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고등학교 전경과 인촌 김성수 동상.
바로 그 중앙고등학교가 올해 6월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중앙 100년사(史)’는 국권(國權)을 상실한 일제(日帝) 강점기부터 광복과 6·25전쟁, 경제발전 시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욕(榮辱)이 엇갈렸던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 3·1운동, 6·10만세운동 등 중요한 고비마다 중앙학교의 인물들이 있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중앙 출신들의 자긍심(自矜心)의 원천이 되고 있다. 중앙의 전통에 씨앗을 뿌리고 키운 인물들과 그들에 얽힌 에피소드, 그리고 이제 개교 100년을 맞는 중앙의 청사진을 살펴본다.
# 유일한 민족 민립(民立) 교육기관으로 출발
중앙학교의 역사는 1908년 1월 경기도·충청도 출신의 우국지사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로부터 비롯됐다. 당시는 을사늑약(乙巳勒約·1905) 체결로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던 시절이었다. 민족 선각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가능한 일은 신교육, 신문화의 계몽을 통해 후학을 양성하고 실력을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해 이런저런 학회와 학교를 조직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었다.
기호흥학회는 같은 해 6월 신문에 학생모집 광고를 내고 ‘기호학교’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6월20일 한성 북부 소격동 학회 건물에서 열린 개교식에는 입학생 90명과 함께 수많은 학회 관계자와 시민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일부 뜻있는 인사들의 출연금(出捐金)만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기호학교는 1910년 9월 융희(隆熙)학교와 합병한다. 융희학교는 개화선각자 유길준(兪吉濬) 선생이 주축이 되어 1907년에 조직된 흥사단(興士團)이 세운 학교인데, 두 학교 모두 경영난으로 존속이 여의치 않게 되자 합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와 함께 같은 해 11월 호남(湖南)학회, 교남(嶠南)교육회, 관동(關東)학회도 기호흥학회와 합쳐져 중앙학회로 개칭(改稱)하고, 학교 이름도 ‘사립중앙학교’로 바꾸었다.
“중앙학교는 한 개인이 사재(私財)를 털어 만든 사립학교도 아니고, 외국인이 선교 목적으로 세운 학교도 아니다. 민족 선각자들의 모금(募金)으로 세워진 특별한 학교다. 학교 설립을 위해 전국의 민족지도자와 지역 단위 학회들이 하나로 뭉친 예는 전 세계적으로 중앙학교가 유일하다.”
학교 태동기의 역사와 관련한 중앙교우회(中央校友會) 측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