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및 영화 ‘동승’의 원작자 함세덕(咸世德·1915~1950)은 1988년 해금 전까지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후 월북한 그는 6·25 때 서울에서 죽어 망우리공원에 묻혔으나 무덤에 비석조차 없었다. ‘빈궁(貧窮) 문학’의 최고봉이라 평가되는 최학송(崔鶴松·1901~1932)도 ‘북쪽에서 찬양받는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세월이 흘러 두 작가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고 무덤에 비석까지 생긴 지금, 그들의 무덤은 찾는 이 없어 수풀에 덮인 채 적막하기만 하다.
망우리공원 외진 곳에 자리 잡은 함세덕(왼쪽)과 최학송의 무덤 앞 비석.
무덤의 오석(烏石) 비 왼쪽 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15년 5월23일 강화에서 3남 3녀 중 2남으로 출생. 1950년 5월29일 서울에서 전사했다.’
한국 연극사의 한 축
그런데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의 백과사전에는 대부분 1916년생으로 기록돼 있다. 위키백과는 ‘1915년이라는 설도 있다’는 말도 추가해놓았는데, 앞으로 이 비석의 표기를 근거로 수정돼야 할 것이다.
뒷면에는 ‘극작가. 1936년 ‘조선문학(朝鮮文學)’지에 ‘산허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 ‘동승(童僧)’으로 극연좌상(劇硏座賞)을 수상. ‘해연(海燕)’으로 신춘문예 입선. ‘무의도기행(無衣島紀行)’ ‘추장(酋長) 아사베라(‘이사베라’의 오기-필자)’ ‘기미년 3월1일’ ‘태백산맥’ ‘에밀레종’ ‘산적’ ‘대통령’ 등 24편의 작품을 남겼다’는 문장이, 그리고 바로 옆면에는 ‘삶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 ‘동승’ 중에서’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러나 작품 ‘동승’이나 희곡집 ‘동승’은 물론, 전집의 모든 작품을 찾아봐도 이런 글은 보이지 않았다. 출처의 확인은 당분간 숙제로 남겨둔다. 어쨌든 손을 내미는 것은 살아 있을 때만이 아니다. 그는 비석을 바라보는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가만히 잡고 그의 일생을 정처 없이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함세덕의 부친은 인천일본어학교를 졸업한 후 나주군과 목포부의 주사로 공직생활을 했다. 함세덕은 인천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의 목포 부주사 시절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후 부친은 공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객주업(거간, 유통업)을 시작했다. 함세덕은 인천에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교)를 졸업했다. 그의 작품에 유난히 바다가 많이 나오는 것은 목포와 인천이라는 지역적인 영향 때문이다.
상업학교 4학년 때는 졸업생 환송을 위해 연극 ‘아리랑 고개’를 공연하며 연극에 대한 꿈을 키웠다. 상업학교 졸업 후에는 남들처럼 안정적인 직장인 은행에 취직하지 않고 서울 충무로의 책방에 취직해 독서와 습작에 열중했다. 1935년 동아일보에 세 편의 시를 투고했고(2월1일 ‘내 고향의 황혼’, 3월19일 ‘저 남국의 이야기를’, 9월27일 ‘저녁’), 책방 손님 김소운(金素雲·시인, 수필가)을 통해 유치진을 알게 되면서 연극계에 들어섰다. 1936년 21세의 나이로 ‘조선문학’에 ‘산허구리’를 발표하며 등단, 1939년 3월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올린 ‘도념(동승의 원제)’의 작가로 크게 주목받았고, 이어 1940년 ‘해연’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극작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후 함세덕은 유치진과 함께 한국 연극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됐으나, 두 사람은 해방 공간에서 이념적으로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敵의 전사?…훼손된 비석
함세덕은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도념’을 출품했다. 아래는 이를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그런데 비문을 살펴보면 ‘서울에서 전사’의 ‘전’자가 의도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보인다. 함세덕은 1946년 월북해 북한에서 작품활동을 하다 1950년 6·25 때 인민군 선무반(宣撫班)의 일원으로 서울로 내려왔다가 갖고 있던 수류탄을 실수로 터뜨리는 바람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또 남한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의 전사는 ‘적(敵)’의 전사가 되는 셈이다. 누가 어떤 생각에서 그랬는지 짐작 가는 바 있지만 친일파든 친북파든 세상을 떠난 고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1996년 파주에 북한군과 중공군 묘지도 만들어줄 만큼 포용력을 갖게 됐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민족의 정통성을 잇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함세덕은 이념적으로 명백한 좌파 문인이었다. 광복 전의 대표작을 모아 1947년 6월20일 박문서관에서 발행한 희곡집 ‘동승’에는 ‘동승’ ‘추석’ ‘무의도 기행’ ‘해연’ ‘감자와 족제비와 여교원’이 실려 있는데, 저자의 후기는 이렇게 맺어졌다.
