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생활과 예술 사이, 조선 도자기의 슬픈 역사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입력2008-06-09 18: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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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도 이제 질 높은 식사를 해야 할 때가 됐다. 이런 식사를 하는 상 위에 자신이 직접 만든 도자기를 올려놓으면 어떨까. 혹은 새로운 식사에 걸맞게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공들이 만든 각양각색의 식기 도자기 몇벌쯤 갖춰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유기와 본차이나에 담아 차려낸 전주 비빔밥상.

    지난해 5월 초여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오후, 나는 경기도 이천시의 시립도서관 지하 1층에서 열린 시민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30여 명의 시민에게 한국 옹기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2시간의 강의가 거의 끝나갈 즈음 ‘도자기의 고장, 이천에서 옹기를 다시 생각하다’라는 소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수강생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천시에 거주하는 수강생 가운데 집에 이천 도자기로 된 식기 세트를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내 질문에 수강생들은 매우 당황하면서 답하기를 주저했다. 이천 도자기를 식기로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천’ 하면 도자기로 유명한 곳인데, 시민들이 자기 고장 생산물을 이렇게 홀대해도 될까. 그때 마침 제4회 세계도자비엔날레가 이천시를 비롯해 인근의 여주시와 광주시에서 열렸다. 더욱이 이천시에서는 무려 21회째 ‘이천도자축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고려 말기 학자 목은 이색(穆隱 李穡·1328~1396) 선생이 지은 ‘두죽(豆粥)’이란 시 한 수를 수강생들에게 들려줬다.

    우리나라 풍속에 동지가 되면 팥죽 냄새가 집집마다 풍겨온다네 / 가득 담긴 푸른 그릇 그 색깔이 허공에 떠 있네 / 꿀로 맛을 맞추어 입에 흘려 넣으면 사악한 기운이 씻겨 사라져 뱃속을 적시는구나 / 마을 하늘은 고요하여 새벽빛이 여전히 짙은데 / 어린 계집은 머리 빗어 붉게 화장을 하고 / 집집마다 팥죽을 나르는 아름다운 풍속을 만들어내니 / 백발의 늙은이 마음속에서 즐거움이 가득하네 / 문 닫고 깊이 감추어 두면 그 맛이 더욱 깊어져 / 백 가지 자줏빛과 천 가지 붉은 빛을 품어내네 / 다만 평소에 하는 대로 쫓아 무자맥질을 한다면 / 천지는 다시 원래대로 고요해지네


    시에도 나와 있듯이 ‘두죽’은 다름 아니라 팥죽을 일컫는다. 붉은빛이 사악한 것을 물리치듯 날리는 모습, 새벽녘에 시중을 드는 처녀가 동네를 돌며 그 향을 전하는 풍경, 그리고 이미 늙은 몸이 사악함을 물리치는 팥죽을 먹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자탄(自嘆)을 금치 못하는 목은 선생의 심정이 이 시에 가득 담겨 있다.



    허공에 떠 있는 색깔

    그런데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러한 팥죽이 그 유명한 고려청자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팥죽이 가득 담긴 푸른 그릇에서 뿜어내는 절묘한 색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그 색깔이 허공에 떠 있다고 했겠는가.

    몇 해 전에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분들에게 이 시를 소개하면서 이제 한국 음식도 제대로 된 식기에 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어떻게 비싼 고려청자에 팥죽을 담아서 팔겠느냐”고 항변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될 것은 분명하다. 고려시대 때의 청자는 예술품인 것도 있고, 식기인 것도 있다. 어떤 도자기는 단지 미학적 감상을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또 어떤 도자기는 생활 속에서 실제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마에서 구워졌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도자기’ 하면 무언가 대단한 예술품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조선 도자기의 슬픔’이라고 부른다.

    ‘도자기 만들기를 즐기자’

    지난 2월 말 일본의 기술평론사(技術評論社)란 출판사에서는 제목부터 색다른 시리즈물을 내놓았다. 시리즈 제목은 ‘정년 전에 시작하는 남자의 자유시간’이다. 일본 성인들이 즐기는 각종 취미 중에서 직접 만들 수 있는 주제를 대상으로 삼았다. 철도모형, 진공관 앰프, 정원,불상 조각, 낚시도구 등. 도자기도 그중 하나다. 도자기 편의 책 제목은 ‘도자기 만들기를 즐기자-그릇을 만들어 맛있는 술과 음식을 맛보자’이다. 일본 사람들은 무언가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을 매우 즐긴다. 사회적으로 그것을 적극 권장하는 분위기다. 손으로 직접 만드는 일이 개인적인 취미를 넘어 전문가 못지않은 솜씨를 가진 일명 ‘오타쿠(おたく)’들이 넘쳐난다.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일본 도쿄지역의 정식 상차림과 그릇.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도자기 오타쿠 한 사람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시미즈 유키오(淸水幸夫)라는 40대 중반의 회사원이다. 그는 몇 해 전부터 골동품 도자기를 감상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특히 유약을 도자기 표면에 흘려서 만든 삼채(三彩) 도자기에 매료되어 자신도 한번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3년 전부터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보려고 집 근처에 있는 도예교실을 다녔다. 지난해에는 100V 전원을 사용하는 가정용 전기가마까지 구입했다.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 집 한 채를 따로 마련한 시미즈씨는 아예 ‘도다방(陶茶房) 시미즈(淸水)’라는 작은 간판까지 거실에 매달았다.

