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25일, 비극은 시작됐다. 너나없이 봇짐 하나 달랑 이고 남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누구는 다리 하나를, 누구는 목숨을 잃었다.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시민도 수두룩했다. 이들은 목숨을 내어놓고 위태로운 시간을 조마조마하게 견뎌야 했다. 사학자 이현희 교수도 그 가운데 하나. 당시 13세이던 그는 인민군 치하의 3개월을 소년의 감성으로 꼼꼼히 기록했다. 포탄이 터지고 불길이 치솟을 때 2층 다다미방에서 숨죽이거나 옆집 방공호에 납작 엎드린 채 적어내려 갔다. 이를 정리, 요약해 공개한다.
이웃 사는 북성초등학교 동창생 김진희가 새벽에 달려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는 “북의 김일성이 인민군을 앞세우고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보았다. 북아현동 일대에 트럭이 붕붕대며 뿌연 먼지 속을 내달렸다. 38선 근처에서 종종 벌어지던 인민군과의 크고 작은 충돌일 것이라고 믿었으나 이번에는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다. 가족과 동네사람들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
서대문 로터리로 달려갔다. 개성 동두천 파주 등지에서 인민군을 물리쳤다는 호외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이웃의 초등학교 동창생 이강석이네를 찾아갔다. 그는 서울중학교 신입생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이기붕 서울시장을 통해 사정을 알아보려 했으나 집에 아무도 없어 발걸음을 되돌렸다. 라디오에서는 우리 국군이 38선에서 인민군을 북으로 몰아내고 있으니 염려 말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내 중심에는 군용차와 트럭이 바쁘게 움직이고 백차에서 “군인은 즉시 부대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이날 정부의 포고문은 ‘군경을 신뢰하고 시민은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고 동요치 말라’고 한다. 그렇게 됐으면 좋으련만….
▼ 6월 26일 월요일, 전쟁 중 수업
오늘자 조선일보는 ‘이북 북괴 불법 남침, 25일 아침 38선 전선에서’라는 기사를 냈다. 남침이 확인된 것이다. 나는 학교(양정중)로 가서 수업을 받았다. 이영규 선생의 공민과 최영보 선생의 국어시간까지는 마쳤다. 최 선생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라고 교직자다운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 간간이 총성과 포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도 도망가야 산다더라. 서울이 곧 김일성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다’라는 이런저런 불안한 뜬소문이 무성하다. 정확히 사태를 알려주는 이는 없다. 궁금증이 더해간다.
수업도 중단되어 모두 뿔뿔이 헤어져 집으로 가자는 말이 나왔다. 정세가 불안해 국군 지휘관들이 긴급회의에 들어가 남침 방지책을 논의한다고 한다. 옹진반도가 김일성 수중에 들어갔다고도 한다. 개성이 떨어졌고 의정부 동두천 파주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교사인 아버지는 라디오가 전하는 ‘유엔군이 우리를 도와준다’는 소식에 안심하는 눈치다. 트루먼 미 대통령도 한국을 지원하라고 명령했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다. 서울에 뿌려진 헌병사령관과 서울시경국장의 포고문의 ‘군경을 믿으라’는 말을 서울시민들은 다 믿는 것 같다.
텅텅 빈 이기붕 시장의 집
▼ 6월 27일 화요일, “서울 사수”
날렵한 소련제 야크기가 서울 일대에 마구잡이 폭격을 하고 있다. 귀가 찢어질 듯하다. 비를 맞으면서 옷이며 가재도구를 앞마당에 파묻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은 사수할 것이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한다. 믿어야지 않겠나 싶다. 의정부를 탈환하고 국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서울 시민은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능안(북아현동)의 이기붕 시장 아들 이강석이네를 다시 찾았으나 집은 텅텅 비었다. ‘아차’ 싶었다. 우리도 피란을 가야할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대통령이 서울을 지킨다고 했는데 왜 도망가느냐”고 태연하다.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는 정부를 수원으로 옮긴다고 발표해 정부의 발표가 들쭉날쭉하다. 저녁에는 수원 이동을 부인하고 서울을 지키기로 했다며 발표를 번복했다. 의정부와 동두천을 되찾았다고도 한다. 믿을 수가 없다.
우리 옆집의 전예용 서울시 부시장도 벌써 보따리 싸서 줄행랑을 쳤다. 조용한 것을 보니 틀림없이 피란을 간 것이다. 높은 분들은 시민을 버려두고 저만 살겠다고 다 도망쳤다. 서울을 사수한다는 말이 무색하다. 불안하다. 서민은,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 6월 28일 수요일, 서울 함락
새벽 3시경쯤, 자고 있는데 갑자기 파란불이 번쩍이며 요란한 폭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아침에 들으니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근심 어린 쑤군거림이 들린다. 남쪽으로 피란하던 행렬이 다리가 끊어져 물에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600여 명과 차량 50여 대가 강으로 떨어져 대부분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난리가 난 것 같다. 서대문에 있는 조흥은행에 갔으나 돈을 찾지 못했다. 오전 중에 서울 시내가 거의 다 함락됐다고 한다. 앉아서 날벼락 맞은 격이다.
