 배제고보 13대 1, 보성고보 12대 1 등 서울시내 학교는 대부분 10대 1을 상회했다. 겨우 13~14세 된 학생들이 적어도 4~5대 1, 심하면 14~15대 1의 살인적 입시경쟁에 내몰렸다. 이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신학기가 시작되는 4월이면 입시 후유증으로 수십명의 청소년이 자살하거나 비행을 저질렀다.

    1938년, 중등학교 입시경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16세 소년 강하일이었다. 그는 지난해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하고, 집에서 절치부심 입학시험을 준비한 ‘고보 재수생’이었다. 그의 부모는 죽첨정에서 식료품점을 하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전국 평균 8대 1을 상회한 1938년 중등학교 입학시험의 중압감은 16세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시험을 하루 앞둔 3월11일, 강하일은 초조와 흥분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후 3시경 미친 듯 집을 뛰쳐나갔다. 강하일은 가출 5시간 만에 금화산 근방에서 실성한 상태로 발견됐다. 이튿날 강하일은 2년 동안 준비한 시험을 치르는 대신,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입시를 앞둔 16세 재수생이 실성한 사건은 교육계에 크나큰 충격을 안겼다.

    “토요일 아침 신문 사회면에서 중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너무나 초조하고 겁이 나서 그만 실성해버린 어린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건강이 나쁜 것도 아니고 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실성까지 한 소년의 심정이 얼마나 가련합니까. 그것은 그 어린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조선 어린이 전체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갑갑한 집안에 틀어박혀 자나 깨나 책에 매달리고, 학교에 들어갈 것만 꿈꾸다가 그 모양이 되었으니 어찌 가엽지 않습니까. 모든 어린이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좌우간 이 몹쓸 입학시험 때문에 얼마나 정신과 몸을 허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 사회에 학교가 적다는 것도 한 가지 책임이겠지만, 부모 되시는 분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자식을 학교에 보내려고 애를 씁니까. 자식의 장래를 위해 그러려는 것이 틀림없겠지요. 그러나 자식의 장래를 정말 위하고 사랑할 줄 아는 부모라면, 그처럼 장님의 사랑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의 몸이 어떻게 되는지, 정신적 고통과 부담이 어떠한지도 짐작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집안에서 공부만 지독히 시키고, 가뜩이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자식에게 입학시험에 떨어지면 큰일이라든지, 앞길이 막힌다는 등 무서운 이야기만 들려준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험 날이 닥쳐오니까 긴장과 초조함이 도를 넘어 마침내 그러한 불상사가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들은 각성하자’, ‘조선일보’ 1938년 3월15일자)


    낙제생들의 반란

    부모의 지나친 자식 사랑은 시험 현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입학시험을 치르는 학교 운동장에는 수험생을 따라온 학부형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수험생이 한 시간씩 시험을 치고 나오면, 학부형들은 수험생을 에워싸고 ‘시험은 잘 봤느냐?’ ‘실수는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어린 수험생들은 시험 자체보다 학부형들의 도를 넘은 관심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

    1937년 5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터우다오거우(頭道溝)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14세 소년 신정남은 청진상업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과거 급제하기보다 어렵고, 고등관 벼슬하기보다 어렵다는 중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보통학교 상급반부터 밤을 새워 열심히 공부했지만, 시험에는 아는 문제보다 모르는 문제가 많았다. 1교시 국어(일어) 시험도 망쳤고, 2교시 산술 시험도 망쳤다. 마지막 3교시 작문 시험에서 월등하게 높은 점수를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합격할 수 없었다. 감독관이 문제지와 답지를 나눠주자 신정남은 몰래 필통에서 연필 깎는 칼을 꺼내 왼편 손등을 갈랐다. 흐르는 피를 펜촉에 찍어 답지에 혈서를 썼다.

    “낙제한다면 자살하고 말겠다.”

    사건 발생 직후 학교 당국자들은 사태의 변태적인 성격에 크게 놀라 일체 함구하고 극비에 부쳤다. 당국자들은 시험의 결과를 기다려 대책을 강구하기로 뜻을 모았는데, 지난 5월9일 신정남이 불합격한 것으로 최종 판명되자 갑자기 동분서주했다. 혈서의 내용대로 신정남이 비관한 끝에 탈선행동을 할까 우려해 교장이 벌써 몇 차례 찾아가 위문했고, 경찰은 그의 신변을 힘을 다해 경계하고 있다. (‘혈염의 시험지’, ‘조선일보’ 1937년 5월12일자)