    금요일 저녁이면 시미즈씨는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과 저녁식사를 마친 뒤 작업장으로 간다. 점토로 그릇 모양을 서너 개 정도 성형해 말린다. 토요일에는 마른 그릇을 전기가마에서 1차로 굽는다. 그 다음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을 내기 위해 유약을 다양하게 발라본다. 작은 전기가마에서 구울 수 있는 그릇은 4~6개다. 토요일 저녁에 2차로 전기가마에서 그릇을 구워낸다. 작업을 하면서 그가 좋아하는 재즈를 틀어놓고, 말리고 굽는 시간엔 자신이 만든 컵에 담은 커피를 마시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이 책에는 시미즈씨와 같은 이 두 명을 더 소개하고 혼자서 도자기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약 140쪽에 걸쳐서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한다. 비록 전문적인 도자기 가마에서 구워낼 만한 수준 높은 그릇을 만들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나 가족, 혹은 지인들이 사용할 술잔, 밥그릇, 접시 등을 직접 만든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해서 전문가에 버금가는 수준의 기술을 익히면 정년 이후에도 자신만의 직업 아닌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다.

    조리사에서 옹기 장인으로

    전북 진안군 마이산 언저리에 있는 백운면 솥내마을에 가면 40대 중반의 이현배라는 옹기장이가 일하는 가마가 있다. 이현배씨는 대학에서 서양조리기술을 전공하고 서울의 유명 호텔에서 초콜릿을 만들다가 초콜릿과 색깔이 비슷한 옹기에 빠진, ‘먹물 든’ 옹기장인이다. 고향이 장수군인 그는 호텔 조리실에서 일하면서 문득 어릴 때부터 보아온 옹기가 떠올랐다. 결국 1980년대 후반에 호텔 일을 그만두고 고물장사에 나선다. 그 목적은 전국을 다니며 잘생긴 옹기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옹기를 보면서 점차 직접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커져갔다. 마침내 1991년, 전남 승주에 있는 옹기 가마를 찾아간다. 본래 이 가마는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 고(故) 한창기 선생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당시 이 가마에선 ‘남도 전통 옹기쟁이 박나섭의 한평생 “나 죽으믄 이걸로 끄쳐 버리지”’(뿌리깊은나무, 1990)의 주인공 박나섭이 일하고 있었다. 이현배씨는 여기에서 3년여, 그리고 경북 문경의 분청사기 가마에서 1년여 동안을 그릇 만드는 기술을 익히며 보냈다.

    이씨는 박나섭 옹이 생전에 늘 말했듯이 옹기 굽는 일을 ‘흙일’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일이 힘들고 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5년 가까이 흙일 배우기에 빠진 끝에 그는 지금의 솥내마을에 온전하게 남아 있던 가마 하나를 구입했다. 1970년대까지 솥내마을은 옹기 굽는 가마가 3곳이나 있었지만, 이씨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2곳의 가마는 사용하기 어려운 상태로 버려져 있었고, 오로지 한 곳만 재생이 가능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부인의 적극적인 배려로 그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정착, 옹기장이가 됐다.

    호텔에서 양과를 만들던 솜씨와 옹기 굽기 수련과정에서 익힌 기술로 그는 박나섭의 옹기와 닮은, 옛 맛이 진하게 나는 옹기를 만들 수 있었다. 옹기는 청화백자나 고려청자 만드는 과정에 비해 복잡하지 않다. 그렇다고 간단한 것도 아니다. 점토를 물에 담그고 다시 꺼내서 질이 고운 바탕흙을 만드는 것 자체가 흙으로 그릇 빚는 장인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발로 물레를 돌려서 점토로 크고 작은 그릇을 만드는 일 역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면 배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옹기의 냉혹한 현실

    이렇게 성형한 그릇을 그늘에서 잘 말린 후 가마에서 구워내면 질그릇이 된다. 말린 그릇에 유약을 바른 뒤 가마에서 구워내면 옹기라고 부르는 오지그릇이 된다. 이씨의 옹기 가마는 청화백자나 백자를 굽는 가마와 닮았다. 그만큼 크다. 경사진 언덕에 누워 있는 가마에 그릇을 가득 채우려면 적어도 그릇이 500개는 넘어야 한다. 여기에 불을 지펴서 가마 속에 남아 있는 산소를 모두 태우고 나면 흙 그릇은 유약과 산화해 단단해지면서 비로소 색도 그 자태를 드러낸다.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옹기장인 이현배.