서대문에 나가보았다. 로터리에는 군가를 부르며 트럭을 몰고 인공기를 휘둘러대는 인민군이 신바람 난 무당처럼 소리를 내질러대면서 시민들에게 동참하라고 악을 쓰고 있다. 어린 인민군의 얼굴에서는 평화로움마저 느껴진다. 시민들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멍하니 서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차에 올라탄 한성중학교 학생 30여 명이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치면서 동조했다. 담벼락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영용한 인민해방군 만세!’ 라는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아직 풀이 마르지도 않았다. 누구의 소행일까. 인민군 병사들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고 온몸에 풀잎, 참나무를 꺾어 위장한 채 시가지를 누빈다. 인민군 7개 사단과 탱크부대가 서울을 빼앗았다고 한다.
유엔 안보리가 북의 수중에 들어간 한국을 위해 무력사용을 여러 나라에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유엔이 우리나라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16개국 친구의 나라가 한국을 도우러 온다고 한다. 감사한다. 큰길가에 국군의 시체가 덩그러니 누워 있으나 누가 나서서 치울 생각도 않는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살벌하다. 이게 전쟁인가 싶다.
전예용 부시장 집은 인민군 정보원인 듯한 남녀 5~6명이 서성대며 주위를 살피고 뭔가 정리하는 것 같다. 그 집을 빼앗아 본부로 쓰는 듯하다. 호신용 권총만 찬 채 아래 위를 살핀다. 눈매가 매섭다. 우리집 뒷산으로부터 서대문형무소를 나온 죄수 10여 명이 떼지어 오고 있다. 서대문형무소가 폭파되면서 탈출해 뒷산을 넘어 북아현동으로 온 것 같다. 그들은 거칠게 주민들은 나오라고 소리 질렀다. “다 같이 김일성 장군 만세와 인민공화국 만세를 힘차게 부릅시다”라며 눈을 부릅뜨고 위협한다. 주민이 우물우물하고 망설이자 소리를 지르며 “이 간나새끼들 왜 안 따라 부르느냐. 지상낙원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왜 가만히 보고만 있나. 뭐가 불만인가!” 하면서 죽일 것 같은 몸짓으로 만세를 강요하고 인공기를 흔들어댄다.
주민들은 마지못해 가늘게 만세를 외치고 인공기를 흔들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았다. 자치대원이란 자들이 집집마다 문을 박차고 “쌀 있느냐, 얼마나 있는지 조사하겠다. 숨기다가는 언제 맞아 죽을지 모르니 정직하게 신고하길 바란다”라고 위협한다. 조사해 가더니 저녁에 와서 그 쌀을 다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개밥을 먹다
▼ 6월 30일 금요일, 의용군 지원 강요
학교로 나오라고 해서 학교에 나갔더니 완장 찬 상급생 10여 명이 강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200명 정도가 긴급히 모였다. 선배인 듯도 한 건장한 학생이 나서서 큰소리친다. 모두 인민의용군으로 자원입대해 이승만 파쇼 집단을 섬멸해버리자는 것이다. “와와” 하고 동조하는 무리도 있다. 나도 할 수 없이 지원서에 기입했다. 내일 약속한 장소로 꼭 오라는 당부를 받고 집에 왔다. 부모님에게 말하니 깜짝 놀란다. 왜 그런 서류에 이름을 적어 넣었느냐고 야단을 친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도 벽보에는 ‘역적괴수 이승만 체포 처형, 남조선군 전멸’이라는 섬뜩한 내용이 가득하다. 종로거리에 보니 전차에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 영웅이신 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화신백화점에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가 나란히 내걸렸다. 오른쪽에는 ‘조선인민의 경애하는 수령이시며 승리와 고무하시는 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문구가, 왼쪽에는 ‘소련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이며 해방의 구원이신 스탈린 대원수 만세!’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7월 1일 토요일, 의용군 수속 중 줄행랑치다
나는 순진하게도 의용군에 입대하겠다며 약속한 장소로 갔다. 종로 수송초등학교에는 10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줄을 서다가 꾀가 생겼다. 대기하고 있던 친구 권태목이도 나를 보자마자 귀에 대고 도망치자며 뒤로 빠졌다. 팔에 완장을 찬 키 작은 감시원에게 먹을 것을 사가지고 곧 돌아오겠다고 했더니 순순히 허락해 준다. 우리는 그길로 줄행랑을 쳐 북아현동 집으로 왔고, 의용군 징발에서 자유로워졌다. 어떻게 왔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감시가 소홀한 덕을 본 것이다. 어떻게든 청소년들을 전선으로 데리고 가서 총알받이로 써먹겠다는 행태였다.
