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려 30여 개의 봉사단체를 이끄는 리더이자, 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5개 신문·잡지 발행인, 치과 임플란트 역사의 산 증인, 전국 치과 개원가 단일 최대병원 소유…. 치과의사 이재윤은 1인 40역을 하는 ‘괴력’의 소유자다. 한류 스타 배용준의 첫 연인으로 알려진 영화감독 이사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가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배용준과 이사강의 사연.
전국 개원 치과의원과 병원을 통틀어 단일 클리닉으로는 가장 많은 치과의사 수(16명)와 규모를 자랑하는 대구 덕영치과병원. 이곳의 이재윤(李在允·57) 병원장에겐 30여 개가 넘는 직함이 있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단체만 17곳, 부회장 고문 위원 등으로 있는 단체를 모두 합치면 30개가 훌쩍 넘는다. 21개 학교의 교의(校醫)를 맡고 있으며 동시에 ‘우먼라이프’ ‘전국 APT신문’ ‘로터리코리아’ 등 주간·월간 신문과 잡지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국내 치과 임플란트 기술 발전의 산 증인으로서, 이처럼 많은 가욋일을 하면서도 진료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는 점. 게다가 그는 지금껏 3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3권의 수필집을 낸 수필가이며 지금도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신문, 잡지는 물론 지역 일간지와 각종 잡지에 고정으로 칼럼을 쓴다. 거기에다 한 여자의 남편, 두 딸의 아버지…. 혼자서 족히 1인40역을 소화하고 있는 셈이다.
두 딸 도이와 사강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는 잠도 자지 않는 것일까. 대구 도심에서 살짝 비켜난 곳에 자리 잡은 덕영치과병원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지상 7층에 지하 3층. 병원 1층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른쪽엔 환자와 직원을 위한 카페가 있고 왼쪽은 갤러리였다. 미리 신청하면 누구나 무료로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원장실에는 온갖 감사패와 그림, 사진들이 올망졸망 줄지어 붙어 있다. 원장실을 둘러보던 기자의 눈에 확 다가오는 사진 둘. 사진 속 여인들은 대단한 미인이다. 그중에 원장실 왼쪽 기둥에 걸린 액자 속의 여인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영화감독 이사강(27)씨였다. 한류 스타 배용준의 첫 연인이었다는…. 그때 이 원장이 원장실로 들어섰다. 수인사를 나누자마자 사진 속 여인에 대해 물었다.
“예. 왼쪽이 둘째딸인 사강이고 오른쪽은 큰딸 도이입니다. 사강이는 영화감독이고, 도이는 영국에서 세인트 마틴이라는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후 겐조라는 디자인 회사에 있다 최근에는 파리에서 자기 브랜드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커 나가야죠. 둘 다 잘할 겁니다.”
▼ 둘째따님이 배우 배용준의 첫 연인이었다는 기사가 몇 달 전 화제가 됐는데요. 연인관계였던 게 사실입니까.
“뭐, 아니라고는 할 수 없죠. 사귄 건 맞으니까…. 지금은 서로 일로 도와주는 좋은 선후배 사이로 지낸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큰딸 도이씨가 나온 세인트 마틴은 세계 최고의 패션디자인 학교로 정평이 나 있고, 디자인 회사 겐조도 패션 디자이너들이 꿈꾸는 디자인 명가. 둘째딸 이사강 감독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를 다니다 세계적 영화인 교육기관인 런던 필름스쿨에서 학사·석사과정을 밟았다. 2002년 단편영화 ‘스푸트니크’로 좋은 평가를 받은 후 도쿄영화제와 아시아영화제에서도 입상했다. 촬영감독으로 참가한 영화도 2편. 빼어난 용모 때문인지 자신이 직접 CF 모델로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사강 감독은 한류 스타 배용준의 첫 연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연인관계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2003년 말 배용준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공개하면서부터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 후 홀연히 한국을 떠난 이사강 감독은 런던 필름스쿨에서 예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지난해 돌아왔다. 올초 ‘태왕사신기’로 배용준이 화제를 모으자 다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 간에 실제로 혼담이 오갔는지, 그리고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선 밝혀진 게 없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이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만나자마자 껄끄러운 질문을 하기가 뭣해 일단 이재윤 원장의 ‘철인적 기행(奇行)’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괴력’의 열쇠는 집중과 몰입
이재윤 원장 부부를 중심으로 왼쪽이 큰딸 도이씨, 오른쪽이 사강씨다.
