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상처의 거울, 고통의 예방주사 공지영

“눈빛 없는 눈빛을 갖고 싶어요,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내는…”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8-06-10 1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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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베스트셀러들만큼이나 많은 화제를 모은 공지영은 얼굴 혈색이 부드럽고 투명하며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 건강해 보였다. 그간 왜 그리 안달복달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상처는 치유를 통해 존재하는 법. 고통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깨닫고 평화와 자유를 얻은 그녀의 아우라.
    상처의 거울, 고통의 예방주사 공지영
    공지영(孔枝泳·45)을 만났다. 아주 오랜만이다. 우린 딱히 약속을 해서 만나는 사이가 아니어서, 이런저런 모임에서 어울리다가 잠시 합석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수년 전, 누군가의 출판기념회 아니면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 자리였던 듯싶다. 최재봉·조용호 기자를 비롯해 소설가 김훈·권지혜, 화가 남궁산 등 많은 사람이 혜화동의 한 밥집에서 어울렸다. 그녀는 오랜만의 외출이라고 했다. 그녀는 지쳐 보였고 안색이 어두웠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말했다.

    “난 다산(多産) 작가가 될 거야. 많이 쓸 거야. 이제부터 많이 쓸 거야. 난 가장이야. 애들하고 같이 살아야 돼.”

    그녀는 많이 취했고, 이 말은 우리들 중 누구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들이 공중에 흩어져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밥집에서 폭탄주가 날아다녔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졌다. 만취해 그 흥에 겨워 사람들은 노래방으로 갔다. 나는 그 자리를 몰래 빠져나왔다. 피곤하고 힘겨웠다.

    그 후로 그녀는 자신의 그 ‘말’대로 했다. 멀리 떨어져서 그녀가 내는 책을 사서 읽고, 이런저런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녀는 무섭고 뜨겁고 아름다웠다. 독자로서 그녀의 책을 읽다 보면 그녀의 인생 후반부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집필실 없는 주부작가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살다 보니 둘 다 이제는 중년이고 나이를 먹었다. 홍대 앞의 복집에서 복지리를 먹었다. 식당 여주인이 그녀의 독자였다. 주인집 아들이 어머니에게 사인을 해줬으면 했는데, 여주인은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면서 나중에 하자고 했다. 나이 든 여주인은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밥을 먹으면서 공지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젊어서 만난 친구들이 평생 가는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하니 그렇다. 문단이라는 좁은 바닥에서 젊어 만나 오랫동안 가난한 마음을 나눈 사람들. 한 해 한두 번 보는 사람들인데도 만나면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친근감이 든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기 위해 노트와 연필을 꺼내자 자신도 연필을 깎아 쓴다고 한다. 그리고 ‘애들’은 샤프를 쓴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애들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왔다. 그녀는 전업작가가 아니라 주부작가다. 세 아이를 키우는 주부작가. 그래서 따로 집필실이 없다.

    작업량 때문에 한두 번 집필실을 마련해봤는데 효용성이 없었고, 세 아이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요즈음 그녀는 분당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글을 쓴다. 반 농담 삼아 일산으로 이사를 오라고 하니 토끼 눈을 뜨고 고개를 흔든다. 워낙 문인이 많고 술자리가 많은 동네다. 일산으로 오면 공지영은 고달플 것이다. 고래 같은 술꾼들이 바다 같은 그녀에게 풍덩풍덩 뛰어들 것이다. 그래서 말을 바꾸어 그녀에게 한국 문학을 위해 절대 일산으로 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침 박경리 선생이 위독하셨다(이 원고를 탈고한 오늘-5월6일-별세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선생은 생전에 ‘토지’ 주인공들에 대한 말을 하면서 “이 땅에 발을 디딘 모든 사람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하셨다). 그녀는 박경리 선생의 책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고 했다. 공지영 소설의 스승인 셈이다. 하지만 자주 뵙지는 못했고, 소설가 강석경과 한두 번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자주 뵙고 싶은데 워낙 어려운 분이라서 그러질 못한다고 했다.

    얼굴은 몸의 거울

    상처의 거울, 고통의 예방주사 공지영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13만부를 발행했다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이야기가 나왔다. 자신도 독자의 반응이 이렇게 크리라곤 ‘정말’ 생각하지 못했고, 자신이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하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 산문집의 연장선상에 있는 장편소설 ‘즐거운 나의 집’ 역시 독자가 많이 찾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많은 독자를 가진 이 작가가 의외의 말을 했다.