    ‘도자기(陶瓷器)’라는 말은 도기와 자기를 함께 묶어 부르는 말이다. 도기를 구울 때는 가마 안의 온도가 800~1100℃가 되며, 자기는 그보다 높아서 1100~1300℃에까지 이른다. 당연히 도기가 자기보다 덜 단단하다. 옹기는 보통 도기에 속한다. 점토가 자기보다 미세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유약으로 특별한 재료를 쓰지도 않는다. 옹기의 표면에 입히는 유약은 짚을 태운 재와 숯가루를 물에 녹인 것이다. 자기를 구울 때처럼 가마 속의 온도를 높이면 모두 깨져버린다. 그래서 옛날 맛 나는 옹기 만드는 일이 자기 만드는 일에 못지 않게 어렵다.

    가스가마에서 구운 광명단(산화납이 들어간 유약)을 바른 옹기가 몸에 좋지 않다는 인식과 함께 생활방식마저 급속하게 바뀐 탓에 1980년대에는 전국의 많은 옹기 가마가 문을 닫았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김치나 된장, 고추장을 옹기에 담아야 좋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여기에 경제 형편이 좋아진 사람들이 옛날 방식으로 만든 옹기를 구입하려고 나섰다. 1993년에는 충남 서산과 전남 보성의 늙은 옹기 장인 두 사람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현배씨의 옹기 가마를 찾는 외지인의 발길도 늘었다. 용기를 얻은 이씨는 2000년부터 서울 인사동이나 경기도 일산 등지의 갤러리에서 옹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큰 고민이 생겨났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데 가장 좋은 재료인 소나무 값은 가솔린보다 더 비싸졌다. 폐목이나 잡목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릇을 성형하고 불을 지피는 일은 정해진 기간 안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일들은 결코 혼자서 하지 못한다. 하지만 숙련된 일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다 소비는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가마에 한번 불을 지피기 위해서 필요한 그릇 500개를 구워내도 잘 팔리지 않는다. 그래서 1년에 몇 번밖에 가마에 불을 지필 수 없고, 그로 인해 옹기 가격을 높게 매길 수밖에 없다.

    근대적 요업의 출발

    2006년 그의 가마에서 만든 뚝배기 한 점의 값은 3만원에서 5만원에 이른다. 광명단을 바른 보통 뚝배기를 마트에서 5000원이면 살 수 있는 소비자에게 이씨가 만든 뚝배기는 가히 예술품에 가깝다. 더욱이 식당이나 가정에서 이렇게 비싼 뚝배기를 사다가 가스 불 위에서 마음대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스테인리스 그릇과 함께 씻고 말릴 수 있을까. 이러한 냉혹한 현실은 그를 백성의 그릇인 옹기를 일종의 예술품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몬다.

    1960년대 이천 도자기 공방에서 사용한 가마는 대부분 옹기를 굽던 곳이다. 이천에서는 옹기를 ‘칠기(漆器)’라고 불렀다. 옻칠을 하는 칠기와 글자는 똑같지만, 그 의미는 검은 그릇이란 뜻으로, 바로 옹기를 가리켰다. 1947년 이천에서 태어나 도자기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어온 엄기환씨에 의하면 1950년대 중반에 옹기를 만드는 공장이 몇 군데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본격적인 이천 도자기 공방은 없었다고 한다. 1955년에 발행된 ‘이천대관(利川大觀)’에는 ‘요업공장’이 4군데 있다고 기록돼 있다. 요업(窯業, ceramic industry)이란 흙을 가마에서 구워 도자기, 벽돌, 기와 따위의 물건을 만드는 공업을 가리킨다. ‘요(窯)’는 가마를 뜻하니 그 역사가 인류의 문명 발생과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요업공장은 도자기를 비롯해 변기, 절연재, 유리, 시멘트 따위를 두루 만드는 공장을 가리킨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대거 추방된 서울의 일본인들은 1883년 이후 남산 아래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만들기 위해 돌아왔다. 이들 중에는 요업 전문가들도 있었다. 집이나 건물을 지으려면 기와와 벽돌이 필요했고, 전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절연물인 ‘뚱딴지’(애자, ·#53163;子)도 많이 필요했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근대적 요업이다. 19세기 말엔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요업공장이 자리를 잡았다. 고려요업·조선요업·경성요업 등의 회사가 식민지 시기의 대표적인 요업공장들.