“제가 먹고사는 데 관련된 일은 치과의사밖에 없고, 나머지는 모두 봉사죠. 봉사가 밥은 안 주지만 마음의 양식은 됩니다. 어릴 때는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문학과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호구책으로 치대를 갔는데, 그때 결심한 게, 한 10년 정도 의사생활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죠. 국립대학 싸게 다니면서 장학금도 받았기에 사회에 되돌려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먼저 봉사단체에 가입하겠다고 나서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도와달라고 하면 사양하지 않고 직책을 맡는 것뿐이죠. 거절하지 않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 그 많은 단체를 어떻게 다 이끌고 관리합니까. 잠은 언제 잡니까.
“잠은 잘 만큼 잡니다. 계획만 철저히 세우면 모든 게 가능합니다. 앞으로의 일을 늘 머릿속에 집어넣고 정리를 해둬야 해요. 그러려면 회원들의 처지에서, 회원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평소에 알아놓아야 하죠. 그러고는 결재가 올라오면 순간적으로 판단합니다. 하루에도 수십개 단체의 결재를 해야 하는데 속사정을 모르면 판단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죠.
각종 행사와 회의를 우리 병원에서 해결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웬만하면 400여 명이 들어가는 우리 병원 대강당과 50명이 들어가는 병원 회의실 4곳에서 해결합니다. 우리 병원 식당이 호텔 수준이라 모든 게 가능합니다. 또 사무총장이나 국장들에게 실무를 맡겨놓고 저는 최종 판단만 하면 되는 거죠. 결국 판단의 문제인데, 이럴 때는 제가 ‘바둑인’인 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원장은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치대를 졸업했다. 군에서는 군의관이 아니라 헌병대에서 복무하다 병장 제대했다. 한국바둑학회 회장, 대한바둑협회 수석부회장인 그의 바둑 실력은 아마 6단으로 바둑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한국기원 이사이자 로터리 세계바둑 한국 지부장인 그는 매년 ‘덕영배 아마대왕전’을 개최하고 있다. 여기에 매년 40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또한 대구바둑협회장 자격으로 일본 후쿠오카, 히로시마, 중국 칭다오 등의 도시와 국제교류전을 여는 한편, 로터리 세계바둑 한국지부장으로서 국제교류에도 참가하고 있다. 그는 대학시절 조남철 9단에 반해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 바둑이 단체 운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바둑은 최고의 수(手)를 찾아내는 과학이죠. 언제나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인생은 취사선택의 연속이죠. 바둑을 두면 승부를 앞두고 호흡이 가다듬어집니다. 집중과 몰입을 하게 되는 거죠. 한 수를 잘못 놓으면 대마가 죽거든요. 늘 초읽기에 몰립니다. 그리고 바둑은 수담(手談), 즉 손으로 하는 대화죠. 바둑을 두면 상대방의 스타일이 바로 읽힙니다. 바둑을 통해서 외교를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금방 친해지죠. 바둑은 순간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집중력을 키워주는 데다 인간관계를 두텁게 하는 데 최고라고 자신합니다.
게다가 바둑은 나이 든 사람에겐 최고의 두뇌 스포츠입니다. 스트레스 없는 집중, 몰입 속에서 뇌는 활기를 느낍니다. 협회를 찾아오는 어르신들을 보면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아도 꽤 건강합니다. 물론 밤을 새우거나 술, 담배를 함께 하지 않는 분에 한해서요. 그만큼 정신건강에 좋다는 이야기이지요.”
