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보자기로 사람, 자연, 역사를 감싸고 치유

  • 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입력2008-06-09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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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구 모더니즘이 간과한 가치들을 동양적 소재인 보자기를 활용해 새로이 회생시킨 작가 김수자. 그는 일상의 오브제들을 통해 예술과 삶의 경계를 해체할 뿐 아니라 이중적 가치와 경계를 무너뜨리고 위로와 치유, 화해와 관용의 미학을 보여준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1957년 대구 출생<br>○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파리 에꼴 데 보자르 수학<br>○제1회 광주비엔날레(1995) 상파울루비엔날레(1998) 시드니비엔나레(1998) 베니스비엔날레(1999) 초청

    김수자(金守子·51)의 ‘보따리’는 매우 선명하다. 그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는 눈부실 지경이다. 하지만 오브제로서의 선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분명한 메시지나 미학을 던져주지는 않는다. 말을 걸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즉, ‘말 걸기’를 통해 관계를 맺는 것이다. 메시지를 전해주려 하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또 다른 자신을 만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외면하고 지나치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의 ‘보따리’를 외면하기는 왠지 쉽지 않다. 그의 보따리는 현존하는 오브제이자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가정이자 허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술의 허구성은 삶의 일상성을 걷어내고 순수한 예술적 대상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김수자의 보따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품 그 자체라는 점에서 여타 작품과 구분된다.

    그러나 그의 보따리는 현존성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보따리가 갖는 다양한 의미와 그 변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따리는 단순하게 어느 무엇을 싼 덩어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전통적인 포장방법인 보따리는 무엇을 싸느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고 모양 또한 변한다. 또 용도를 다하면 천으로 돌아간다.

    물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물은 다른 용기에 담기지만 천은 담는 용기 그 자체다. 물은 어느 곳에 담기든 물이라는 고유의 속성을 지니지만 보자기는 내용물에 따라 모양이나 성격이 달라진다. 이처럼 물은 자신을 끝내 잃어버리지 않지만 보자기는 보따리라는 오브제로 변모하면 각각 다른 형상과 모습을 지닌다.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가진 보따리를 통해 김수자는 삶의 영욕, 성공과 실패, 희망과 좌절을 투영시켜 볼 수 있도록 한다.

    규방문화 재료 차용



    그는 거울을 사용해 공간을 확장시키거나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도록 장치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는 그의 보따리가 관객 하나하나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고안이라고 추측된다.

    아무리 더러운 시궁창 물도 자연을,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비춰준다. 비록 더러운 물이지만 물속에 구름이 흘러간다. 때로는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까지 비추어준다. 아름답고 시적이다.

    김수자는 물웅덩이의 의미보다는 수면에 비친 풍경이 어떤지를 말하려 할 뿐이며, 관객에게도 웅덩이 물의 맑고 탁함보다는 물에 비친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물에 비친 풍경은 언제나 유목민처럼 떠도는 것이지 붙박이는 아니라는 점이다.

    김수자가 보따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십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캔버스라는 사각형의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그는, 대학원 시절 천이라는 매체와 바늘과 실이라는 전통적 규방문화 재료와 방법론을 차용해 작업을 시도했다. 이런 작업은 당시 한국적 환원주의라는 교조적인 미술풍토에 대한 외면인 동시에 모더니즘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의사(擬似)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회화의 지지체로서 평면의 의미가 강조되던 시절, 평면도 결국은 오브제라는 결론에 이르면서 평면을 버리고 보다 순수한 평면적 존재에 열중하게 됐다. 당시 삶과 유리된 교양 있는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모더니즘적 사고에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주의를 외치는 사이비 좌파들의 ‘삶의 예술’이 아닌 ‘삶의 진정성’에 방점을 찍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나의 사고와 감수성과 행위가 모두 일치하는 은밀하고도 놀라운 일체감을 체험했으며, 묻어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삶의 애정까지도 그 안에 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이 갖는 기본 구조로서의 날실과 씨실, 우리 천의 원초적인 색감, 평면을 넘나들며 꿰매는 행위를 통한 천과의 자기 동일성,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 이 모든 것들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1988년 현대화랑 도록의 ‘작가노트’ 중에서

    이렇게 그의 초기 작업은 천에서 시작됐다. 그에게 천은 일상적인 옷에 다름 아니었다. 옷이란 인간이 부끄러움을 알고 나서 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에게 옷이란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대체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또 옷이란 삶의 조건이자 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옷은 제2의 피부’라는 말처럼 그 사람을 대변하기도 한다. 즉 옷이라는 외피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사람 됨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고인의 옷을 태우는 우리네 관습도 따지고 보면 옷이 갖는 인물의 대체재로서의 의미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서양의 가방, 동양의 보자기

    보자기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보(褓)’ ‘복(?)’ 또는 ‘복(福)’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복(福)자를 쓰는 이유는 보자기를 복을 싸두는 용기의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또 지방별로도 이름이 조금씩 달라 보대, 밥부재, 보재기, 보래기, 포대기, 보자, 보따리 등 다양하게 불린다.