▼ 7월 2일 일요일, 개먹이를 먹다
인민군은 3개월간의 서울 점령 후 북으로 도주하면서 민간인 집단 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우물에 사람들을 빠뜨려 죽인 경우도 많았다.
서대문 사거리에는 수원과 대전이 해방됐다는 벽보가 붙었다. ‘아침은 빛나라’라는 김일성의 애국가를 열심히 부르라고도 한다. 인민보는 8·15 이전에 남반부를 전부 해방시키겠다고 큰소리친다. 미 24사단이 대전에 도착해 반격전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있다.
보도연맹원 200명 학살
▼ 7월 8일 토요일, 걸어서 100리길
걸어서 파주군 교하면 문발리 고향에 도착했다. 약 100리 길이었다. 아침 일찍 신촌역으로 가서 경의선 철도를 따라 내려간 것이다. 작은 터널을 지나니 수색역이 나온다. 벌써 날이 무덥다. 중천에 해가 떠올랐다. 능곡역을 향해 걸었다. 군용차가 물건을 가득 싣고 대기 중인 듯했다. 순간 쌕쌕이가 날아오더니 대여섯 개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지나갔다. 나는 바로 내달렸으나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찻길 옆 웅덩이에 누워 있었다. 폭탄을 맞은 기찻간에서는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다. 나는 겨우 살았으나 옆에 보니 어른 셋이 피를 흘리고 있다. 자세히 보니 이미 죽었다. 섬뜩했다. 능곡역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가 싸주신 깡보리밥으로 때웠다.
한참 만에 일산역을 지나 덕이리를 통과해 삽다리에 오니 날이 어둑하다. 해가 길어도 워낙 먼 거리라 저녁때가 된 것이다. 문발리 36번지에 도착했을 때는 밤중이었다. 100리 길을 걸어서 왔으니 스스로 장하다고 여겨졌다. 13세 때의 일이다. 누가 이런 먼 거리를 걸어서 갈 엄두를 낼 것인가. 난리통이니까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 나는 내일 이 길을 따라 다시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 집에 있는 여덟 식구의 양식을 위해서다. 점심 후 200환을 주고 산 개구리참외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 7월 11일 화요일, 보도연맹원 학살
7월 초부터 열흘 사이에 청주형무소 등에 갇혀 있던 청원군 내 보도연맹원이 고은리 분터골 피반령 고개, 남성면 도장골 미원 충정고개, 미원면사무소 보은 아곡리 등 국도 인근에서 우리 군경에게 200여 명이나 떼죽음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이 아니길 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해도 재판도 없이 사람을 무참히 살해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말씀이다.
▼ 7월 12일 수요일, 전출명령
서울에서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 140만 명의 서울시민 중 3분의 1을 경기도 일대로 쫓아내는 전출명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시골로 쫓아내 농사짓고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게 한다니, 서울시민을 침략전쟁으로 내모는 것이다.
▼ 7월 15일 토요일, 불타는 이웃
정오쯤 됐을까. 동 인민위원회 직원이 소리를 지르며 “동민 모두 물동이를 갖고 불 끄러 나오시오!” 한다. 30m쯤 떨어진 옆집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폭격을 맞은 2층집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20여 명의 동민이 내 일이라 생각하고 불을 껐다. 30분 만에 겨우 불길이 잡혔다. 빈집인 줄 알았는데 어른 시체가 두 구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주인은 이미 도망가고 없으니 나그네가 대신 죽은 것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 아 새끼, 입대시켜야 되겠구만”
함락된 서울은 삽시간에 폐허더미가 됐다. 뒷편으로 명동성당이 보인다.
갑자기 서울시내에 대포, 고사포, 총소리가 요란하다. 집에 불이 날까 걱정돼 물을 떠놓고 대기하고 있다. 예금은 1주일에 1만환 정도 내준다고 한다. 숨통이 트일 것도 같다. 거리에는 피난보따리를 짊어지고 분주히 헤매는 사람이 간간이 눈에 띈다. 한강 상류 쪽으로 가면 아직도 몰래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갈 수 있다는 얘기에 그곳으로 몰리는 것 같다. 1000환만 주면 건너갈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자고 졸라댔으나 아버지는 막무가내다. 차라리 앉아서 죽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딘 소장이 전쟁 중 포로로 잡혀갔다. 미국에서도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미국이 강한 보복조치를 내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7월 24일 월요일, 유엔군의 삐라
B29가 대전, 충주, 공주, 청주 등지를 폭격해 공업시설, 도로, 군사물자, 자동차, 막사 등이 모두 파괴됐다고 한다. 평양 등 이북지역에도 사정없이 내리 갈겨서 우리 동포 다수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다. 아침 일찍이 마당에 나가니 유엔군이 뿌린 삐라가 있다. 주위를 살피며 주워보니 유엔군이 서울로 진격한다는 내용이다. ‘절대 안정하고 북괴에 협력하지 말라’고 적혀 있다. 안심이 된다. 그렇게 되길 기도한다.