    “‘즐거운 나의 집’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지요. 그래서 숨지 않고 적극적으로 홍보했어요. 예전에는 잘 안했어요. 출판사 생각해서 한두 번 하는 정도. 하지만 내 몸이 바쁘고 고달프더라도 홍보가 소설 쓰기의 마지막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지요.”

    작가가 책을 내면 아프다. 그래서 출간을 산고(産苦)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무리 작은 책이라도, 설령 이전에 써놓은 원고를 고스란히 내기만 해도 책을 내고 나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외롭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을 내고 나서 어디론가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 있을 때가 휴식시간이다. 전화도 잘 받지 않는다. 쉬고 싶은 것이다. 공지영도 한두 달 더 있다가 만날 걸 그랬나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런 단계를 벗어난 모양이다. 책을 위해 독자와 만나는 시간도 글쓰기의 일부로 본다.

    공지영을 미인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나는 그걸 잘 몰랐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미인”이라고 하자 “내가 힘들 때만 만났으니 그럴 거예요” 하며 웃는다. 하긴 사람의 얼굴이라는 거, 그건 거울이다. 마음의 거울이 아니라 내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내 몸의 거울이다. 내 일상의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낸다. 거슬러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다. 지금 공지영은 얼굴 혈색이 부드럽고 투명하며, 온몸에 에너지가 넘쳐 건강해 보였다. 아름답다는 건 좋은 거다.

    “아름다움은 본능적인 욕구인 것 같아요. 마치 이야기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처럼 말이죠. 과학적으로는 어떤지 잘 모르지만, 우리들의 유전자 속에 그런 인자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강동원 이야기를 꺼냈다. 촬영을 위해 강동원을 비롯한 배우들과 구치소를 방문하고 식사하고 술 마시고 하는 사이 어느 순간에 강동원에게 자꾸 눈길이 가서 신경이 쓰였단다.

    그 친구,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공지영의 눈길을 끌다니 살짝 질투가 난다. 남녀를 불문하고 미남미녀는 신과 자연의 혜택을 받은 존재다. 우리는 인간들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존재가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도 나눴다. 아이들에게는 미남미녀의 기준이 없다. 옹알이를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냥 눈길이 간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아이들의 외모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천의무봉, 순진무구, 절대선의 모습이 옹알이를 하는 아이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런 외모와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되고 마음자리를 살피게 된다.

    ‘정말 경지를 이룬 눈빛’

    “여대생들에게 강연할 때 제가 그랬어요. 지금 우리는 80세 정도를 살지만, 너희 세대는 아마도 100세를 살 것이다. 성형수술 잘 해봤자 60세 넘어가면 안면근육의 자연복원력으로 형태가 일그러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삶을 잘 살아야 된다. 진부하지만 내면을 잘 다뤄야 예뻐진다.”

    아름다움은 분명 사람들을 매혹하지만, 잘생긴 사람들이 잘못 살아서 망가지면 더 추해진다. 하지만 그리 미남이라고 할 수 없는 김수환 추기경이나 고승대덕들의 빛나는 얼굴이 진정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들은 젊은 시절 미남이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내면의 빛이 얼굴에서 스며나와 환하게 아름답다. 이런 분들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한다.

    “어떤 친구는 굉장히 잘생긴 사람이었는데 얼마 전에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동안 사는 게 엉망진창이었던 거죠. 정말 처음엔 못 알아볼 정도였어요. 마치 짐승같이 말이죠. 그래서 아름다움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거라고 믿게 됐지요.”

    상처의 거울, 고통의 예방주사 공지영
    반대로 어떤 친구는 땅딸보에다 외모가 별볼일 없었는데, 다시 만나 보니 너무 잘생겨져서 놀랐다고 했다. 그동안 참 잘 산 거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이력서이고, 그 사람이 갈 길의 이정표다. 그녀는 요즘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이렇게 자유로운 시간을 두고 그간 자신이 왜 그리 안달복달하면서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무서운 마음도 들어요.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을 잘 살펴보는 거죠. 책상 앞에 거울을 놓고 내 눈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봅니다. 눈빛이 반짝반짝 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정말 경지를 이룬 눈빛엔 눈빛이 없대요. 그냥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내는 거죠. 그런 눈빛을 가졌으면 해요.”

    그런 의미라면 그간 공지영은 참 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구설이 있어도 그것의 진위는 바로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얼굴 이야기를 하다가 장편소설 ‘고등어’ 쓸 무렵을 생각해냈다.