    고려청자 재현의 꿈

    이들 공장의 사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지만, 그 밑에서 실제 흙을 다루는 장인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이들 중에는 옹기나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도 제법 많았다. 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일대엔 크고 작은 요업공장들이 있었는데, 이들 공장에서는 뚱딴지는 물론이고 술도가에서 쓰는 세무서 검정(檢定)의 옹기 술독, 그리고 지금의 안국동 일대에 개량한옥을 짓는 데 필요한 기와 등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이천 도자기의 명성을 대표하는 해강 유근형(1894~1993) 선생도 대방동의 일본식 도자기 공장에서 그릇 굽는 일을 배웠다. 1930년대에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도자기 공장에서 3년여 동안 일하기도 했다.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조선 도공이 만들었다는 가고시마 류몬지야키의 가마.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 도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남달랐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특히 식기나 변기로 도자기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 이 틈을 이용해 성공한 일본인이 늘어났다고 한다. 평안도 진남포에서 고려청자와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1958~1930)가 그런 사례. 나는 2004년 일본 효고현 이나가와초(猪名川町)에서 그에 대해 처음 알았다. 이나가와초의 향토관 수장고에는 그가 조선에서 만든 요강·유기그릇·제기·식기 등이 보관돼 있었다.

    도미타는 16세 때부터 기와 제조업과 광산노동을 하면서 수학·측량학 등을 공부했다. 곡물가공업과 미곡거래를 하는 회사의 조선지점장으로 조선에 온 그는 조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평양 옆 진남포에서 도미타상회를 열어 공예품 생산과 판매에 주력했다. 이나가와초 향토관에 남아 있는 물건은 조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통영에 칠기전습소를 만들고, 진남포에 고려청자 재현을 위한 요업공장을 운영한 이유는 조선 공예품에 대한 일본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었다. 1차 목표는 장사였던 것이다.

    고려청자에 대한 일본인들의 찬사는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 이전부터 대단했다. 그래서 도미타처럼 이른바 ‘고라이야키(高麗燒)’, 즉 고려청자의 재흥(再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인 중심으로 전개된 고려청자의 재현 의지는 해강 선생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결국 1970년대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됐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천 도자기의 명성은 일제 때 만들어진 이른바 대방동 요업공장 덕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8년에 나온 지정희의 석사논문 ‘한국전승도자의 현황’은 ‘대방동 가마’가 어떻게 이천 수광리에 모이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1955년, 서울 성북동에 ‘한국조형문화연구소’라는 공방이 문을 연다. 하지만 운영난으로 1년도 안 돼 문을 닫는다. 1956년에는 조각가 윤효중 선생이 ‘우리나라 도자공예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실생활에 조화되는 도자기를 만들고자 고려청자·이조백자의 재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로 ‘한국미술품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지를 당시 우리 정부와 사회가 받쳐주지 못했고, 결국 1958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대방동 가마’에서 일했던 일급 조선인 장인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비록 연구소는 문을 닫았지만,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주목한 곳이 지금의 이천 수광리였다.

    모태 배반한 이천 도자기

    수광리에는 당시에도 요업공장이 몇 군데 있었다. 지금은 이천 도자기의 전설로 알려진 인물들이 이들 공장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처음에 옹기 굽는 가마를 이용해 분청사기로 된 화분, 화병, 술병 등을 만들었다. 옹기보다 수익이 많다는 판단에서다. 옹기 가마 주인 홍재표는 대방동 가마 출신인 지순탁, 고영재와 함께 ‘수금도요’라는 공방을 1958년 가을에 개업했다. 수금도요에는 이들 외에도 한국미술품연구소에서 처음으로 그릇 굽는 일을 시작한 현무남, 김흥준, 서인수, 이종열과 같은 젊은 도공들이 있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이천 수광리에선 도자기 공방도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수금도요 공장장 지순탁은 독립해 ‘고려도요’를 설립했고, 고영재 역시 방철주가 설립한 ‘동국요’의 공장장으로 나갔다. 1958년 이후 수금도요는 재일교포 출신인 조소수와 연결돼 일본에 수출을 하면서 제법 호황을 누렸다. 결국 조소수가 수금도요를 인수해 오늘날의 ‘광주요’를 설립했다. 해강 유근형은 1959년에 수광리에 온 이후 옹기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그는 1960년에 고승술이란 사람의 옹기 가마를 빌려 아들 유광열과 함께 ‘해강고려청자연구소’라는 공방을 열고 본격적인 청자 제작에 들어갔다.