“이 희곡집은 작가 함세덕의 전시대의 유물로 보관되는 데만 간행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줄로 안다. 나는 8·15를 계기로 완전히 이 작품들의 세계에서는 탈피하였다.”
즉 함세덕은 후기를 통해 자신은 ‘동승’과 같은 서정극의 세계를 떠나 이제 이념의 세계에 들어섰음을 선언한 것이다. 광복 후 그의 행동은 이 선언을 뒷받침한다. 남로당에 가입해 연극활동을 하다 미 군정이 정치 연극을 금지하자 ‘동승’ 간행 후인 1947년 가을에서 1948년 봄 사이에 송영, 황철 등과 함께 월북했다. 마치 ‘동승’에서 주인공 도념이 눈 내리는 날 몰래 절을 떠나 사바의 세계로 간 것처럼, 그는 ‘이 작품들의 세계에서 완전히 탈피’하려 발버둥쳤다.
시대 상황이 월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말도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좌파와 독립운동이 잘 구분되지 않은 측면도 있고 광복 후 남한에서의 연극활동은 밥 벌어 먹기 힘든 직업이었지만, 북쪽은 정치적 도구로써 연극의 가치를 인정해 정권 차원에서 지원했다. 그래서 남한에서 극장도 제대로 빌리지 못하던 남한 연극인들 중에는 이념에 관계없이 친북으로 기운 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장기판의 靑紅戰
그러나 북한이 지원한 작품은 좌파 이념 선전에 한한 것으로, 순수 지향의 예술인이 돈 때문에 월북했다는 설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득력이 약하다. 월북을 경제적 이유나 창작 기회의 확보를 들어 변명하는 것은 북한의 현실을 몰랐던 어리석음을 인정하는 것이거나 비겁한 말장난일 뿐이다.
함세덕은 북으로 넘어간 뒤 ‘대통령’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비난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6·25 때 인민군을 따라 서울로 내려와 ‘전사’했다. 1951년 10월, 전시(戰時) 공보당국이 함세덕, 이태준, 김사량, 한설야, 이기영, 홍명희, 오장환, 송영 등 6·25 전 월북작가 38명을 A급으로 분류, 기간발금(旣刊發禁)및 문필금지 조치를 취한 후 1988년 해금 전까지 함세덕은 알려지지 않았고 알아도 말할 수 없는 작가가 됐다.
작품 ‘해연(海燕)’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등대지기의 대사는 꼭 그가 자신의 운명을 예측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인생이란 운명의 장기판인가 보다. 한참 놀다가 결국은 제각기 말 상자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마나 보다.”
희곡집 ‘동승’에 실린 ‘해연’에는 대사로만 남아 있지만, 이 말은 원래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의 맨 앞에도 적혀 있었다.
희곡집 ‘동승’ 표지(위)와 영화 ‘동승’의 한 장면
그 자신, 인생이라는 장기판에서 청홍전(靑紅戰)을 벌이다 전사해 말 상자로 들어간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이 인생이라는 장기판이었다면 그의 말 상자는 곧 망우리공원이다.
1991년인지 1992년인지 확실치 않다. 신촌에서 지금의 아내와 데이트를 하던 나는 우연히 ‘동승’이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원작자 함세덕의 이름은 금세 잊어버렸고 단지 TV 프로그램에 가끔 소년 역으로 출연하던 지춘성씨가 주인공 도념을 연기한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함세덕과 동승이 연결된 것은 망우리공원에서 비석을 발견하고 나서였다.