낮에는 정치보위부 명령이라며 대문이나 담벼락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장군 만세! 남반부 해방 만세! 스탈린 대원수 남조선 해방 만세!’ 등 10여 가지 구호를 내주며 이 중 하나를 골라서 여러 사람이 잘 보게 써서 내걸라는 명령이다. 이를 어기면 인민재판에 넘겨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 7월 26일 수요일 “의용군 입대하라우!”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해 파주 문발리까지 걸어서 갔다. 두 번째다. 종일 걸렸다. 어머니와 같이 걸으니 지루하지 않았다. 늦게 도착해 땀을 씻고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완전 무장한 인민군이 3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시골이라 이곳에는 좀처럼 군인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하고 깜짝 놀라 쳐다봤다. 그자들은 “어서 밥 주시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요”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알았소”하고 보리밥을 지으신다. 그들은 게 눈 감추듯 쏜살같이 먹어 치웠다. 몹시 시장했던 것 같았다. 이윽고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이런 때 저 총으로 쏴 죽이면 좋으련만’ 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데 부스스 일어난다. 나를 보더니 “이 아 새끼, 의용군에 입대시켜야 하겠구먼. 너 몇 살이지? 말하라”라고 윽박지른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놀라서 “어린애인데 무슨 군인으로 나갑니까?” 해도 끌고 가려 한다. 나는 놀라서 “열 살이에요” 했다. 그러나 “가자고!” 하면서 몇 대 때리면서 끌고 나갔다.
트럭에 태우고 어둠이 깔려 있는 곳으로 달린다. 집에서는 울고불고 야단법석이 났다. 동패리 심학산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잠시 후 그들은 소변을 보고 가자면서 멈췄고, 모두 내렸다. 나는 이 틈에 살짝 뒤로 내려 산 쪽으로 정신없이 달렸다. 얼마만큼 달렸을까. 아래쪽에서 쫓아오는 것도 같았다. 어느 바위틈에 숨어서 몸을 피하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날이 훤해지자 나는 그길로 내려와 시골집에 들어왔다. 집에서는 내가 죽었다고 야단이 났다.
몽둥이질당한 아버지
▼ 7월 28일 금요일, 천장에 숨다
저녁을 먹고 나니 두 명의 남자가 찾아 왔다. 작은형에게 어서 숨으라고 말한 뒤 문을 열어줬다. 두 누님도 얼른 몸을 피했다. 그들은 “이춘희 만나러 왔소이다” 한다. 부모님은 “그 애는 벌써 의용군에 나갔습니다. 일선에서 적과 싸우고 있을 것인데요. 무슨 소식 못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입대한 일이 없다고 해서 나왔소이다” 한다. 부모님은 얼굴이 질려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직접 찾아보겠다”면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린다. 1층의 방 광 목욕탕 부엌 변소 응접실 서재 구석방 등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 2층으로 올라간다. 아무도 없다고 말해도 듣지 않고 살핀다. 다다미방이 2칸 있으나 그곳에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갔다.
형과 두 누님은 2층 위 천장 깊숙이 숨어 있었다. 두 누님은 스물둘, 열일곱 살, 형은 스무 살이었다. 모두 잡혀갈 만한 나이였다. 그러기에 내가 식량을 구하러 시골과 경기도 일원을 걸어서 오간 것이다. 그러나 숨었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언제 또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8월 5일 토요일, 이승만이 북침을 했다?
1950년 10월 말 사살된 중공군의 시체. 그들은 이미 겨울솜옷을 입고 동계작전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요란한 폭격 소리와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북아현동을 가로질러 달리는 경의선 기차 터널을 강타했다. 무슨 군수물자를 발견한 모양이다. 예비 폭격을 가하는 것 같다. 그것도 인민군들에게 일종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서울시민들이 겁먹지 않게 하려는 예비경고인 것일까?
▼ 8월 14일 월요일, 민청에 끌려간 아버지
새벽에 건장한 청년 3명이 집에 들이닥쳐 “이상옥씨 있느냐”고 소리쳤다. 이유를 물으니 “가보면 안다”고 하며 아버지를 끌고 갔다. 나중에 동 인민위원회 사람을 통해 알아보니 아버지가 경기여중에서 수업할 때 6·25는 분명 남침이고 쌀 배급을 준다고 하고선 거짓말을 했다고 했는데, 학생 하나가 이를 민청 간부에게 알려서 잡혀가게 됐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몽둥이로 맞아 온몸이 붓고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밤늦게 돌아오셨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 주물러달라고 하셨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있을까. 너무나 화가 났다. 이런 것들이 동족, 동포라고 말할 수 있을까.