    이렇게 모여든 수광리의 도자기 공방들이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1965년의 한일 국교수립. 6·25전쟁 때 미군에 각종 물자를 공급하는 기지 구실을 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은 다시 조선 도자기에 관심을 쏟았다. 일본인들이 특히 주목한 장소는 이천 수광리. 당연히 대방동 가마 출신 장인들이 일하는 공방에서 만들어내는 이른바 ‘전통적’ 도자기의 수요가 날로 넘쳐났다. 동시에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등의 새로운 재료로 만든 식기가 나오면서 옹기의 수요는 급감했다. 결국 수광리의 옹기 가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이천 수광리에서 만드는 도자기는 예술품에 버금가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청화백자, 분청사기 등이 주류를 이뤘다. 서양식 도자기를 주로 만드는 대학 도예과 학생들의 실습장도 수광리에 들어섰다. 오늘날 이천 도자기의 명성은 일제 강점기의 대방동 가마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옳지만, 수광리와 대방동 가마 장인들을 연결시켜준 매개물은 이곳에 있던 옹기 가마였다. 식생활에서 없으면 안 되는 옹기를 굽던 가마에서 예술품 도자기가 나온 셈이다. 미학적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변신이라고 하겠지만, 식기로서 도자기 처지에서 보면 오늘날 이천 도자기는 모태(母胎)를 배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렇다고 이천 도자기가 식기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도자기 자체가 원래부터 식기로 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차를 일상음료로 마시는 한국인은 매우 적었다. 1990년대 이후 차를 마시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소위 ‘다도(茶道)’라는 격식을 강조하는 ‘다구(茶具)’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값비싼 ‘다구’를 선물 받아도 보관해둘 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 이천 도자기는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꼭 필요한 도구로 쓰이지 못할까.

    식기 도자기 유행의 숨은 이유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이천도자축제에 출품된 예술적인 식기 도자기.

    광주요 조태권 회장은 1988년에야 비로소 선친 조소수 선생의 뒤를 이어 도자기 산업에 뛰어들었다. 대기업에서 국제적 세일즈맨으로 일했던 그는 한국도자기나 행남자기 등에서 본차이나(Bone-China) 위주로 제품을 만드는 데 문제를 제기하고, 한국식 도자기를 ‘생활도자기’로 만들겠다는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민속학 연구자를 직원으로 채용해 생활 속에서 도자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고민하게 했다. 조 회장의 ‘생활도자기’ 개념은 2000년 들어 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 성공의 뒤에는 식기 도자기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과시하려는 국내 소비자의 욕구도 숨어 있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격식을 갖추고 사용한 식기는 두 가지 재료로 만든 것이 주종을 이뤘다. 하나는 백자 위주의 자기이고, 다른 하나는 유기(鍮器·놋그릇)다. 백자 식기는 주로 여름에, 유기 식기는 주로 겨울에 사용했다. 특히 유기그릇은 제기(祭器)로 각광받았다. 주나라 때 공자가 정리했다고 알려진 의례서(儀禮書) ‘예기(禮記)’에서 으뜸으로 꼽은 제기가 청동기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각종 의례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예기적(禮記的)’ 삶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당연히 청동기로 된 제기와 식기를 갖추고 싶어했다. 하지만 구리 생산이 여의치 않던 조선 중기까지 청동기로 된 제기는 왕실에서조차 풍부하게 갖추기 어려웠다. 임진왜란 이후 함경도에서 구리가 매장된 곳이 새로 발견되면서 청동기의 변신인 유기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동(銅)을 두드려서 각종 식기를 만들었다. 이것을 ‘방짜유기’라 부른다. 하지만 18세기 이후가 되면 경기도 안성을 중심으로 주물 틀에 동을 녹인 쇳물을 부어 그릇을 만들었다. 방짜유기에 비해 주물유기는 그 생산량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부유한 양반가에서 유기 식기와 수저를 갖추게 됐다.

    그래도 조선 유학자들은 이전에 일상적인 식기로 사용해온 도자기를 버리지 않았다. 왕실은 물론 각 도(道)에는 각종 도자기를 구워내는 관요(官窯)가 자리 잡고 관청과 관리들의 집에서 사용하는 도자기 식기를 만들어 공급했다. 18세기 이후에는 관요에서 기술을 배운 장인들이 사요(私窯)를 만들어 도자기 식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일반 백성들도 이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생활도자기’

    원나라를 세운 몽골인들은 우윳빛의 백자를 선호했다. 조선 선비들 역시 백자를 도자기의 으뜸으로 여겼다. 여기에 푸른색으로 그림과 글씨를 새겨 넣은 청화백자는 조선 중기 이후 도자기 가운데 최고로 꼽혔다. 자연히 백자는 매우 일상적인 조선의 식기가 됐고, 이것이 일제 강점기에 성업한 요업공장에서 구워낸 사기그릇으로 대량생산됐다.

    192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 사무관인 사사키초우(佐佐木忠右)가 작성한, 지금의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의 한 마을을 대상으로 한 사회조사 보고서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식기의 내용을 알 수 있다.

