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리공원 외진 곳에 자리 잡은 함세덕(왼쪽)과 최학송의 무덤 앞 비석.
무덤의 오석(烏石) 비 왼쪽 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15년 5월23일 강화에서 3남 3녀 중 2남으로 출생. 1950년 5월29일 서울에서 전사했다.’
한국 연극사의 한 축
그런데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의 백과사전에는 대부분 1916년생으로 기록돼 있다. 위키백과는 ‘1915년이라는 설도 있다’는 말도 추가해놓았는데, 앞으로 이 비석의 표기를 근거로 수정돼야 할 것이다.
뒷면에는 ‘극작가. 1936년 ‘조선문학(朝鮮文學)’지에 ‘산허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 ‘동승(童僧)’으로 극연좌상(劇硏座賞)을 수상. ‘해연(海燕)’으로 신춘문예 입선. ‘무의도기행(無衣島紀行)’ ‘추장(酋長) 아사베라(‘이사베라’의 오기-필자)’ ‘기미년 3월1일’ ‘태백산맥’ ‘에밀레종’ ‘산적’ ‘대통령’ 등 24편의 작품을 남겼다’는 문장이, 그리고 바로 옆면에는 ‘삶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이다. ‘동승’ 중에서’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러나 작품 ‘동승’이나 희곡집 ‘동승’은 물론, 전집의 모든 작품을 찾아봐도 이런 글은 보이지 않았다. 출처의 확인은 당분간 숙제로 남겨둔다. 어쨌든 손을 내미는 것은 살아 있을 때만이 아니다. 그는 비석을 바라보는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가만히 잡고 그의 일생을 정처 없이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함세덕의 부친은 인천일본어학교를 졸업한 후 나주군과 목포부의 주사로 공직생활을 했다. 함세덕은 인천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의 목포 부주사 시절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후 부친은 공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객주업(거간, 유통업)을 시작했다. 함세덕은 인천에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교)를 졸업했다. 그의 작품에 유난히 바다가 많이 나오는 것은 목포와 인천이라는 지역적인 영향 때문이다.
상업학교 4학년 때는 졸업생 환송을 위해 연극 ‘아리랑 고개’를 공연하며 연극에 대한 꿈을 키웠다. 상업학교 졸업 후에는 남들처럼 안정적인 직장인 은행에 취직하지 않고 서울 충무로의 책방에 취직해 독서와 습작에 열중했다. 1935년 동아일보에 세 편의 시를 투고했고(2월1일 ‘내 고향의 황혼’, 3월19일 ‘저 남국의 이야기를’, 9월27일 ‘저녁’), 책방 손님 김소운(金素雲·시인, 수필가)을 통해 유치진을 알게 되면서 연극계에 들어섰다. 1936년 21세의 나이로 ‘조선문학’에 ‘산허구리’를 발표하며 등단, 1939년 3월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올린 ‘도념(동승의 원제)’의 작가로 크게 주목받았고, 이어 1940년 ‘해연’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극작가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후 함세덕은 유치진과 함께 한국 연극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됐으나, 두 사람은 해방 공간에서 이념적으로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