사바세계로 떠난 童僧
그렇게 그는 남한에서 ‘동승’이라는 작품으로 가장 먼저 재조명됐다. 초기작이지만 그 작품은 정치색이 없는 서정극이었기 때문이다. ‘동승’은 그의 책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 인천상업학교 5학년 때 친구들과 금강산 여행시 마하연(摩訶衍)에서 본 동자승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동승 도념(道念)의 어머니는 비구니였으나 사냥꾼과 사랑에 빠져 낳은 도념을 버리고 속세로 떠났다. 도념은 주지의 손에 자라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 절에서 죽은 아이의 명복을 빌던 대가집 미망인은 주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념을 수양아들로 삼고자 한다. 도념은 사냥한 토끼를 관음보살 뒤에 숨겨놓은 것이 발각된다. 도념은 미망인이 목에 두른 목도리를 보고 자기 어머니에게도 같은 목도리를 만들어주겠다며 사냥한 토끼를 관음보살 뒤에 숨겨놓았다 발각돼 고초를 치른다.
주지는 미망인에게 이 ‘죄덩이’를 데려가면 더 큰 죄를 짓게 할 것이라며 포기하라고 잘라 말하고, 미망인도 남편과 아이를 잃은 죄 많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도념을 포기한다. 그러나 도념은 주지 몰래 혼자 어머니를 찾아 길을 떠난다. 산에는 흰 눈이 펑펑 내린다….
주지가 보기엔 세상은 죄 많은 곳일 따름이었지만 도념에게는 그리운 어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동승’에서 주지와 도념이 나눈 대화 한 구절을 보자.
주지 : 도념아 너 저 연못을 봐라. 5월이 되면 꽃이 피고 잎사귀에 구슬 같은 이슬이 구르고 있지 않니? 저렇게 잔잔한 연못도 한겹 물 퍼내고 보면 시꺼먼 개흙투성이야. 그것뿐인 줄 아니? 10년 묵은 이무기가 용이 되서 하늘로 올라가려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비 오기만 기다리고 있단다. 동네도 꼭 저 연못과 마찬가지야. 그야말로 경문에 아로새겨 있는 글자 그대로 오탁(汚濁)의 사바니라.
도념 : 아니에요. 모두들 그렇지 않대요. 연못 속에는 연근이라는 뿌럭지가 있지 이무기는 없대요.
이효석도 초기에는 이념소설을 쓴 적이 있으나 읽을 만한 것이 없다. ‘메밀꽃 필 무렵’이 그의 대표작인 이유는 당연히 작품 내용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념이나 문학사조의 유행에 따른 작품은 생명이 오래가지 않는다. ‘동승’이 자연스럽게 함세덕의 대표작으로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이해랑은 광복 이후 함세덕의 사상적 변신에 대해 “‘동승’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싶다”고 했다. ‘동승’으로 출발해 어머니가 있는 동네로 내려온 함세덕에게 세상은 과연 오탁에 가득 찬 사바였을 뿐일까.
함세덕의 묘 뒤에는 부모의 묘가 있다. 묘비 옆면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데전 5장 16.17.18절. 어머님은 이렇게 사셨습니다’, 뒷면에는 ‘아버님 어머님 불효를 용서하시고 사모하는 하날 나라 주님 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십시오. 자(子) 금성 세덕 성덕 손(孫) 상규’라고 적혀 있다.
망우리공원의 함세덕 가족묘.
한편 함세덕 형제 중 장남인 함금성(咸錦聖)은 함세덕 옆에 묻혀 있었으나 나중에 이장됐다. 부친의 나주 근무 때 태어난 세 살 위의 이복형으로 중동중학을 거쳐 조선의사검정시험에 합격, 인천병원에서 근무하다 1944년 인천 송현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했다. 함금성은 서울신문사가 발행한 대중잡지 ‘선데이서울’ 1968년 12월15일자에 그 이름이 보인다.
“…희한한 신종 인기직업이 하나 생겼다. 태아감별사 … 함금성(咸錦聖)(의사·57)씨… 그 자신 딸만 여섯을 두어 고심하던 중 이 분야의 권위라는 일본의 ‘가기사끼’ 박사를 사숙, 드디어는 그의 이론에 따라 1남을 얻게 됨으로써 용기백배하게 되었다는 것….”