▼ 8월 20일 일요일, 폭격으로 피투성이가 되다
보리와 쌀을 구하기 위해 다시 파주 문발리로 갔다. 경의선 화전역을 지날 무렵이었다. 갑자기 ‘웽’하며 어디선가 폭격기가 날아와 철로 위의 풀로 덮은 화물차를 폭격했다. 군수물자가 가득 실려 있었기에 그것을 폭파한 것이다. 덮여 있어도 다 아는가 보다. 검은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파편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정신을 잃고 논두렁에 나가떨어졌다.
정신을 좀 차려보니 어떤 농부 아저씨가 “학생 좀 정신이 드는가?” 한다. 두 발에 심한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좀 있으니 겨우 피가 멈췄다. 이제 살았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리통에 약이 없어 그냥 홑이불을 찢어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지혈을 해주신 것이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는지 모른다. ‘생명의 은인’이라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피가 더 흘렀더라면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벌겋게 타오르는 서쪽 하늘
이틀을 그 집에서 잘 대접받고 겨우 걷고 걸어서 문발리로 갔다. 전쟁 중이니까 그런 ‘깡다구’가 발동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무렵엔 약을 안 먹어도 어지간한 병은 다 저절로 치유됐던 것 같다. 못 먹고 굶주리니까 위장병 환자를 본 적도 없었다. 어려울 땐 그런대로 다 살게 마련이라는 부모님 말씀이 진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어 조모에게는 다친 사실을 말하지 않고 며칠 쉬다가 보리, 쌀, 밀, 채소 등을 짊어지고 아무 일도 없는 듯 다시 절룩거리며 종일을 걸어서 서울 집에 왔다. 발이 퉁퉁 부었다. 궁금해 하던 식구들은 난리가 났다. 왜 소식이 없었느냐고.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 누님들이 눈물을 흘렸다.
▼ 8월 25일 금요일, 소년 인민군의 죽음
공습이 더 심해졌다. 우리 옆집의 윗집에는 부자 심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 마당 쪽에 방공호가 있어서 폭격 때는 우리도 가끔 그곳에 들어가 몸을 피하곤 했다. 10여 명은 들어갈 수 있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오늘 낮에 그 방공호를 찾았다.
그런데 그 속에서 누군가 내 가슴에 총을 겨누며 가까이 오라는 눈짓을 했다. 10대 중반의 앳된 인민군이었다. 한데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하고 있었다. 허리에 총상을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낡은 혁대를 풀어 피나는 곳을 꽁꽁 묶었다. 안심하라면서 지혈을 해줬다. 그는 안도의 한숨과 신음소리를 동시에 냈다.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고맙다고 눈인사만 한다. 평양에서 살았고 장남인데 인민군으로 뽑혀 1주일 훈련을 받고 일선으로 배치됐다가 폭격에 파편을 맞았다고 했다. “동무네 집에 가서 약을 갖고 오라”고 했다. 알았다고 했더니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인민군은 저명인사를 색출해 거리에서 군중을 들러리로 내세워 인민재판을 열었다. 때론 즉석에서 공개처형해 공포심을 조장했다.
인민군은 원수지만 그 소년병은 우리의 형제라는 생각에 정성스레 치료해줄 양으로 약통을 들고 가서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그는 이미 숨이 넘어가 있었다. “약을 발라줄게요” 하고 몇 번이나 소리쳐도 대답 없는 이름 모를 병사.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무슨 죄가 있기에 여기서 죗값을 치르고 있는가. 소년병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 8월 31일 목요일, 이승만 규탄
인민보에 기사가 났다. 대한민국 정부에 반감을 가진 여주군 농민 수십명이 곡식을 이고 서울까지 와서 인민공산군에게 주고 갔다는 것이다. 못 믿을 기사인 것 같다. 인민군 측에서 시킨 게 아닐까. 단파방송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김일성에게 즉시 항복하고 평양으로 군대를 철수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를 듣지 않으면 유엔군과 국군이 합심해 즉시 북진해서 요절을 낸다는 것이다. 큰 작전이 진행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요지부동이다.
▼ 9월 10일 일요일, 인천 하늘의 불바다
맥아더 장군의 용맹이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맥아더 장군이 깜짝 놀랄 진공작전을 펼칠 것이란 뜬소문이 무성하다. 아침식사 뒤 답답한 마음에 서쪽 하늘을 바라봤는데, 비행기 소리와 폭음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콩 볶듯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뿐 아니다. 함포사격 같은 둔탁한 포 소리가 북아현동 일대까지 요란하게 강타했다. 아름답고 조용한 능안이 포연으로 휩싸였다. 북아현동 1번지 언덕 쪽으로 무언가가 날아든다. 멀쩡하던 집이 그것에 강타당해 삽시간에 큰 불에 휩싸였다.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다. 불안하다. 바로 이런 것이 전쟁이구나….