    공지영이 ‘고등어’를 낼 때 나는 그 출판사의 팀장이었다. 책 표지에 쓰기 위해 공지영의 사진을 찍은 사진부장이 말하길, “사진 찍기 참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웅진출판사에서 나온 그 책을 보면 공지영이 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컷이 뒷표지에 실려 있다. 그 사진은 공지영이 촬영을 마치고 차를 타고 가기 전에 별 생각 없이 찍은 것이었다. 결국 그 사진을 표지 사진으로 골랐다. 그녀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땐 사진 찍기가 싫었어요. 너무 속을 앓아서인지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거 있죠. 아직도 불뚝불뚝 그 시절 생각이 나면 화가 나요.”

    평범함과 비범함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피부에 난 상처는 의학적으로 완전히 지울 수 없다. 그저 가릴 뿐이다. 그녀의 문학과 인생은 상처를 통해서 말할 수 있으리라.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녀를 알기 위해선 우선 상처와 치유를 알아야 한다.

    “가끔 저에게 묻지요. 너 누구니? 그리고 내가 대답하죠. 너 참 못 사는구나.”

    그래도 힘든 걸 잘 견딘 삶이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오름의 힘듦은 견딜 만한데 누가 앞에서 밀면 더 힘들잖아요. 그럴 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하죠.”

    이 문장은 그녀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바위덩어리를 밀어 올리면서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그 앞을 가로막거나 오히려 밀어버린다면 신화 속의 천하장사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를 놓고 얘기했다. 한 기자가 “당신은 평범하지 않은 청년기를 보냈다고 들었다”고 하자 코엘료는 이렇게 말했다.

    “열일곱 살 때 나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난 체 게바라와 같은 급진적인 혁명가에 심취해 있었다. 엄격한 부모는 그런 나를 미쳤다고 판단했다. 퇴원한 뒤 내 마음은 황량했다. 부모조차 사랑해 주지 않은 자식이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약에 손댔고 자살을 시도했다. 네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이 정도면 평범한 것 아닌가(웃음).”

    그 정도면 평범한 것인가. 그런가 싶기도 하다. 오히려 작가로서는 나 같은 범생이가 처참하게 비범한 것이 아닌가 싶다. 평범함과 비범함은 작가의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라면 소설로, 시인이라면 시로, 화가라면 그림으로 나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그저 평범한 것이다. 그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바꾸는 것이 그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예술가에게는 더욱 그렇다. 소설가로서 공지영은 비범하지만, 사생활은 아주 평범한 여자다. 주위를 한번 객관적으로 돌아보라. 공지영의 사생활이 코엘료나 황석영 선생에 비해서 그리 비범한가. 그리고 헤세, 브레이트, 릴케, 상드에 비해서 그리 비범한가. 이들의 평범한 삶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이야기한다.

    엄마와 딸 사이, 금단의 영역

    상처의 거울, 고통의 예방주사 공지영
    그녀가 서른일곱 살 무렵, 어느 날 성당에서 눈물로 기도를 하면서 신에게 물었다.

    “하느님, 사랑이 뭔지 저에게 가르쳐주세요. 저는 아직까지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제발 저에게 사랑이 뭔지 가르쳐주세요.”

    신의 응답은 무엇이었을까. 아쉽게도 신은 기도하는 자에게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직답을 주지는 않는다. 간혹 그러한 직답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은 이미 모든 대답을 ‘말씀’으로 해주었다. 인간이 그것을 읽어내지 못할 따름이다. 공지영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본질은 타인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놔두는 거, 그냥 그대로 두고 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이렇게 했으면, 저렇게 했으면 할 때가 있지요. 그건 자신의 마음일 뿐 사랑이 아닌 거 같아요. 그냥 아이들 생긴 대로 두고 보는 거, 그 녀석이 어떤 삶을 살든 응원해주는 거….”

    아이들이나 사랑하는 어떤 대상이 너무 모자라고 설렁 엉망진창일지라도 곁에서 두고 보고, 그리고 언제든지 내 품으로 달려오면 받아주고 갈 때는 가게 두고 보면서 지켜주는 것이다. 그냥 품고서 ‘냅둔다.’ 세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면서 묵묵히 지켜보며 이러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산문집 제목이 탄생했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이 제목은 울림이 컸다. 그녀는 사랑을 세 아이를 통해서 배웠다고 했다. 시쳇말로 남녀관계는 헤어지면 그만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그녀가 첫째딸을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 딸은 그녀에게 “엄마라기보다는 나이 든 좋은 여자를 만난 것 같다”고 했단다. 긴 세월에 서로 성숙한 것이다.