    보자기가 처음에는 무언가를 가리고 덮는 옷의 개념이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보자기인 선암사의 탁자보를 탁의(卓衣)라 하고, 갓난아이를 싸는 천을 강보(襁褓)라 하는 것도 옷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어령은 “서양인은 가방을 만들어냈고 동양인은 보자기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같은 운반용, 포장용 수단이지만 가방은 한 가지 기능만 하는 대신에 보자기는 다양한 목적과 수단을 지닌다. 또 가방은 용도가 없을 때도 자체의 모양과 무게를 지니지만 보자기는 접어두면 된다. 게다가 자신을 위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정한 자기 모양도 없다. 그리고 양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두루 다 쌀 수 있다. 그 자체가 ‘공(空)’인 까닭에 천변만화(千變萬化)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보자기로 김수자는 세계를 싸기 시작했다(The Heaven & the Earth, 1984). 그의 바느질은 연역적 오브제로 이어진다. 그에게 바느질은 바늘을 가지고 천에 구멍을 내어 서로를 잇는 행위였다. 하지만 바느질이란 바늘로 상처를 내는 한편 그 상처를 치유한다는 이율배반적 행동이다. 바느질이란 하나의 행동이 이중적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지게 등 민속적인 농기구들이나 사다리, 빨래걸이 등을 일일이 천으로 싸고 감는 행위(Untitled, 1991)를 통해 당시 물성에 대한 생각을 안료가 아닌 천을 통해 구현하기도 한다. 물질을 에워쌈으로서 새로운 물질로 치환시키는 이러한 작업은 당시 매우 신선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진화를 시작한 김수자의 천과 보자기는 사각의 틀을 벗어나 벽면에 부착되기도 하고(어머니의 땅을 향해, 1990~1991), 바닥에 놓이거나 모서리에 걸쳐지거나 또는 다른 오브제를 감싸면서 새로운 공간(장소)과 만나게 된다. 이 공간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 그리하여 본래의 의미가 사라지고 보자기도 관객도 새로운 관계 속에서 서로를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장소’가 된다(꽃을 향하여, 1992). 이후 이 장소라는 개념은 보따리만큼이나 그의 작품을 결정짓는 뼈대가 된다.

    그의 보자기는 이 장소에 던져진 것처럼 널려 있거나 전시장 벽면의 틈새에 끼워지는 형태의 설치작업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더 이상 천을 자르고 꿰매지 않는다. 대신에 있는 그대로의 천에 최소한의 형태를 부여하는 보따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자신의 작품 ‘Planted Names’ 앞에 선 김수자. ⓒRyan king

    보따리가 된 보자기는 김수자와 여행을 떠난다. 사실 한국의 보따리는 안으로는 포용과 감싸 안음인 동시에 외적으로는 배척과 경계를 상징한다. 보따리의 안은 내 식구지만 밖은 남이다. 하지만 이 경계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보따리를 푼다는 것은 정착과 안식을 뜻하는 정주(定住)를 의미하고, 싼다는 것은 결별과 방랑을 의미하며 유목민의 삶을 의미한다.

    이런 보따리의 양면성은 김수자 작업의 키워드이자 핵심이다. 김수자는 보따리를 통해 일상과 예술을 때로는 동시에, 때로는 분리해서 조망한다. 이런 그의 보따리는 1994년부터 유랑을 떠난다.

    보따리의 이중적 의미

    1993년 ‘연역적 오브제-옷과 천’을 통해 자신의 신체와 옷감의 일체화를 실험했던 그는 퍼포먼스와 비디오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보따리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런 그의 행동은 보따리의 이중적 의미를 확인, 실천하기 위한 실험이자 실천이었다. 이듬해 그는 관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전시장 밖에 옷을 담은 보따리를 쌓아올리더니 이후 경주 옥산서원 계곡에서 이불보를 헤쳐 계곡을 덮었다가 다시 보따리에 사는 퍼포먼스 ‘자연에 눕다’를 통해 전통과 자연이라는 절대적인 환경 속에서 보따리로 상징되는 삶의 의미를 보여주었다.