이젠 인민위원회에서 불 끄러 나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언덕배기에 있는 우리집에도 언제 포탄이 떨어질지 몰라 벌벌 떨고만 있다. 불에 탈 가재도구도 죄다 없어졌다. 멀리 인천 일대에는 큰 폭탄이 날아들어 쑥밭이 되지 않았을까. 그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이미 서쪽 하늘에는 검고 탁한 연기가 벌겋게 타오르고 있다. 불바다가 된 것 같다.
▼ 9월 11일 월요일, “김일성 장군이 기다린다”
공산당에 미친 당내 형뻘인 동희가 아버지에게 “김일성 장군이 아저씨를 기다린다. 함께 월북하자는 제안이 있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금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 다시는 그런 일로 나를 찾지 말라”고 타일렀다고 하셨다. 이를 듣고 “절대로 북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곧 죽이고 말 것이에요. 하루 이틀은 잘 대우해줄지 모르나 더 쓸모 없다고 판단되면 곧 숙청할 겁니다”라고 알은체하며 극구 말렸다. 아버지도 그런 말에 솔깃할 분이 아니기에 안심은 됐으나 막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몰라 가까운 거리에서 잘 지키고 동희 형의 접근을 막아야 했다. 그쪽에서 아버지를 대동하고 월북하라는 지령을 내린 모양이다. 알려진 대로 조소앙, 조완구, 정인보, 안재홍 등 수백명이 납치된 것은 모두 “잘 모시고 오라”는 김일성의 성화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불기둥 속 아수라장
▼ 9월 15일 금요일, 사흘간 치솟은 불기둥
북아현동 터널은 경의선 복선철도가 서울역과 신촌을 왕래하는 길목이다. 두 역을 잇는 철도로 일제 때는 두 역 중간에 북아현 간이역이 있었다. 당시 파주에서 쌀을 운반할 때 이곳 역을 이용한 기억이 있다.
오전 10시경, 미군 폭격기 4대가 북아현동에서 서울역 방향으로 쏜살같이 저공비행을 하며 굴속을 향해 수십 차례나 폭격을 가했다. 현장은 금방 아수라장이 됐다. 굴 밑에 있던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그대로 엎드렸다. 잠시 뒤 굴 속 화차에 실려 있던 휘발유, 경유 등이 연속으로 터져 밖으로 튕겨 나오면서 큰 소리와 함께 폭발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드럼통이 터지면서 불기둥이 200m쯤 공중으로 치솟다가 밖으로 확 튀어나와 민가를 덮쳤다. 초가 등 민가가 불길에 휩싸이고 연쇄적으로 불길이 번졌다. 북아현동 일대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그 안에 있던 무기와 병기, 군수물자 차량 등이 다 타버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6·25 이후 최대의 폭발일 것이다. 꺼질 줄 모르고 사흘 동안 불길이 치솟아 서울시내 전체를 위협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었다. 불길을 잡을 엄두도 못 내고 발만 동동 굴렀다. 밤에도 주변이 환하게 보일 정도였다.
아마도 그때 외신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지 않았을까 한다. 터널 저편, 충정로 일대에도 불길이 계속 치솟고 있었다. 서대문 일대에 사는 시민들이 큰 대야와 물동이 등을 들고 나와 불을 끄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굴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선 그 많은 군수물자가 다 없어졌으니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날 인천에 수많은 군인이 상륙해 서울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소문도 참 빠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 9월 24일 일요일, “웰컴 솔져, 땡큐!”
어제도 전예용 부시장 집 지하방공호에서 잤다. 밤새도록 콩 볶듯하던 연희고지 격전에 사실상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새벽에 일어나 누님 형님들은 다시 집으로 가 천장에 숨었다. 막바지라 인민군의 횡포가 심하다. 이 집을 점령하고 있던 여정보원들은 언제 내뺐는지 흔적이 없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먹다 남긴 쌀,보리, 밀가루, 통조림 등 식량을 슬그머니 우리집 마당에 밀어 넣고 도망갔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는 “동무들 우리 갑니다. 여기 먹다 남긴 량식을 두고 가니 활용하기 바라오. 꼭 승리하여 곧 다시 오겠소”라는 쪽지가 붙어 있다. 섬뜩했으나 굶어 죽을 판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없다.