    첫째딸은 매사에 사려 깊어서 공지영이 많이 의지하는 눈치였다.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의 진정한 친구 같은 존재. 남성으로서 아버지로서 딸과 엄마의 관계를 보면 질투가 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아빠라도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모녀관계에는 있다. 아옹다옹하는 것 같으면서도 둘이 손잡고 걸어가는 걸 보면 모녀관계는 참 위대해 보이기도 했다.

    딸 위녕은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뭐든 열렬하게 하는 사람이다. 엄마 옆에 가면 뜨겁다.”

    그녀는 아이가 고생을 많이 해서 노인네 같은 구석이 있다고 한다. 엄마와는 결이 다른 아픔을 통해 더 성숙하고 사려 깊어진 딸에게 이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했다. 인간의 몸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젊음이라고 부르는 이십대를 고비로 천천히 늙고 병들어간다. 하지만 인간의 영원은 향일성의 식물처럼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그것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이제는 이 모녀가 서로의 마음을 향한 별빛이나 햇볕이 됐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면서 빛을 던져주는 거, 그걸 사랑이라고 한다.

    모든 행위엔 대가가 있다

    모든 행위에는 대가가 있다. 그걸 즐겁게 치르느냐, 고통스럽게 치르느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녀는 그 고통 속으로 빨려들어가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다음에 보는 첫 빛, 그 빛나는 환희는 절대고독, 모든 것을 다 버린 자에게 찾아오는 ‘거시기’의 눈빛과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상태를 만들어준 것 중에 그녀를 향한 독자의 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주목하고 성원해주는 사람들이 그녀 곁에는 가득하다.

    그녀의 모든 책 중에서 ‘…너를 응원할 것이다’가 독자의 반응이 가장 빨랐다.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많은 젊은 독자가 제목만 보고 집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요즘 애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마치 엄마와 같은 심경이었다.

    상처의 거울, 고통의 예방주사 공지영
    “어떤 독자는 책을 사들고 와서는 책 제목을 그대로 적어달라고 했어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성공하려면 정형화한 ‘어떤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강요하는 시대에 그녀의 아픔은 독자와 완전히 공감한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가만히 살펴보면 시대의 아픔과 독자의 아픔을 고스란히 같이 나눌 때가 많다.

    작가로서의 아픔이 바로 시대의 아픔이 됐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행운이다. 한 시대가 지나가고 나서도 공감되는 작품도 있고, 수세기가 흘러도 공감되는 작품이 있다. 이른바 클래식이 그렇다. 그리고 동시대와 수세기를 같이 감동시키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고흐 같은 이들도 있다. 공지영은 아직 진행형이기에 아무도 그녀의 작품에 대한 평가를 완전하게 내릴 수는 없다.

    그녀의 작품들은 소설이건 산문이건 간에 독자와 교감의 폭이 넓다. 딱히 책이 많이 나가서 하는 말이 아니다. ‘즐거운 나의 집’을 냈을 때도 독자 사인회에서 스물일곱 살 먹은 아가씨가 “저희 엄마도 선생님 같았어요. 저는 엄마를 정말 미워했었지요. 그런데 이젠 안 그럴 거예요”라고 했단다. 가슴이 울컥했다.

    “내가 잘 하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남에게 힘이 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죽을 것 같았던 내 생활이 없었다면 나 역시 타인을 색안경을 끼고 봤겠죠. 이젠 내가 겪은 일들에 무척 감사합니다. 과거엔 고통에 겨운 나머지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느냐고 하느님에게 삿대질을 했어요. 하지만 이젠 감사하는 마음을 드립니다. 내 경험을 통해 인간의 고통에 감정이입이 가능해진 거지요.”

    고통은 그녀에게 인간의 폭을 넓게 했고,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줬다. 고통은 잘 받아내면 거름이 된다. 고통이 위험한 것은 자칫 잘못하면 사람이 꼬이고 냉소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녀는 아이들과 더불어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

    “이젠 저에 관한 악플도 편안해요. 오히려 칭찬보다 나을 때도 있지요. 누가 제게 뭐라고 해도 상처 안 받아요.”

    그녀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도 만났다. 그녀의 모든 일이 가식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말에 상처 받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더 충실해지기를, 욕하기보다는 위로하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자신에게 엄격하다면 타인에게 너그러워진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진정성이 없는 ‘나’보다 더 나쁜 ‘타인’은 없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확연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녀에겐 완전히 몰두하는 사람, 그것이 고통이든 일이든 사랑이든 완전히 몰두하는 사람만이 보여주는 후광이 있다. 그것이 공지영을 빛나게 한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그 아우라에 빠져들었다.