기사 중의 ‘1남’이 비석에 새겨진 단 한 명의 손(孫)상규씨다.
잡초에 묻힌 최학송 무덤
많은 유명인사 묘 입구에 연보비가 서 있지만, 여기 서해(曙海) 최학송의 묘 입구에는 연보비가 없다. 근대 한국 문단의 주류를 차지한 도쿄 유학생 출신의 작가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는 별다른 학벌도 없고, 찢어지게 가난한 작가였을 뿐이다. 밑바닥 삶의 체험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독보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그가 우리 문단과 남한 사회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가입 전력과 작품의 ‘불온성’ 때문이었다. 가족이 이곳에 없는 것도 큰 이유가 됐을 터.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작가 최학송의 무덤이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무덤은 오랜 세월 찾는 이가 없었던 듯 잡초에 뒤덮여 있었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오른쪽으로 가다 27번 전봇대 근처 길가 왼쪽에 연보비 대신 문학비가 서 있다.
‘작가 최학송 문학비 (1901.1.21-1932.7.9). 여기에 최학송(호 曙海)) 선생이 잠들어 있다. 함북 성진 태생인 서해는 일제하 만주와 한반도를 전전하며 곤궁하게 살다 서울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하층민의 현실적 삶을 반영한 소설 ‘고국’ ‘탈출기’ ‘해돋이’ ‘홍염’ 등의 문제작을 남겼다(앞면), 2004년 7월9일 서해 서거 72주기에 우리문학기림회원 이영구 김효자 이명숙 이명재 허형만 고임순 김원중 이응수 하혜정 노영희 임헌영 김성진 홍혜랑 임영봉 곽근 짓고 황재국 써서 함께 세우다.(뒷면)’
최학송의 묘는 동국대 곽근 교수가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의 도움을 얻어 2003년에 찾아내 학계에 알렸고 다음해 우리문학기림회가 묘 입구에 문학비를 세웠다. 우리문학기림회는 1990년 이래 한국문학을 기리고 소외된 문인들의 업적을 선양, 평가해온 문학애호인 모임. 그동안 김우진 홍명희 박화성 조운 이태준 김소운과 심연수 등 18명의 문학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당시 회장이던 이명재 중앙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나온 역사는 매우 소중합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 문단사에 공을 세운 사람이 무척 많지요. 우린 그들을 찾아내고 또 뜻을 기리는 일을 계속할 겁니다.”(2004.8.11. 서울신문 ‘잊혀진 문인의 자취 밝히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문학기림회’ 같은 사적 단체가 개인 돈을 털어서 매년 묘지 관리까지 할 수는 없었을 터. 오랫동안 헐벗었던 최학송의 묘에 사비를 들여 잔디를 입힌 익명의 문인이 있다는 정보를 관리사무소로부터 들었다. 그 후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던 중 그 익명의 문인이 누군지 알게 됐다. 인터넷 다음 카페의 교원문학회에 들어가면 박수진 시인이 쓴 ‘망우리공원 문인묘지 순례기’에 그 익명의 문인이 정종배 시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관련 당국과 산하기관에서는 아직 이런 일을 할 만한 여유가 없는 것일까.
문학비를 바라보며 오른쪽 위로 조금 올라가면 그의 묘가 나온다. 묘비 앞면에 ‘서해최학송지묘’, 뒷면에는 ‘‘그믐밤’ ‘탈출기’ 등 명작을 남기고 간 서해는 유족의 행방도 모르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누웠다가 여기 이장되다. 위원 일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위원 일동’은 시인 김광섭 등으로 이뤄진 이장위원회를 말한다.
불운한 천재 문학가
망우리공원의 최학송 문학비
당시 잡지 ‘동광’은 서해의 사망 기사를 이렇게 다뤘다.