오늘 아침엔 왠지 이상스러운 고요함이 몰려오고 있다. 아버지와 나는 폭격으로 부서진 집을 고치는 중이었다. 전쟁이 다 끝난 것일까 하고 있는데 옆집의 솟을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제7사단 소속의 키 큰 미군 4명이 환히 웃으며 총을 겨누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한 명은 잘생긴 흑인이었다.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 그렇게도 기다리던,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미군이 눈앞에 있으니 이것이 곧 천사이고 하느님이 아니신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웰컴 솔져, 땡큐!” 하신다. 나도 모르게 “대한민국 만세! 미군 웰컴!”하고 외쳤다. 그들도 기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땡큐”라고 답한다. 아마 어제 저녁에 연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우격다짐으로 새벽녘에 시내로 진입한 것 같다.
어제 저녁 우리집 2층에서 서쪽을 살펴보았다. 연희대학(연세대) 쪽을 보니 미군은 포복도 하지 않고 그냥 선 채로 총을 쏘며 전진하고 있었다. “저러다간 총 맞아 죽을 터인데…. 미군은 포복도 못하는구나. 다리가 길어 엎드려 기지도 못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연희고지 격전으로 능안의 민가 20여 채가 불탔다. 아수라장이 됐다. 죄 없는 시민들이 개죽음을 당한 것이다. 우리집 2층 다다미방에는 밤새 탄피가 수북이 쌓여 하루 종일 쓸어냈다.
이제 서울이 수복됐구나.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는가! 자유다 해방이다. 기쁘기 한이 없다. 8·15때보다 더 감격해 아버지는 눈물을 흘린다. 모두가 초췌한 얼굴이다. 못 먹고 찌든 얼굴이나마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 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김일성 치하 서울의 3개월이 30년보다 더 길었다. 폭격 중 누님이 큰 부상을 당했으나 치료할 길이 없어 집에서 그냥 약으로 대강 수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상처가 아물어주는 게 얼마나 신통한지 모르겠다. 강한 의지가 곧 약이다.
되찾은 서울, 그러나 무법천지
▼ 9월 25일 월요일, 골목골목 시체더미
아침 일찍 동네주변을 살폈다. 늘 그렇듯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간 것이다. 부시장 전예용, 함태영 부통령과 전용순씨 집 앞에는 남녀 시체 30여 구가 나뒹굴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서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으나 여자가 더 많았다. 전부 입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총포에 맞은 듯하다. 눈을 뜨고 죽어갔다. 얼마나 원통하기에…. 치마 입은 주부, 집에 깊이 숨어 있던 노인, 소년소녀들 모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그런 비참한 광경은 처음이었다. 살고 죽는 것이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이런 참상은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적 치하 3개월을 용케도 잘 견디다가 어떻게 그리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까.
▼ 9월 26일 화요일, 남녀포로 나체 연행
서울의 서부는 다른 곳보다 일찍 탈환된 것 같다. 북아현동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맞은 나는 누구보다 큰 기쁨에 젖었다. 곧이어 우리 군이 들어오더니 모두 밖으로 나와서 한군데서 손을 들고 기다리라고 한다. 빈집에 들어가 철저히 수색을 한다는 명목이었다. 우리는 적극 협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중에 집에 가보니 카메라, 반지 등 귀중품이 다 없어진 것이다. 이런 국군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싶어 허탈했다. 그들의 소행일까? 게다가 옷과 짐 보따리에 마구 총질을 해대서 전부 구멍이 나 있었다. 가재도구와 식기도구를 모두 못쓰게 하고 말았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전쟁이기에 이런 일도 참아야 하는 것일까.
얼마 뒤였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밖으로 나가보았다. 깜짝 놀랐다. 남녀 포로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20여 명 돼 보인다. 그런데 모두 발가벗긴 채다. 20대 전후의 청춘 남녀를 실오라기 하나 못 걸치게 하고 그렇게 개 끌듯이 데리고 돌아다니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내 어린 소견으로 부대장이 명령한 것인지 사단장이 시킨 것인지 몰라도 제네바협약에 위반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을 보니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모두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당장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최소한의 법적 장치는 있을 터인데….
동네 아이 수십명이 그들을 졸졸 따라다닌다. 그때 어떤 아이들이 “저 놈 빨갱이입니다”라고 소리치니 군인 하나가 연유도 가부도 묻지 않고 그 자를 데리고 집 뒤 금화산으로 끌고 갔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계곡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자의 뒤통수에 권총을 대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청년은 “악!” 하고 뒤로 넘어졌고 정적이 흘렀다.
