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가 노리오 소니 전 명예회장(위)과 혼다 소이치로 혼다 창업주(왼쪽).
2003년 여름, 일본에서의 일이다. 이 월급쟁이 사장은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세계적인 기업 소니의 전 총수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기업 CEO 중에는 물러나면서 거액을 챙기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일본에서는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것을 몽땅 사회에 환원한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 갑론을박이 일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액의 퇴직 위로금이 서민들 정서와 맞겠느냐”며 슬며시 트집을 잡는 딸보 같은 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청춘을 바쳐 한 직장에서 반세기를 근무했고, 중역이 된 뒤 사장을 거쳐 명예회장에 오르기까지 30년 동안 소니 매출이 30배나 늘었으니 합당한 액수라는 반론도 나왔다. 심지어는 거액을 몽땅 공익사업에 내놓은 선행을 두고 자녀가 없는 탓에 가능했다고 은근히 폄하하는 수다쟁이까지 나타났다.
설왕설래가 있거나 말거나, 노리오는 퇴직 위로금 전액을 공공시설이 들어설 지방자치단체(나가노현 가루이자와)로 회사가 직접 송금하도록 했다. 기업이나 개인이 지자체에 기부할 경우 세금이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하면 현행법에서는 소니가 퇴직 위로금으로 회계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심정에 정부 당국에 특별 배려를 요청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도리 없이 4억엔 가까이 세금을 물었다. 이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예산이 줄어드는 바람에 노리오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공공시설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당돌한 대학생

오가 노리오 소니 전 명예회장
노리오는 1930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목재상이어서 여유가 있었던지 그는 진로를 예술 쪽으로 잡았다. 고향에서 고교 과정을 마친 다음 명문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로 진학했다. 그는 바리톤이었다. 재학 중 소니의 전신(前身)인 도쿄통신공업사가 만든 테이프리코더를 연습 기재로 구입했는데 성능에 하자가 있었다. 노리오는 테이프리코더를 들고 곧장 회사로 찾아가 항의했다. 거기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도쿄통신공업은 일본 패전 이듬해 문을 열었다.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된 가운데 오늘날 ‘천재 기술자’와 ‘천재 경영자’로 일컬어지는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콤비가 손을 잡고 트랜지스터 개발을 목표로 창업한 기업이었다.
두 사람은 회사로까지 찾아와 거침없이 불만을 터뜨리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대학생의 지적에 귀 기울였다. 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인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풋내기 중소기업 처지에서 이 예술대학 학생이 마음에 쏙 들었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노리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성악은 성악대로 하고, 짬이 날 때마다 우리 회사에 와서 함께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