“레이저 임플란트는 호객행위”
▼ 바둑은 잘 져줘야 사람이 모인다는데 어떻습니까.
“표 안 나게 져주는 게 굉장히 힘들죠. 져주려고 하는데 상대가 계속 자충수를 두면 안 따낼 수도 없고 미치죠. 이수성 전 총리가 백을 잡고 둔 적이 있는데 전의(戰意)가 안 생기더군요. 자충수를 자꾸 두시는데 애먹었습니다. 원래 바둑은 잘 져줘야 잘 두는 겁니다. 소인배는 절대로 져주지 않죠.”
이 원장은 글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시집 ‘보리와 이빨’ ‘위대한 사랑은 꽃잎가를 맴돌고’ ‘비소리’와 수필집 ‘보리와 이빨’ ‘일등국으로 가는 길’ ‘낭만적 사고’에 이어 최근에는 ‘밀레니엄 이슈’ 상하권을 출판해 화제가 됐다. 그는 또 국내 최초로 임플란트를 환자에게 설명하는 방식의 책을 발간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인공치아이식’이 바로 그 책이다.
한 전시회에서 포즈를 취한 이사강 감독.
▼ 다른 할 일도 많은데 글쓰기는 어떤 이유로 시작했습니까.
“철학과 문학에 관심이 많고 책 읽기도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서 첫 시집 ‘보리와 이빨’을 냈는데 조금 반향이 있으니까 ‘성공한 의사가 재미로 해보는 짓’이라는 비난이 쏟아지더군요. 저는 정말 죽기 살기로 썼는데 말이지요. 아무튼 이후부터 이런저런 칼럼 의뢰가 들어와 글을 계속 쓰게 됐죠. 강연 청탁도 들어왔습니다. 임플란트에 대한 내용이 많았어요. 그래서 환자가 임플란트를 잘 이해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책을 냈는데, 그게 3개 공중파 방송과 신문에 보도되는 등 반향이 컸어요. 환자들뿐 아니라 치과대학, 그리고 임플란트 전공 개원의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 치과의사들에게 물어보니 이 원장께서 ‘임플란트의 산 역사’라고들 하더군요.
“과찬이고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임플란트가 한국에 보급된 게 1960년대 말입니다. 벌써 40년이 넘었죠. 저는 국내 최고의 임플란트 권위자인 김홍기 박사님을 사사했는데, 당시에는 성공률이 미미했죠. 그러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임플란트가 대중화했습니다. 세계적인 학회도 열리고. 제가 본격적으로 임플란트를 시술한 것은 1993년 전후입니다. 성공률이 90%를 넘어가니까 병원을 찾는 환자가 폭증하더군요. 어쨌든 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에 대해선 반드시 검증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요즘 레이저 임플란트가 대유행인데요.
“레이저는 무통(無痛)이라고 선전하는데, 살을 태우는데 어떻게 안 아플 수 있습니까. 우리 병원에서 의사를 상대로 실험을 했는데 아파서 눈물을 흘릴 정도예요. 그거, 솔직하게 말하면 호객행위입니다. 뼈를 깎아서 구멍을 내고 인공치아를 박아야 하는데 레이저는 뼈를 잘 못 뚫어요. 피부만 태우죠. 마취하고 드릴로 펀칭하는 데 3~5초면 되는데 레이저는 그보다 10배는 더 걸립니다. 물방울 레이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건 못 하도록 막아야 하는데, 서로 처지가 다르다 보니 어려워요.”