    자연과 일체를 이루는 설치와 행위는 경주 양동마을과 인천 용유도 백사장에서 다시 환생한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지금 돌이켜 보니 먼 길을 떠나기 전 천지신명께 길 떠나는 것을 고하는 제(祭) 의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의 유랑벽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군인들은 대개 1~2년 단위로 임지가 바뀌는지라 가족들까지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는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단출한 살림살이와 이부자리 두어 채를 보따리에 싸서 떠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쓸쓸한 유랑민의 가장 호사스러운 가재도구는 아마 이불보가 아니었을까. 이불보의 그 처연한 아름다움은 짧은 시간이지만 사귀었던 친구들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친구들에 대한 기대를 아울러 의미하기도 했다. 미지의 장소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보자기의 안과 밖 같은 이중적 구조는 김수자의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분자다.

    그의 보자기는 ‘Sewing into Walking’(1995), ‘Bottari in Deductive Object’(1996)로 이어진다. 또한 화려한 이불보들이 현란한 향연을 이루는 가운데 화려하지만 슬픔이 묻어나오는 ‘Encounter-looking into Sewing’(1998~2002)과 ‘Laundry Women’(2000), ‘A Mirror Women’(2002)으로 이어지면서 놀랄 만큼의 일관성을 지닌 작품들로 우리 앞에 섰다. 즉 그의 작업 여정은 꾸준하게 천과 보따리의 다중적 의미와 그 의미 속에 관계를 맺어가는 관계항으로서의 보따리, 그리고 낯선 장소와 새로운 만남 속에서 빚어지는 긴장과 기대가 점철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보따리가 된 작가

    1990년대 중반부터 김수자는 본격적으로 퍼포먼스와 비디오가 결합된 작품들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비디오작품은 수백개의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11일 동안 전국을 달리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떠도는 도시들-보따리 트럭-2727킬로미터’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비디오작품인 동시에 그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기록물로 그의 작품의 골간을 이루는 유랑(Nomad) 개념의 집합이자 결산이다.

    이 비디오작품에서 작가는 보따리를 실은 화물차 짐칸에 마치 보따리처럼 함께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통해 보따리에 삶을 맡긴 익명의 사람들을 대신해서 표현한다. 그에게 몸은 움직이는 또 하나의 보따리다. 사랑과 욕망, 겸손과 자만, 절제와 욕망, 채움과 비움, 편협과 포용, 이기심과 배려 같은 상충된 현상들이 천의 피부를 통해 안과 밖으로 갈라서는 접점에 그는 그들을 대신해서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움직이는 트럭의 화물칸에서 마치 석고상처럼 움직임이 없는 작가의 뒷모습을 뒤로하면서 주변은 물처럼 흘러간다. 움직이는 것은 트럭인데 마치 주변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과연 진실일까 아니면 착시현상일까.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이러한 비디오작업은 ‘바늘여인’(1999~2001)으로 이어진다. 수만의 인파가 지나가는 도쿄와 상하이, 뉴델리, 뉴욕의 도심에서 인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 있는 작가의 모습과 일본 기타쿠슈의 돌산 위에 비스듬히 누워 안식을 취하는 작가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다. 이어 카이로, 멕시코, 라고스의 도로 위에서 보시를 요구하는 ‘A Beggar Woman’(2000~2001), 뉴델리와 카이로에서 길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A Homeless Woman’(2001), 델리의 바라나시로 유명한 야무르 강가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잡은 ‘A Laundry Woman’(2000)으로 이어진다.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된 ‘A Needle Woman’(2005)도 눈길을 끈다. 네팔의 파탄과 쿠바의 아바나, 예멘의 사나와 예루살렘에서 예의 뒷모습을 보인 채 사람들과 함께 걷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모습을 통해 숭고한 역사와 시간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도시가 갖는 노예무역이라는 치욕스러운 인간의 욕망, 살육과 투쟁, 그리고 역설적으로 평화라는 장소성과 역사성을 김수자는 작품을 통해 일깨워준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화면에 감추어진 인간의 욕망과 절제 사이의 간극은 더욱 넓어지고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놀라움은 더욱 확대된다.

    위로와 치유의 보따리

    이런 그의 박애주의 또는 휴머니즘적 태도는 우리 어머니의 사랑, 희생과도 맥을 같이한다. 인간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재료와 작업 방식을 보고 그를 페미니스트로 규정하지만 그는 작업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교감하고 소통하는 인간의 모습과 삶을 담아낸다.

    김수자는 가해자도 마음의 상처를 입은, 치유해야 할 피해자라는 시각을 갖고 있으며, 불쌍하고 처참하게 희생된 사람들 모두 어루만지고 아픈 상처를 보듬어 안아줄 보자기 같은 넉넉함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서사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서정적이다. 그의 이런 인본주의적인 태도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영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치유의 의미를 갖는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된 중외공원 소나무 숲에 쏟아놓은 2.5t의 헌 옷과 보따리들은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또 1996년 나고야 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Deductive Object-dedicated to my Neighbors’(1996)는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일본과 한국민들을 지배자와 피지배가가 아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본 화해와 상생을 위한 작품이었다. 1999년 48회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d’APERTutto or Bottari Truck in Exile’(1999)는 코소보 내전으로 인한 인종청소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헌정했다.