“서해 최학송 군이 죽었다. 누구나 아깝게 아니 여기는 이가 없다. 그는 처음 보따리 하나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20세에 서울로 왔다. 와서 방인근 군이 경영하는 조선문단사에 투신했으나 그 역시 고생살이였다. 조운 군의 여동생과 결혼하였을 때도 세간 하나 없이 살림이라고 시작했다. 중외일보 기자로도 월급 못 받는 달이 받는 달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겨우 좀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니까 그만 세상을 떠났다. 의탁 없는 노모와 슬하의 두 아이를 두고 며칠째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부르짖으며 떠났다고 한다. 그의 훌륭한 천재가 직업 때문에 충분 발휘가 못 되다가 또 요절하였으니 이것은 조선의 막대한 손실이라고 장례에 참석한 이마다 애석히 여기었다.” (1932.8.1 박명의 문인)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먹을 것 걱정하지 않게 된 것도 잠시, 가장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뜨니 아무 경제적 능력이 없는 유족의 고생은 참담한 것이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삼천리’(1933.9.1)에서 한 기자가 유족의 소식을 전하길, “7월 중순이라 재경문인들이 피서를 떠나 추도회는 9월로 미루었는데, 서해의 노모, 약처(弱妻), 유자(幼子)는 모두 두만강변에 가서 산다고 하니 일대의 재인(才人)도 이 참경에 눈이나 감고 누웠는가”라고 했을 정도다.
최학송은 재능뿐 아니라 인간성도 좋았는지 장례는 조선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삼천리’ 1932년 8월호에는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박종화, 김동환 등 많은 문인이 최학송을 추모하는 글을 실었다.
‘빈궁(貧窮)문학’의 최고봉
최학송의 글은 매우 거친 문장이지만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주로 간도에서의 비참한 삶을 생생하게 그린 유일한 작가로 손꼽히는데, 빈곤한 삶에 대한 거친 묘사는 매우 리얼해서 절절하게 전달된다. 그러나 당대 이후로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작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대표작 ‘탈출기’의 주인공은 간도에서 비참한 삶을 산다. 그런 삶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될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이 삶에는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빈곤에는 제도의 문제가 있다. 이 왜곡된 구조하에서 삶의 희망은 없으니, 이를 타파하기 위해선 분연히 총칼을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결심하고 집을 ‘탈출’해 XX단에 가입한다.
여기서 ‘왜곡된 구조’란 ‘일제’를 가리켰지만 후일 북한은 일제 대신에 ‘지주 및 자본가’를 거기에 대입시켜 정치적 목적으로 이 작품을 이용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은 독립운동과 깊게 연계돼 있었고, 실제로 최학송은 공산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은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카프에 가입한 사실을 두고도 이론이 분분하다. 네이버 백과사전(두산백과서전)에는 ‘그의 빈궁문학이 목적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며 1925년의 카프 창설에도 가담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는 반면, 다른 사이트 백과사전에는 ‘1925년에 가입했다’고 기록돼 있다. 문학과지성사의 서해 연보에는 ‘1925년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가 1929년(29세)에 탈퇴’한 것으로 나와 있다.
‘홍염(紅焰)’은 가난 때문에 약값 대신에 딸을 한약방집에 빼앗긴 주인공이 한약방집에 불을 지른다는 내용인데, 빈곤에 처한 하층민의 현실을 리얼하게 반영했다고는 하나, 약방 집에 불을 지르는 설정으로 나간 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투쟁 방향을 선동한 면이 다분하다. ‘목적의식’이 없었다 하더라도 목적적으로 이용당하기 충분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1929년 카프 탈퇴 전에 발표된 것임을 고려해야 할 것이고, 요즘 이런 작품을 읽고 ‘계급투쟁하자’고 분기탱천하는 사람은 없을 터이니, 그는 이제 우리 문학사에서 빈곤을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로 드러낸 독보적인 작가로 평가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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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라면 / 시퍼런 풀죽으로만 알던 아이 / 생일날 하얀 쌀밥을 주었더니 / 싫다고 발버둥 치네 / 밥 달라고 내 가슴을 쥐어뜯네”
이 글은 최학송의 작품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탈북시인 장진성이 지난 4월에 펴낸 시집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에 실린 ‘밥이라면’이라는 시다. 안타깝게도 서해의 궁핍한 가난의 체험은 그의 작품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품 무대이던 북쪽에선 아직도 그런 가난이 현재진행형이다. 부인과 딸을 중국인에게 파는 것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 최학송의 문학을 이용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외치던 그곳은 지금 도대체 누구의 세상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