“영원한 무소속…봉사가 곧 정치”
덕영치과병원은 서울에도 분점이 있다. 서울 메디컬타운의 메카인 강남역 사거리 한 중심에 덕영치과가 있다. 봉사와 글에 맛을 들인 이 원장은 더욱 큰 봉사를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려 했지만 마음을 돌려 치과를 늘려갔다고 한다. 국내 환자들에게 더 봉사하고, 국내에도 봉사할 단체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에서도 국제적인 봉사를 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 것도 이유가 됐다. 국제로터리클럽이 그것. 그가 국제로터리 3700지구 총재로 있던 2001~2002년에는 회원 증가율 세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 원장은 요즘 소비자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체로 부상한 아파트 입주자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전국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연합회는 대구가 그 출발점. 이 원장은 연합회의 창립회원이자 대구시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연합회 회장이다.
“아파트 입주자 운동은 좀 진부한 표현처럼 들리겠지만 ‘도심 새마을운동’이라고 보면 됩니다. 2600만 아파트 주민이 행복하지 않으면 나라가 행복할 수 없죠. 행복한 아파트, 친환경 아파트, 화합하는 아파트 만들기가 저희의 목표입니다. 입주민의 권익은 정부와 정면충돌하지 않는 한 찾아 나갈 작정입니다. 최근에는 국회의원들과 합심해 지원조례도 만들고, 1촌1아파트 운동을 벌여 농산물 직거래 운동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자연보호 대구시협의회 회장인 그는 환경보호 운동과 관련해 3가지 철학을 갖고 있다. 샛강 살리기, 1회용품 쓰지 않기, 음식물 남기지 않기가 그것이다. 소박하지만 온 국민이 실천하면 그 파급효과가 엄청난 것들이다. 환경부의 지원을 받아 캠페인도 하고 행사도 했으며 대구의 젓줄인 신천에 오리도 띄우고 잉어도 풀어줬다. 얼마 전에는 3000명의 회원이 대구시 달성군 인근 습지 60만평(198만3600m2) 조성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자신이 발행하는 여성지 ‘우먼라이프’에 대해 관계자와 논의하는 이재윤 병원장.
“저는 정치적으로는 영원한 무소속입니다. 제겐 봉사가 정치입니다. 사실 수장으로 있는 단체의 진성 회원만 수십만이 넘습니다. 저는 정부가 하는 일은 웬만하면 밀어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번은 대학 후배인 이재용씨가 대구시장 선거에서 떨어지고 잠시 우리 치과에 취직해 있었는데, 어느 날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출마를 한다고 도와달라기에 비어 있는 공간을 사무실로 쓰라고 했죠. 지난해 대선 때는 한나라당 쪽에서 좀 쓰자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을 뿐입니다. 아마 제가 이명박 대통령과 관향(경주)과 파가 같아서 이런저런 말이 나오는 모양인데…. 뭐, 합법적인 것이라면 종씨 못 도와줄 이유가 없죠.”
인터뷰 말미에 가서 영화감독 이사강과 한류 스타 배용준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들춰냈다. 이 원장은 얼떨결엔지, 아니면 작정을 하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배용준 만났고, 혼담도 오갔다”
▼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따님 이야기 한번 해보시죠. 이사강 감독은 외향적이고 예술적인 면모가 아버지를 닮은 것 같군요.
“끼는 있어 보입니다. 사강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일 땐데 퇴근하다 보니 동네 어귀 전봇대에서부터 집 대문 앞까지 ‘동물을 사랑합시다’라는 문구가 쓰인 강아지 그림이 붙어 있는 거예요. 사강이가 평화시위를 한 겁니다. 할머니가 집에서 키우던 치와와 강아지 두 마리를 시골에 갖다줘버렸거든요. 참 당찬 아이였죠. 특히 그림을 잘 그렸어요. 피아노면 피아노, 달리기면 달리기, 뭐든지 잘했죠. 육상선수도 했고요. 중국어와 일본어도 수준급입니다. 오디션 봐서 떨어진 적이 없어요.”
▼ 배용준씨와 사귈 때 얘기 좀 해주세요. 왜 헤어진 겁니까.