    지옥의 풍경

    나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 ‘별들의 들판’을 사랑한다. 이 작품으로 공지영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 작품집의 탄생 배경을 듣고서야 나는 작가를 사랑하는 독자의 마음을 알게 됐다. 진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진 작품은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는다. 마치 깨달음의 한 구절을 얻기 위해 석가모니가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바치는 것과도 같다(석가는 전생에 한 마디의 법어를 위해 목숨을 버린 수도승의 삶을 살기도 했다). 얻고 싶다면 버려라, 모든 걸 다 얻고 싶다면 너의 모든 걸 버려라, 살고 싶다면 죽어라, 사랑하고 싶다면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작가로서 7년간의 공백기가 있었어요. 처음엔 너무 지쳐서 그저 조금 쉬려고 했을 뿐이었죠. 단 한 글자도 쓰지 말고 조금 쉬었다 쓰자, 그러다 7년이 흘렀어요. 그 기간에는 정말 글 쓰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어요. 그저 숨쉬는 게 고마울 지경이었지요. 몸과 영혼이 산산조각 나버려서 살기기 힘겨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글을 쓰려는데 어머, 어쩌면 한 자도 못 쓰겠는 거예요. 머릿속에는 묘사하고 싶은 장소와 주인공, 이야기가 맴도는데 손끝으로 흘러나오질 않았어요. 내가 소설가 공지영 맞나 싶을 정도로.”

    겨우 몇 문장을 써도 문장과 문장이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서로 이어지질 않았다. 그 과정에서 한 자, 한 자 심혈을 기울여 쓴 소설들이 책으로 나온 게 바로 ‘별들의 들판’이다. 6개월 동안 끙끙대며 겨우겨우 단편 한 편을 쓰고 나서야 감을 잡았다고 한다. 이 책은 공지영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에서 가장 힘겹게 쓴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히 슬럼프라고 하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나 무겁고 무서운 것이어서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기간을 지우려고 하나 봐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뭘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칠판에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듯,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때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유럽 여행을 갔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겨우 흑백영화의 몇 컷 정도로만 남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잘 모르는 출판사 사장이 계약서 한 장을 들고 분에 겨워 공지영을 찾았다. 처음엔 사기꾼인가 싶었다고 한다. 지명도가 있으니 간혹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계약서를 보니 위조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의 필적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바로 그 기간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기간은 그렇게 지우고 싶은 것이었다.

    “얼마 전에 그때 보낸 전자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언니 요새 이렇게 지내고 있어’라는 단순한 문장들이었어요. 그때 얼마나 울었고 얼마나 끔찍했는지 떠올라 혼났어요. 정말 끔찍했지요. 지옥의 풍경이 그럴까 싶었어요.”

    아프고 즐거운 사춘기

    거기에서 빠져나오자 그녀는 다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술을 많이 마셨다. 아마도 내가 그즈음에 여러 사람과 어울려 그녀를 보았던 것 같다. 폭음을 했고, 이야기를 많이 했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그때 막 퇴원한 환자였다. 그때 그녀가 가진 불안감의 정체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겨우겨우 눈치를 챌 따름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고통을 알기 전까지는 섣불리 이런저런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뭐라고 충고해서도 안 된다. 그녀 말대로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으리라.

    그녀는 아이가 엄마인 자신을 속이고, 학원을 빼먹고 놀러가고 요리조리 속을 썩일 때 가까운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때 언니는 “지영아, 누구나 사춘기는 겪어. 멀리 보고 지금 네 마음을 좀 다스려’라는 충고를 해줬다고 한다. 가만 생각하니 아이들이 자기를 닮아서 반항하고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다면서 웃었다. 그러면서 참으로 여자답게, 엄마다운 말을 했다

    “요즘 엄마 생각이 자주 나요. ‘너도 자식 낳아봐라’ 하시던 마음이 읽혀요. 그리고 몸만 건강하면 된다고 위로해주던 말씀도 떠오르고.”

    누구나 사춘기를 겪는다. 그리고 마흔을 지나면서 또 사춘기를 겪는다. 뭔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 지금의 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자각,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사춘기는 다가온다. 들판의 꽃들이 서로 다른 모양과 향기를 가지고 있듯이, 자신이 살아온 생에 따라 크고 작고, 아프고 즐거운 사춘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공지영에게 그런 사춘기는 또 올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공지영의 이력을 한번 살펴본다.

    198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 이후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있고,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별들의 들판’, 산문집 ‘상처없는 영혼’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등이 있다. 수상경력은 21세기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이 있다.