    “상류계급은 유기 혹은 백동(白銅)으로 만든 금속제 식기를 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일반인은 사기그릇을 주로 사용하며, 목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최근 줄어들었다. 식기의 종류로는 보통 밥그릇, 보시기, 접시 등이 있으며 근래 내지(內地·일본)에서 만든 도자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 사람들에게 도자기는 일부 예술품을 빼고 나면 대부분 식기로 여겨졌음이 확인된다. 그러니 당시에 ‘생활도자기’란 용어가 필요치 않았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생활도자기’란 용어는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의 ‘민예(民藝)’라는 개념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 야나기는 1889년, 아버지가 해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근대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서유럽 철학을 전공한 그가 조선 도자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우연한 것이었다. 1914년 야나기는 심령학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조각가 로댕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 그해 어느 날 야나기가 소장한 로댕의 작품을 보기 위해 당시 경성부(京城府) 서대문 공립심상소학교(公立尋常小學校) 교사이던 센카와 하쿠쿄(淺川伯敎)가 찾아왔다. 센카와는 조선의 도자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야나기를 방문하면서 조선백자를 들고 간 것이 이후 야나기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일본 다도를 시현하고 있다.

    야나기가 조선백자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두고 학자들은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친다. 나는 그가 상당히 낭만적인 근대 지식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국가나 민족을 따지지 않고 자신의 심미안에 들기만 하면 그 미술품에 빠져들었다. 야나기에게 로댕과 조선백자는 똑같이 사유의 넓은 바다를 만들어주는 대상물이었다. 그는 조선을 여행하면서 조선 도자기가 가진 일종의 계급성을 발견한다. 즉 조선백자가 왕실에서도, 양반가에서도, 심지어 일반 백성들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비록 품질의 차이는 현격하지만 동일한 범주의 도자기가 상층부에서 하층부까지 두루 식기로 사용된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가 받은 충격은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들고 ‘민중’이 사용한 물건을 개량해 새로운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자는 민예(民藝)운동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그가 1919년 3·1운동 때 일본인 지식인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조선총독부의 야만성을 문제 삼는 글을 일본 신문에 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많은 한국인이 그에게 호감을 갖는다. ‘조선의 미’가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낸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 한국 지식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야나기의 목표는 근대화, 즉 서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일본에서 어떻게 일본적인 아름다움을 생활에서 실천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조선은 그에게 현실이 아닌, 단지 하나의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

    야나기 민예운동의 속살

    야나기의 민예운동이 열매를 맺는 시기는 1930년대였다. 1936년 도쿄에 ‘일본민예관’을 개관하면서 어느 정도 이론적인 무장이 된 ‘민예’의 개념은 사회적 운동으로 자리를 잡는다. 일본 각지에서 생산되던 이름 없는 도공의 그릇을 급속하게 서구식으로 바뀌는 도시 가정의 부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하는 일이 야나기가 펼친 민예운동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민예운동은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성립되어 국민이 주체가 된 시기에 대두한 ‘민중주의’에 서유럽의 미학을 접목시키고, 그 미학의 시각을 이용해 도시민의 생활에서 일본적 미(美)를 실천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행동준칙이었다.

    야나기의 민예운동 덕분에 1930년대 이후 많은 일본인이 민예적 미학을 품은 도자기를 일상생활에서 소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조선 도자기는 그것이 상층부의 것이든 아니면 하층민의 것이든 상관없이 민예가 아닌 ‘조선적 정조(情調)’를 담은 ‘조선의 미’로 부각됐다. 최근 많은 학자가 야나기의 민예운동에 대해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펼친 민예운동은 제국인 일본 국민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지, 결코 조선·오키나와·만주국의 식민지 백성들에게까지 실천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여전히 야나기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의 미’가 지닌 특수성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이 우리가 쓰던 사발그릇을 가지고 가서 국보로 삼았다는 사실에 도취해 있다.

    일본의 조선 도자기

    2006년 일본 동경서적(東京書籍)에서 펴낸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제 중학교 사회과용 교과서 87쪽에 흥미있는 글이 실렸다. 제목은 ‘아리타야키(有田燒)의 루트’.