“저희들끼리 만났으니 자세한 건 모르죠. 누구 소개로 만났다는데. 사귈 때 (내가) 알고, (배용준을) 만나도 보고 했죠. 배용준이 (영화 공부에) 도움을 준다고도 했고. (사강이는) 어리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배용준은 한류 스타이니 그쪽에 신경 쓸 일이 많았겠죠. (배용준이) 애인이 생겼다고 홈페이지에 올리는 바람에 관계가 밝혀진 이상 딸 가진 부모 처지로선 혼인을 하든지 거기서 스톱을 하든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배용준은) ‘결혼하려면 3, 4년 있어야겠다’고 했죠. 사실 CF 등으로 무척 바빴습니다. (당장 결혼을 하면) 인기나 수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우리 애가 막연히 기다릴 수도 없었죠. 좋은 감정은 있었지만 사정이 서로 다르니 (둘을) 격리할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영국으로 두 번째 건너간 겁니다. 런던필름스쿨에서 예술학으로 두 번째 석사학위를 받은 게 그때입니다. 들어온 지 1년 좀 넘었습니다.”
▼ 최근에 이사강 감독의 전시회에 배용준씨가 오기로 했다고 해서 연예담당 기자들이 난리가 났는데 결국 안 왔다면서요.
“‘태왕사신기’ 촬영할 때 다친 다리 때문에 못 왔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이젠 선후배로서 서로 돕고 연락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자주 만나는 건 아니라고 합디다. 사람 살면서 원수로 지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 사위 볼 욕심이 없었습니까.
“사강이가 어디 흠결이 있는 애도 아니고, 교육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그보다도 당시에는 나이도 어리고 직업인으로서 앞길이 창창했습니다. 홀로 우뚝 설 필요가 있었어요.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로 남으면 되는 거지, 굳이 따라다니는 건 제가 싫었습니다.”
▼ 이 원장께서 결혼을 말렸습니까.
“저는 평소에도 판단은 아이들에게 맡기는 편입니다. 당시 이니셔티브를 쥔 쪽은 배용준씨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막연하게 3, 4년을 기다릴 순 없다고 했죠. 자기(배용준)는 그런 처지가 아니었고.”
▼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게 됐군요.
“그랬습니다. 유학은 제가 보냈습니다.”
▼ 그 일로 따님과 다툰 적은 없습니까. 배용준씨에게 섭섭한 것은 없고요?
“다툴 이유가 없죠. 우리 애는 직업적 자신감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자기 세상이 열리고 얼마든지 클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배용준씨에게도 섭섭한 거 없습니다. 나이차도 좀 있었고. 우리가 애달을 일은 없었죠.”
Think Deep, Serve Big, Long Run’
▼ 이사강씨가 인터넷에서 시쳇말로 떴는데요. 배용준씨와의 옛일 때문에 불이익은 없습니까.
“인터넷 접속순위 1위도 하고 했죠. 전국 모임도 4개나 가지고 있더군요. 배용준씨 때문에 불이익을 받기는커녕 사강이 사촌은 일본에 가서 배용준씨 팬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왔답니다. 이사강 감독 사촌이라고요. 이미 헤어진 지 오래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미울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 팬은 배용준씨 사진을 세 군데에 묻는답니다. 장롱과 가슴, 그리고 땅속에요. 집에 불이 나도 타지 말라고요.”
▼ 가족들은 자주 모입니까. 이사강 감독은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1년에 두세 번 모입니다. 큰애는 프랑스에 회사가 있고, 사강이도 영국에 회사가 있어 한국을 왔다 갔다 하는데 다 같이 모이기가 힘드네요. 둘째는 요즘 자기가 감독으로 CF를 찍기도 하지만, 얼마 전에는 ‘아디다스’ 모델로 CF를 찍히고 왔더군요.”
▼ 가훈이 있습니까.
“깊이 생각하고 크게 봉사하고 길게 살자. 영어로 하면 Think Deep, Serve Big, Long Run쯤 되겠죠. 그냥 돈을 던져주는 게 봉사가 아니고 큰 봉사는 마음과 몸이 함께 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