    죽기 전에 ‘딱 하나’ 하고 싶은 것

    어린 시절 그녀는 유독 글자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인형이나 장난감보다 글씨를 가지고 놀던 아이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백일장을 비롯한 각종 문예행사에 나가서 노는 아이가 됐다. 그것이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그 기간엔 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고아원 원장, 스튜디어스, 교수 등등. 하지만 간절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문학을 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다. 딱히 작가라기보다는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할 때 국문과를 지망하려 했다. 그때 부친이 이런 말을 했다.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영문과에 가라.”

    영문과에 가면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문학의 본령이기도 한 영문학의 세례를 받고 나서 문학을 한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녀는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고 연세대 영문과에 진학한다. 고교시절부터 방송반 활동을 했기에 연세대 방송반에 들어갔지만, 마치 취업준비반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금세 눈길을 딴 곳으로 돌렸다. ‘연세문학회’가 그녀의 발길을 잡았다.

    연세문학회에서 그녀는 첫 남편인 위기철을 비롯해서 심산, 기형도, 성석제 등 당시 대학문단의 스타들도 만났다. 공지영은 곁에 있는 친구들에 비해 그리 두각을 나타내는 스타는 아니었다. 연세문학상을 받았을 뿐이라고 한다. 타 대학의 문학상은 다 떨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문학지망생 앞에서 강연을 할 때 “여러분, 저도 엄청 떨어진 사람입니다”라고 해서 웃음을 자아낸다. 그 시절에는 시를 썼다.

    시인이 되고 싶던 젊은 공지영은 노동운동 쪽으로 몸과 마음을 던졌다. 우리들의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공지영은 이 시기에 작가로서 결정적인 한순간을 맞게 된다.

    “전두환 정권 밑에서 그에게 이로운 일은 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노동운동 현장에 들어갔지요. 이른바 위장취업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들통 나서, 그녀는 난생 처음 유치장 신세를 진다.

    “하지만 그게 작가로서는 행운의 순간이었어요.”

    같이 위장취업을 한 많은 이가 용산경찰서에 잡혀왔는데, 정말 거짓말같이 공지영만 남겨두고 모조리 석방됐다. 그 무겁고 낯선 공간에서 혼자 남겨진 공지영은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분명히 여기에 또 잡혀 들어올 거다. 그리고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지. 만약에 여기에서 풀려나가면, 또 잡혀 들어와 죽기 전에 딱 하나만 하고 싶은 거 하고 들어오자.”

    이런 절박한 심경으로 쓴 작품이 바로 ‘동트는 새벽’이다. 198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작품을 발표하고 공지영이 탄생한다.

    버리면 얻는다

    이전에 그녀는 문학을 완전히 버린 적이 있다. 1980년대에 신문 연재 중이던 박경리 선생의 ‘토지’ 5부를 몰래 숨어 읽곤 했었다.

    “그땐 참으로 절박한 심경이었을 겁니다. 문학이라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선배들은 저에게 문학을 버릴 것을 종용했지요. 그래서 선배들 앞에서, 나 공지영은 영원히 문학을 버릴 것을 선서합니다, 라고 했어요. 그땐 그랬어요. 그건 진심이었지요. 그때 문학에게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문학아 내가 시대를 잘못 타고나서 너를 만날 수 없구나.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좀 유아적이기도 하네요.”

    동서양의 선지식이 하는 말이 있다. 바로 ‘버리면 얻는다’다. 공지영은 이 진리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살아낸 사람 같다. 무엇이 되었건 그녀는 그 순간 최선을 다했고,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냈다.

    “헤어지고 나서 정말로 얻는 게 있어요. 그게 문학이건 인생이건 간에.”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당시 민족문학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취직한 적이 있다. 그 공간에서 채광석 시인과 김정환 시인, 강태형 시인을 만났다. 특히 우리 후배들이 ‘불우한 천재’로 받들어 모시는 김정환 시인은 여러 가지로 의지가 되는 믿음직한 그녀의 ‘형’이었다.

    “그땐 정말 행복했어요. 이름만 듣던 김지하 선생, 김성동 선생, 정말 하늘의 별 같아 보이던 문인들이 내 앞에 있는 거예요. 그분들이 담배 심부름이라도 시키면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하면서 구멍가게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첫딸 위녕을 낳았다. 아이를 보면서 글을 썼다. 타자기 소리가 울리지 않게 바닥에 수건을 여러 장 깔아놓고 글을 쓰는 이 장면은 소설 ‘즐거운 나의 집’에 고스란히 묘사돼 있다. 그렇게 첫 장편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가 세상에 나왔다. 그녀가 소설가로서 유명해진 것은 장편소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였다. 말 그대로 그 소설을 내고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버렸다.