    아리타야키는 에도시대에 유럽에 수출되어 일본을 대표하는 야키모노(燒き物)가 됐다. 이 아리타야키를 시작한 것은 조선에 군사를 보낸 다이묘(大名)가 연행해 온 도공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우수한 기술이 전해져서 아리타 외에도, 각지에서 명산(名産)이 된 자기(磁器)와 도기(陶器)가 만들어졌다. 사가(佐賀)현 아리타초(有田町)에는 ‘도조(陶祖) 이삼평(李參平)을 기리는 석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다른 말로 ‘차완전쟁(茶碗戰爭)’이라고 부른다. 전국(戰國)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의 전쟁 열기를 잠재우기 어려워 주변국에 편지를 보내 조공을 하라고 협박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수하에 들어온 각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에게 조선에 가서 도자기와 각종 서책 등 경제적 이익이 생기는 물건과 사람을 잡아오자고 권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7년의 전쟁 동안 각종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조선인 3만명 이상이 일본 열도의 각지로 잡혀갔다.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의 도공이 많이 잡혀간 곳이 아리타를 비롯한 규슈(九州) 일대다. 다이묘들은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고령토(高靈土)’라 하는 백토(白土)를 일본 열도에서 구하지 못한 나머지, 조선 도공들을 잡아가면서 조선의 백토도 함께 배에 싣고 갔을 정도였다.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일본 도자기 전시회에 몰려든 관람객.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조선 도공이 도자기의 씨앗을 뿌린 규슈의 유명 도자기는 아리타야키를 비롯해 사가현의 가라쓰야키(唐津燒), 후쿠오카현의 아가노야키(上野燒)와 다카토리야키(高取燒), 나가사키현의 미카와치야키(三川內燒)와 하사미야키(波佐見燒), 구마모토현의 야스시로야키(八代燒), 그리고 가고시마현의 사쓰마야키(薩摩燒) 중에서 나에시로카와계(苗代川系), 다테노계(竪野系), 류몬지계(龍門司系) 등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다이묘들은 잡아온 조선 도공들의 이름이나 성씨, 출신지 등을 대강이라도 적은 문서를 남겨놓았다. 경상도 고령이나 충청도 충주 일대에서 잡혀온 도공들은 주로 관요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며, 전라도 남원이나 경상도 사천·김해·창원 등지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옹기를 굽던 도공들로 여겨진다. 아리타야키·미카와치야키·하사미야키 등이 청화백자 계통의 도자기를 기원으로 삼아 지금까지 그 기술이 내려오는 것도 이곳에 조선의 일급 도공들이 잡혀와 그 터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이묘들은 왜 이다지도 도자기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을까.

    임진왜란과 다도차완

    그들이 갖고 싶었던 도자기는 차를 마시는 데 사용하는 차완(茶碗)이었다. 요사이 일본인들이 마시는 차 중에서 특이한 것은 말차(抹茶)다. 찻잎을 볶아서 약을 만드는 맷돌에 곱게 빻는데 이런 방식은 중국에서 처음 차를 만든 방법이었다. 당나라 때부터 중국인들은 차 마시기를 일상으로 여겼지만, 적어도 송나라 초엽까지는 대부분 말차의 형태로 차를 만들었다. 비록 일본 역사에서 중국의 당나라 때인 헤이안(平安) 시대에도 일부 계층에서 차를 마셨다고 하지만, 그 유행은 12세기 중엽 이후에야 본격화했다. 송나라에 유학을 간 에이사이 선사(榮西 禪師·1141~1215)가 귀국할 때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금의 규슈 나가사키(長崎)시 근처에 심었다. 그가 송나라에서 배운 차 만드는 방법 역시 말차였다.

    이 말차는 ‘조선의 미’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는 사발대접으로 마셔야 제격이다. 에이사이 선사는 불교의 선(禪)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말차 마시기를 권장했다. 그가 쓴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1214)란 책은 차를 마시는 일을 통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깨닫는 데 이르고 수양의 길로 삼으면 된다는 믿음을 확산시켰다. 특히 무사들이 각 지역에서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해 천황을 대신하는 통치집단이 된 가마쿠라(鎌倉) 막부 시대에 에이사이 선사가 소개한 선종(禪宗)은 지역 영주들과 결합되어 지배적 종교로 자리를 잡아갔다.

    14세기 무로마치(室町) 막부 시대에도 선종은 여전히 지배적 종교 노릇을 했다. 이로 인해 선종의 쇼진요리(精進料理·사찰음식)가 지배계층에서 유행했다. 당연히 선종과 밀착된 말차 마시는 관습은 통치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행위로 비쳤다. 끓는 물에 찻잎을 넣는 전차(煎茶) 마시는 습관도 이 시기에 중국 명나라에서 들어왔다. 더욱이 다이묘의 성(城) 아래에는 하급 무사집단과 상인들의 마을인 조카마치(城下町)가 만들어졌고, 이곳에서도 차 마시는 풍속이 유행했다. 이렇게 차 마시는 습관이 보편화하자 지배계층에서는 각종 예법을 접목시킨 ‘다도(茶道)’를 통해 자신들의 독점권을 유지시켰다.

