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상가들’
영화는 196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68년은 유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기다. 1968년 5월과 6월 사이 파리는 물론 베를린, 로마, 프라하, 런던에서 대대적인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미국, 뉴델리, 자카르타,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로까지 퍼져나갔다. 수만명의 젊은이가 호치민, 마오쩌둥의 사진을 들고, 체 게바라를 호명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68혁명이라 한다. 베르톨루치가 카메라에 담은 시절은 자유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최고조에 이른 때다. 그들은 “금지를 금지하라”고 외치며 그 금지에 대한 거부감은 온갖 금기시된 것에 대한 저항과 거부로 이어진다.
쌍둥이 여동생 앞에서 자위행위
쌍둥이 남매 이자벨과 테오는 영화광이다. 그들은 매일 시네마테크에 가서 다른 대학생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영화에 빠져든다. 그들 사이에 미국인 유학생 매튜가 들어온다. 쌍둥이 남매와 매튜는 영화와 문화적 기호들을 통해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된다. 그들은 “탄원서가 곧 시이고, 시가 곧 탄원서”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광경에 매튜는 매혹되고 만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모든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는 이자벨과 테오의 성적 방종이다. 그들은 남매이지만 발가벗은 채 함께 잠들고 심지어 이자벨 앞에서 테오는 자위행위를 하기도 한다. 매튜, 테오, 이자벨, 세 사람은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한 후 제목을 맞히는 게임을 하며 성적 판타지와 문화에 대한 갈증을 채워나간다.
그러던 중 게임에 이긴 테오는 매튜와 이자벨이 섹스를 나눠야 한다고 명령한다. 매튜는 당연히 이자벨과 테오가 근친상간을 한, 그러니까 섹스를 나눈 사이였다고 믿고 별 망설임 없이 명령을 이행한다. 하지만 이자벨은 처녀였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매튜의 호기심은 이자벨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자벨과 테오의 행동들, 그러니까 근친상간, 관음증, 자살 충동과 같은 금기시된 성적 코드들을 서슴없이 제시한다. ‘몽상가들’이 2005년 한국에서 개봉됐을 때,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모자이크 처리 없이 상영되어 논란과 놀라움을 불러온 바 있다. 그들의 노출된 성기, 그리고 금기를 위반하는 도발적 섹스는 곧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끊임없이 섹스와 혁명의 이미지를 병렬한다. 그리고 사실상 혁명을 이끄는 힘은 사회가 금기시한 그 모든 성적 욕망의 발현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듯 새로운 문화와 성적 일탈에 빠져들던 그들은 68혁명 당시 시위대에 참여하고, 그들이 참여하는 순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서로의 몸을 탐닉하던 열망이 고스란히 혁명의 힘에 전이된 것이다. 마치 혁명을 위해 장전됐던 탄환처럼 그들의 에너지는 68혁명으로 폭발한다.
이쯤 되면 왜 영화의 제목이 ‘몽상가들’인지 짐작할 만하다. 사실상 역사에 매듭을 지어준 혁명적 사건들은 햄릿형 인간들의 사려 깊은 반성의 결과가 아닌 막연히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몽상가들의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행동은 치기 어리고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목적이 없는 것이기에 더욱 순수하고 강렬하다.
노(老)감독은 혁명이란 계산 없는 돌진이며 투신이라는 사실을 이 세 젊은이를 통해 보여준다. 스무 살 남짓의 젊은 몸이기에 성기가 노출된 장면도 아름답고 가슴 뛴다. 그렇기에 맨몸으로 뒹굴어도 부끄러움이나 모멸감이 일지 않는다. 그들은 젊기에 아름답고 그 젊음이 잉태한 혁명의 에너지는 순전히 ‘다른 삶’을 원하는 것이기에 빛난다.
순결한 몽상가들의 혁명과 꿈은 미숙했기에 열정적이고 아름답다. 그곳에는 인류의 오래된 도덕으로 가늠할 수 없는 변혁을 위한 열정이 놓여 있다. 68세대 당사자이기도 한 베르톨루치 감독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 당시를 회고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마음껏 영화에 미치고 문화에 매료되고 정치와 철학이 모두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수렴되던 시절, 청춘은 곧 혁명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