    “그즈음에 나를 억누르던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걸 놓고 나니 몸이 너무나 가벼워졌어요.”

    장편소설 ‘즐거운 나의 집’은 이러한 공지영이라는 여자의 삶의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하게 써내려간 소설이다. 이른바 개인적인 체험이 많이 녹아 있는 사소설(私小說)인 셈이다. 사소설은 일본 문학에서 뿌리가 깊다. 현재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부 교수로 있는 스즈키 토미는 저서 ‘이야기가 된 자기’에서 일본의 사소설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1920년대 중반에 나타난 ‘사소설’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소설’(아울러 ‘서양 사회에서의 개인’)에 대비된 개념입니다. 즉 허구와 상상력과 자율성에 기초한다는 ‘서양의 소설’에 비해, 일본의 근대 소설은 허구를 가미하지 않고 작가의 실제 체험을 있는 그대로 표백하는 ‘사소설’로 대표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일본에서의 ‘자기(자아, 주체)’의 본래 모습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사소설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출현한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아주 폭넓게 사용돼왔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소설의 대표적인 우리 작품으로 언뜻 떠오른 것이 김성동 선생의 ‘만다라’다.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은 김성동의 ‘만다라’ 계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통과 방황, 그리고 좌절로 점철된 무한지옥에 사는 인간의 길을 두 남녀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줬다. 모든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구도의 길이다. 공지영의 산산조각 난 마음은 즐거운 나의 집에서 모이고 응축되어 한 송이 꽃으로 피었다. 그녀의 소설 대부분이 사소설의 영역에 있다. 그녀는 ‘자기’를 쓴다.

    그래서 공지영은, 지금 맑은 얼굴의 공지영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녀가 어렵게 쟁취한 것이다.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복은 유아기를 지나면 더 이상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공짜로 행복을 얻던 유아기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거기에 지금의 나라는 강물의 시원(始原)이 있다. 시원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히고, 휘고, 거슬러 올라간다. 그 과정을 우리는 고통이라고 가볍게 적지만, 그 언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종교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시 가사상태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이른바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은 성경에 묘사된 대로 가장 잔혹하고 완벽하게 죽음에 이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그러한 죽음의 창을 들이대는 인간들을 향해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기고 인간으로서 완벽하게 죽는다. 그러고 나서 다시 산다. 이것이 부활이다.

    공지영은 여기가 죽을 자리라고 생각하고 뛰어내렸는데 살아난 사람이었다. 살아나 보니 사람들이 자신에게 박수를 치고 있다고 했다. 그러한 절박한 심경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두 남녀를 만들어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바로 자신의 분신이다.

    외형적으로 화려하지만 유년시절의 상처와 가족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자살기도를 하면서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 살의 대학교수 문유정, 세상의 밑바닥을 떠돌다가 세 명의 여자를 살해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정윤수. 공지영 역시 그처럼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어서 구치소에 가 사형수를 만났다. 그녀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진정으로 참회하고 새로 태어난 사람들, 삶과 상처를 딛고 차마 아무도 하지 못하는 용서를 하려는 사람들…, 그분들과 함께 나는 감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나를 많이도 울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실은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분노로 뒤틀린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 그게 진짜라는 것을 가르쳐줬다.”

    “이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리스도로 인해 회생했어요. 신부님, 성자님들의 책을 보고 힘을 얻었고, 순결한 위안을 얻었지요. 피에르 신부, 토머스 머튼, 특히 안젤름 그륀 신부님의 저서에서 큰 영향을 받았어요.”

    독일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자 안젤름 그륀은 나 자신을 진지하게 만날 것을 권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그는 인간의 상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평화와 자유

    “나 역시 상처를 가지고 살았다. 예전에 호숫가에서 나는 그 상처에 대한 고마움을 경험했다. 내가 온전함에 대한 동경, 치유에 대한 열망을 가지는 게 상처 때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두려움이나 우울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놓고 우리는 영혼에 감사해야 한다. 상처는 치유를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처의 존재 이유가 바로 치유에 있다는 말, 많은 사람에게 화살처럼 날아간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바람 같다. 묶여 있지는 않지만 머물기는 한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온 산문집이다. 그녀는 전세계의 가톨릭 성지를 거의 다 돌아다녔다. 성지를 다녀오면 상처가 치유되거나 자신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성지에는 어떤 기운이 있다고. 그러한 기운이 의사의 손길처럼, 부모의 마음처럼 다가간 이의 손을 끌고 마음을 쓸어준다. 그래서 저절로 이러한 감사기도가 흘러나온다.