    때로는 정치적인 발언으로 비치는 이런 작업도 그간의 김수자의 작업에 비춰본다면 겉과 안이 서로 통하는, 즉 호흡해서 그 겉과 안을 구분할 수 없는 보자기처럼 모든 것을 감싸 안으려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의도의 작품은 2000년과 2001년에도 이어진다. 아즈텍 문명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그 위에 건설된 멕시코의 조칼로 광장에서의 비디오작업과 노예무역이라는 인류의 야만적 치부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는 나이지리아의 알파비치에서의 작업들이 그것이다.

    그의 치유와 화해 그리고 관용을 위한 작품은 경우에 따라서는 예술과 일상의 간극을 해체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에든버러의 푸르트마켓 갤러리, 로테르담의 보이닝겐 미술관, 일본의 세타가야 미술관, 2002년 휘트니비엔날레 출품작으로 센트럴파크의 카페테리아에서 보여준 작품이 그렇다.

    김수자는 미술관의 카페테리아나 식당의 테이블에 예의 현란하고 화려한 이불보를 테이블보로 사용했다. 사람들은 그 위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잠자리의 침대 커버로 쓰이는 이불보가 일상이 되어 또 다른 의미소로 전환된 사례다.

    이렇게 그는 일상과 예술의 간극을 넘나들면서 사람들의 고정된 관념을 해방시킨다. 관념과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은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한다. 불안정한 오브제로서 예술작품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지만 이불보를 일상 속 예술로 재구성함으로써 일상의 예술화를 시도한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 안음으로써 모든 역사와 가치를 화해시키는 도구인 그의 보따리는 빛이라는 광대한 보따리로 전이된다. 그는 미국의 치부인 남북전쟁의 발발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모리스 섬 등대를 빛으로 감싸 안는 ‘A lighthouse Women’(2002)으로 노예제도에 희생된 흑인들의 영혼과 이 땅의 원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의 원혼, 남북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혼백을 달래주었다.

    말 걸기와 관계 맺음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A Laundry waman, 2002 ⓒChristian wachter

    빛을 발함으로써 오가는 배들의 충실한 안내자가 되어주었던 등대는 거꾸로 빛의 보따리에 안김으로써 처음으로 빛을 받아 새롭고 찬연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야경에서 역사의 상흔은 사라지고 치유되면서 새롭게 재생된다. 발레시아비엔날레에서는 ‘Solares’(2002)를 통해 거울처럼 맑은 물로 목욕을 시키듯 오래된 건축물의 때를 벗기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2003년 하와이에서 열린 한국이민 100주년 기념전에서 그는 ‘A Mirror Woman; the ground of Nowhere’를 통해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동시에 100년 전의 역사와 오늘을 거울을 통해 이어준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것을 만나지만 그냥 스쳐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외면하기도 한다. 일상은 과거나 현재와 그렇게 깊은 관련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삶이란 일상적인 사물들이 던지는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것인 동시에 ‘말 걸기’이다. 그 ‘말 걸기’에 일상이나 사물과 나 또는 인간과의 관계 맺음이다. 즉 관계란 일상성의 또 다른 말이다. 삶은 그 주변 또는 중심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무는 김수자
    정준모

    1957년 서울 출생

    중앙대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 석사 (미술학)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 국립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덕수궁 미술관장

    現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중앙대·고려대 강사

    논문 : ‘미술품은 땅인가’ ‘제3의 미학, 새로운 출구’ ‘한국의 모던이즘, 모더니즘’ 등


    이렇게 김수자의 말 걸기는 계속된다. 바느질과 싸고 감는 행위는 자연과 인간과 일체를 이루고, 이는 다시 3차원의 보따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보따리는 때에 따라 묶이기도 풀어지기도 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빛이라는 메가 보자기를 통해 종래의 물성과 역사적 의미를 탈색시켜 새로운 치유의 산물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보자기의 겉과 안이 다르지 않듯, 부조리한 것들의 집합체인 모순덩어리 인간의 현현이 김수자의 ‘보따리’다. 보따리는 존재하는 오브제로서의 덩어리이지만 풀어헤치면 한 장의 천으로 돌아가는 이중적 구조가 그의 작품을 이끌어 가는 모체다. 그는 이런 구조를 통해 예술과 삶의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동양적 또는 한국적이라는 신비주의 로컬리즘에 천착하기보다는 서구 모더니즘이 간과한 가치들을 찾아내어 이것들을 새롭게 회생시키는 김수자. 그는 예술적인 삶보다는 삶과 함께하는 일상의 예술을 실천하는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기에 앞으로도 그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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