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7년 대구 출생<br>○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파리 에꼴 데 보자르 수학<br>○제1회 광주비엔날레(1995) 상파울루비엔날레(1998) 시드니비엔나레(1998) 베니스비엔날레(1999) 초청
우리는 외면하고 지나치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의 ‘보따리’를 외면하기는 왠지 쉽지 않다. 그의 보따리는 현존하는 오브제이자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가정이자 허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술의 허구성은 삶의 일상성을 걷어내고 순수한 예술적 대상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김수자의 보따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품 그 자체라는 점에서 여타 작품과 구분된다.
그러나 그의 보따리는 현존성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보따리가 갖는 다양한 의미와 그 변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따리는 단순하게 어느 무엇을 싼 덩어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포장방법인 보따리는 무엇을 싸느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고 모양 또한 변한다. 또 용도를 다하면 천으로 돌아간다.
물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물은 다른 용기에 담기지만 천은 담는 용기 그 자체다. 물은 어느 곳에 담기든 물이라는 고유의 속성을 지니지만 보자기는 내용물에 따라 모양이나 성격이 달라진다. 이처럼 물은 자신을 끝내 잃어버리지 않지만 보자기는 보따리라는 오브제로 변모하면 각각 다른 형상과 모습을 지닌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진 보따리를 통해 김수자는 삶의 영욕,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을 투영시켜 볼 수 있도록 한다.
규방문화 재료 차용
그는 거울을 사용해 공간을 확장시키거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도록 장치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그의 보따리가 관객 하나하나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고안이라고 추측된다.
아무리 더러운 시궁창 물도 자연을,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비춰준다. 비록 더러운 물이지만 물속에 구름이 흘러간다. 때로는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까지 비추어준다. 아름답고 시적이다.
김수자는 물웅덩이의 의미보다는 수면에 비친 풍경이 어떤지를 말하려 할 뿐이며, 관객에게도 웅덩이 물의 맑고 탁함보다는 물에 비친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에 비친 풍경은 언제나 유목민처럼 떠도는 것이지 붙박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김수자가 보따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십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캔버스라는 사각형의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는, 대학원 시절 천이라는 매체와 바늘과 실이라는 전통적 규방문화 재료와 방법론을 차용해 작업을 시도했다. 이런 작업은 당시 한국적 환원주의라는 교조적인 미술풍토에 대한 외면인 동시에 모더니즘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의사(擬似)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회화의 지지체로서 평면의 의미가 강조되던 시절, 평면도 결국은 오브제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평면을 버리고 보다 순수한 평면적 존재에 열중하게 됐다. 당시 삶과 유리된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모더니즘적 사고에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주의를 외치는 사이비 좌파들의 ‘삶의 예술’이 아닌 ‘삶의 진정성’에 방점을 찍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