빨갱이 취급당한 非도강파
▼ 9월 28일 목요일, 서울 수복·이 대통령 북진 강조
오늘이 서울 수복의 날이다. 적 치하 3개월 만에 서울을 다시 찾은 것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먼저 방송국 선발대원이 한강을 넘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38선은 물론 북한까지 진격해야 한다고 또 큰소리친다. 실은 우선 서울시민에게 사과부터 해야 한다. 나는 친구와 같이 태극기가 걸린 중앙청으로 달려갔다. 서울역, 숭례문, 시청이 모두 불이 나거나 파괴되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간 청년들은 얼마나 억울한 죽음을 맛보았을까. 관리·경찰·학자·정치인·기술자·경제인 등 북으로 납치된 사람들은 평양에서 갖은 모욕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충주 영월 대전 삼척 단양 전주 강경 논산 부여 공주 일대에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단다. 그러나 아직도 미아리 정릉 방면에서는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역시 치안은 불안한 가운데 서대문 방향이 먼저 수복된 것 같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손을 잡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기대했듯이 서울시민에게 정중하게 잘못을 뉘우친다면서 사과의 담화를 발표했다. 서울을 다시 찾았으니 이제는 아름다운 나라의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 10월 3일 화요일, 이강석에게 튀긴 콩을 팔다
서울이 수복되더니 피난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제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조흔파(소설가)도 돌아왔는데 으스댄다고 하셨다. 본인이 도강파(渡江派)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非)도강파와의 시비가 심심치 않았다. 비도강파는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남으로 도망친 자들이 민주파라고 자랑이 대단했다. 큰 모순이다.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빨갱이의 심부름꾼이었다고 선을 그으며 놀려댄다는 것이다. 공산당에 부역했다고 이상한 눈으로 보기도 한다. 수복은 됐으나 나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시골에서 갖고 온 콩을 뻥 튀겨 굴레방다리 철길 밑에서 좌판을 깔고 염치불고 “콩 사세요!” 하면서 팔았다. 한데 어느 날 그 콩을 사러온 녀석이 동창생 이강석이었다. 나는 일부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한 봉지 팔았다. “얼마요” 하기에 “100환이요” 하니 “어서 주시오” 했다.
내 손으로 가족을 묻고
▼ 10월 15일 일요일, 누님과 동생을 잃다
북아현동에도 재건의 바람이 일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편안히 살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신문팔이를 자청해 경향신문 서대문 보급소로 달려갔다. 신문을 받아다가 북아현동, 아현동, 서대문, 충정로 일대를 마구 돌아다니면서 뿌렸다. 피난 갈 준비를 하는 집에는 내가 배달할 때까지만 신문을 봐달라고 간청해서 허락을 받아냈다.
국내 정세는 날로 악화돼 중공군이 개입했다고 모두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공군이 들어오면 팔을 잘라 간다’ ‘귀를 잘라 장독에 담근다’는 둥 소문이 좋지 않다. 몸서리가 쳐졌다. 6·25때처럼 그냥 집에 머물러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는 누구나 피난을 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만연해 있었다.
아버지는 적 치하에서 경기여중에 나가 교육을 했다고 부역자 취급을 받아 고통 속에 있다. 어느 날 신사 한 사람이 우리집에 들어와 “이 집은 부역자의 집이니 내놓으라”고 호통쳤다. 조중환이라는 자였는데, 무슨 서류나 명령서도 없었다. 그냥 집을 비워달라는 것이다. 이런 어거지 수작이 어디 있는가. 누구에게 의논할 수도 없었다. 꼼짝없이 쫓겨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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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는 수 없이 굴레방다리 근처 4촌 효희네 자그마한 집으로 옮겨갔다. 너무나 순진하게 집을 빼앗긴 것이다. 나는 4촌 효희네에 가서도 계속해서 신문을 돌리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시골에서 쌀도 대먹지 못하기 때문에 살길이 막막했다. 내가 벌어 오는 것이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부모님을 모시고 겨우 연명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수당도 잘 주지 않아 살아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버지는 다시 부역 혐의로 어떤 기관에 잡혀갔다가 보름 뒤에 풀려났다. 부역자를 모두 용서해준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풀려난 것이다. 아버지는 풀려나온 뒤 우리들에게 “나를 원망하지 마라. 고생이 많았지…” 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후줄근하고 마른 얼굴이, 일제 때 서대문감옥에서 풀려 나오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추위가 닥쳤다. 아버지는 중공군이 개입해서 위험하기에 곧 피난을 가야 한다면서 나와 어머니, 세 동생 등 5명은 집에 남겨두고 형과 두 누님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뒤처진 우리는 1·4후퇴 때 온양까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끌려다니다가 이듬해 3월 중순에 다시 서울로 왔다. 큰누이는 피란길에 폭격으로 23세 때 죽고 다섯 살짜리 소아마비 동생은 먹지 못하고 버티다가 이듬해 4월 결국 굶어 죽었다. 전쟁 통에 가족 둘을 잃은 것이다. 내 손으로 그들을 묻었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통곡이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슬픔의 도가 지나치면 그렇게 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