    “저를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또, 아이들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제게 너무나 큰 힘이 됩니다. 걔네들 없었으면 소설도 안 썼을 거예요. 아이들이 없으면 매일매일 집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 아마도 지금의 나는 없을 겁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날개를 달아준 천사 같아요. 그리고 그 날갯짓을 할 에너지도 줬습니다. 아이들이 없었으면 저는 추락했을 겁니다.”

    그녀는 남양성모성지를 추천해줬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산책로를 따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놓으면 좋은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했다. 아주 평화로운 곳이라고 한번 가볼 것을 권했다. 힘들 때 그녀는 평화를 꿈꿨다. 이젠 고통과 충격에 내성이 생겼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자유를 생의 목표로 삼았다.

    “하기 싫은 일을 거절할 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제 마음을 정직하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게 바로 자유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저런 이유로 잘 그러질 못해요.”

    평화와 자유를 결합하면 최고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유롭게, 하지만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면서 고정관념을 깨려고 노력하면서 살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성격은 그녀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뭔가 부탁하고 싶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을 알면 반은 승낙을 받을 수 있다.

    마음연습

    맥주를 두어 병 마시니 이제 일어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이 바로 몸으로 와서 내가 되니까요. 끊임없이 놓고, 버리고, 비우는 연습을 해야지요. 이것을 마음연습이라고 할까요. 마치 운동선수들이 웨이트트레이닝을 할 때 끊임없이 반복된 동작으로 근육의 지구력과 파워를 높이듯 말입니다. 아령이나 역기를 들 듯, 마음 트레이닝도 그렇게 해야지요.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는 어떤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하지요. 역도 선수가 갑자기 무거운 역기를 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꾸준하게 마음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연습은 한순간 깨달았다고 해서 유지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밥을 먹듯, 숨을 쉬듯 해야 하리라.

    10년 전쯤에 그녀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기 위해 그곳의 토종병인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았다. 독감 예방주사라도 맞고 나면 심하게 앓곤 한다. 특히 황열병은 치사율이 높은 병이어서 예방주사를 맞지 않으면 입국 자체가 되지 않는다. 예방접종을 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심하게 감기몸살을 앓는 것처럼 아팠다. 왜 이런가 싶다가 예방주사 탓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 이야기를 했다. 아주 가벼운 이야기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 나는 메모지에 아프리카, 황열병, 일주일, 감기몸살, 그리고 여행이라고만 적었다. 그리고 원고를 쓰기 위해 그 단어들을 보면서 그래, 어쩌면 이 단어들이 그녀의 현재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겪어낸 삶의 질곡들은 먼 나라로 여행을 하기 위해 치른 예방접종일 수도 있다. 혹시 정말 죽을까봐, 신이 그녀의 엉덩이를 세게 때리고 주사를 놓아주었다. 보드라운 피부를 찌르는 따끔한 주삿바늘처럼 사람을 만났고, 심하게 앓았고, 그 힘으로 작가로서의 삶, 그녀의 표현대로 바람처럼 묶이지 않고 머물다 다시 떠나는 자유를 얻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뭔가.

    “친구에게 물어봤어요. 사람이 사랑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을까. 친구는 말했지요. 진짜 사랑은 살면서 딱 한 번만 오는 거야. 어쩌다 운이 좋으면 두 번까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생에 딱 한 번 오는 거야. 그게 오면 저절로 알게 돼. 누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거지.”

    가장 힘든 과제

    나는 공지영에게 물어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에겐 사랑이 뭐냐고. 그녀는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이고, 궁극의 목표”라며 릴케를 인용했다.

    “고독하다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언가가 어렵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돼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 역시 훌륭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어려우니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그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 중에서 가장 힘든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상처의 거울, 고통의 예방주사 공지영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최후의 과제이며 궁극적인 시험이자 시련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기술입니다. 다른 모든 면에서 초심자인 젊은이들은 아직 제대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즉,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들의 전 존재를 다하여, 그들의 고독하고 소심하면서도 높은 곳을 향해 박동질치는 심장의 근처로 모인 모든 힘을 쏟아 그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우는 기간은 언제나 기나긴 밀폐의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오랫동안 인생 속으로 깊이 몰입하는 고독입니다.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융합이나 헌신, 그리고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아직 순화되지 않은 존재, 마무리되지 않는 존재, 아직 독립하지 못한 존재의 합일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내면 속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즉 상대방을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입니다. 즉 사랑은 한 개인을 지목해 그에게 광대한 사명을 부여하는 그 무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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