    다이묘들의 독점적 다도에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물건은 다구였다. 다구 중에서도 최고는 ‘가라모노(唐物)’라고 불리던, 중국 도자기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의 다구를 구하기란 매우 어려웠고, 부산의 동래 등지에 있던 왜관(倭館)을 통해 일명 ‘고려차완(高麗茶·#53878;)’을 구입하는 일이 보다 손쉬웠다. 결국 임진왜란을 통해 각 지역의 다이묘들은 자신만이 갖출 수 있는 다구를 자신의 영토에서 직접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해 일본의 도자기는 차를 마시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중반 태평양전쟁을 위한 총동원령 때, 안정적인 후방방어에 충실한 여성을 만들기 위해서 마련된 여학교의 ‘다도교육(茶道敎育)’은 지금까지 도자기를 단순한 예술품이 아닌, 차 마시는 도구로 계속 쓰이도록 만들었다.

    조선 도자기를 다시 식기로!

    아무리 유기그릇에 공자의 학문이 담겨 있다고 해도 여느 한식당에서 내놓는 스테인리스 그릇은 음식맛을 잃게 만든다.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꾹꾹 눌러담은 식당 밥은 정말 맛이 없다. 심지어 냉면을 세숫대야 같은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서 식탁에 얌전하게 내려놓는 아리따운 여종업원이 큰 가위를 들고 “잘라드릴까요?”라고 묻는 광경은 흉측스럽기까지 하다.

    원래 일본인들의 오래된 식기는 목기였다. 옻칠을 한, 예술품에 버금가는 식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간단한 옻칠을 한 그릇들이었다. 뜨거운 음식이 담긴 그릇을 손에 들어도 뜨겁지 않도록 고안된 이 목기 식기는 나무가 많은 아열대 기후에 가까운 일본에서 안성맞춤이었다. 이에 비해 양질의 점토와 백토를 가진 한반도에서는 도자기를 식기로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조선 후기까지 나라나 개인이 운영한 도자기 가마가 지천에 깔리게 됐다. 여기에 옹기의 투박함이 각종 발효음식을 만들어내는 데 쓰였으니, 가히 조선은 ‘도자기의 나라’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금도 식기로 쓰이는 도자기가 집집마다 없지는 않다. 문제는 그 도자기들 대부분이 부인이 혼수품으로 장만해 온 것이라는 데 있다. 1980년대에 유행한 혼수용 식기 도자기 열풍 때 딸자식을 둔 어머니들이 특별히 장만해서 고이고이 잘 보관해둔 이들 도자기 세트가 지금은 유행에 뒤떨어져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특히 한국 주부들은 식기 도자기는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관념이 강하다. 고등학교 가정시간에 배우는 3첩·5첩·7첩·9첩·12첩과 같은 이른바 조선식 상차림 때문이다. 여기에서 ‘첩’이란 뚜껑이 있는 그릇을 가리킨다. 이러한 상차림 방법이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실제로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사실 이러한 규칙은 고대 중국의 예법서인 ‘예기’에 나온다. 이 책에서는 천자의 연회 상에는 한 종류의 음식을 아홉 가지씩 놓도록 규정했다. 그 아래 공경(公卿)과 대부(大夫)에게는 일곱 가지와 다섯 가지의 음식을 차렸다. 가장 말단의 사(士)는 세 가지였다. 이것이 바로 천자의 상차림법인 ‘구정팔궤(九鼎八·#54451;)’다.

    만약 ‘구정’으로도 적다고 판단되면, 여기에 ‘삼정(三鼎)’을 더 보태면 됐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 임금이 드셨다는 ‘12첩 반상(飯床)’의 연원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어떤 문헌에도 임금이 12첩 반상을 먹어야 한다고 규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그릇에 담아 먹을 것인가
    주영하

    1962년 경남 마산 출생

    서강대 사학과 졸업, 한양대 석사 (문화인류학), 중국 중앙민족대학 박사(민족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부교수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규슈 지역 음식문화 현지조사 진행 중

    저서 : ‘음식전쟁 문화전쟁’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음식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역사’ 등


    20세기 초 경북 상주에서 나온 한 집안의 문서에서 이러한 반상차림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교과서에서마저 이러한 반상차림을 가르치고 있으니, 도자기로 된 식기세트를 갖춘다고 해도 이러한 관념에 젖어들어 반상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식기를 상 위에 올려놓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은 백성들을 생각해 자신의 상에 세 가지 이상의 음식을 차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 음식 풍요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도 필요한 미덕임에 틀림없다. 이제 우리도 새로운 질적 식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 질적인 식사를 하는 상 위에 자신이 직접 만든 각종 도자기를 올려놓으면 어떨까. 혹은 새로운 식사에 부응해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공들이 만든 각양각색의 식기 도자기 한두 점을 갖추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 일이 도자기의 고장 이천시에서 자치정부와 시민들, 그리고 도공들이 합심해 시작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이천도자축제’가 더 빛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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