    1938년 4월9일, 15세 소년 이해성이 극약을 마셨다. 이해성은 광희정에서 유리공장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어려움 없이 자라났다. 다른 나라 대학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서울 시내 공립 초등학교 어의동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조선 최고의 명문 제일고보를 목표로 공부해왔지만, 만약을 대비해 보성고보와 휘문고보에도 원서를 냈다. 제일고보는 몰라도 보성이나 휘문에는 합격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세 학교 모두 낙방이었다. 몇 년 동안의 공부가 수포로 돌아가자 이해성은 심각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삶을 포기했다. 음독 후 그는 즉시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극약을 원체 많이 마신 까닭에 입원한 지 사흘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같은 달 12일 밤, 유흥가를 순찰하던 본정경찰서 유 형사가 입정정 선술집에서 작부 강옥화와 질탕히 놀고 있는 소년 한 명을 발견했다. 경찰서로 데려가 조사해보았더니 소년은 금년 봄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제일고보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상경한 16세 소년 정소춘이었다. 정소춘은 화동정 누나의 집에서 묵으면서 제일고보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중국에서 서울까지 왔던 정소춘은 낙방 후 차마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구 한 명 없는 낯선 서울 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소일했다.

    정소춘은 답답함과 무료함을 참다못해 12일 오후, 누나의 금비녀 두 개와 금반지 한 개를 훔쳐 나와 전당을 잡혔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선술집에서 작부를 끼고 질탕하게 놀다가 유 형사에게 체포된 것이다. 당시 미성년자가 술 마시다가 발각되면, 부형을 불러 주의를 주고 훈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정소춘이 체포되기 며칠 전인 4월1일부로 ‘미성년자 끽연 및 음주 금지법’이 시행됐다. 정소춘은 중국에서 멀리 서울까지 와 낙제의 고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미성년자 끽연 및 음주 금지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은 최초의 청소년이 됐다.

    같은 달 28일 오후 2시30분경, 평양경찰서 앞을 수상한 소년이 배회하고 있었다. 경찰이 검문을 하니 몸에서 장난감 권총과 단도가 나왔다. 평양부 창전리에 사는 17세 청년 이홍원은 그해 3월 평양고보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희망 없는 조선을 떠나 만주에서 새 출발할 결심을 했다. 비용 마련을 위해 장난감 권총과 단도를 들고 한성은행 평양지점을 털려다 경찰에 덜미를 잡힌 것이었다.

    죽음의 트라이앵글

    입학난이 사회 문제로 비화하자 총독부도 더 이상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34년 12월, 총독부는 입학난 해소를 위한 ‘획기적’ 조치를 단행했다. ‘입시준비교육철폐’라는 이름의 조치에서 총독부는 초등학교에서 중등학교 입시교육을 금지하고, 중등학교 입시과목을 국어와 산술 두 과목으로 제한하며, 초등학교 교장이 작성한 소견표를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하게 했다. 그러나 경쟁률이 10대 1이 넘는 시험을 앞두고 학교에서 입시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수험생들이 입시준비를 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시험과목을 축소한다고 해서 경쟁이 줄어들 리도 없었다. 결국 총독부의 ‘입시준비교육철폐’ 조치는 세인들의 비웃음만 살 뿐 전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자존심을 구긴 총독부는 2년간의 연구 끝에 1936년 12월 또 하나의 ‘획기적인’ 입시 안을 내놓았다. 암기를 중심으로 한 주입식 교육을 철폐하고 각자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계발교육(啓發敎育)’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이 입시 안은 과거 ‘학력’ 한 가지만 가지고 평가하던 것을 ‘신체검정’ ‘학과시험’ ‘구두시험’ ‘출신학교장 소견표’ 4가지로 전형 요소를 다양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계발교육’이 실시된 이후 학생들은 학과공부 외에 구두시험을 대비한 ‘군국주의 이념 학습’과 신체검정에 대비한 ‘체력단련’ 부담까지 떠안아야 했다. 1930년대판 죽음의 트라이앵글이었다.

    ‘유전입학 무전낙제’…입시지옥의 탄생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총독부는 학과시험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중등학교의 관행을 개혁하기 위해 입학시험에서 응용문제의 출제를 금지했다. 경쟁률이 10대 1이 넘는 입학시험에 단편적 지식을 묻는 문제만 출제되다보니 만점자가 속출했다. 1938년 휘문고보 입학시험에서는 만점자가 입학 정원보다 많아 ‘만점 중 만점’을 가려야 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1939년 10월, 총독부는 국어(일본어) 한 과목을 제외한 학과시험을 금지했다. 입시교육과 학과시험을 폐지한 결과 입시전쟁에서는 일본어에 능통하고 군국주의 이념에 충실하면서도 신체 건강한 학생들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때도 입시경쟁률은 변함없이 10대 1을 넘었고, 입시에 실패한 청소년 중 매년 수십명이 자살하거나 범죄자로 전락했다.

    살인적 입시경쟁의 근본 원인은 조선에 학교가 턱없이 부족한 데 있었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입시 제도를 아무리 뜯어고쳐봐야 학생들의 부담만 가중될 뿐이었다. 총독부도 그러한 사실을 몰라서 입시 제도만 만지작거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 학생들이 더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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