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다산(多産) 작가가 될 거야. 많이 쓸 거야. 이제부터 많이 쓸 거야. 난 가장이야. 애들하고 같이 살아야 돼.”
그녀는 많이 취했고, 이 말은 우리들 중 누구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들이 공중에 흩어져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밥집에서 폭탄주가 날아다녔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졌다. 만취해 그 흥에 겨워 사람들은 노래방으로 갔다. 나는 그 자리를 몰래 빠져나왔다. 피곤하고 힘겨웠다.
그 후로 그녀는 자신의 그 ‘말’대로 했다. 멀리 떨어져서 그녀가 내는 책을 사서 읽고, 이런저런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녀는 무섭고 뜨겁고 아름다웠다. 독자로서 그녀의 책을 읽다 보면 그녀의 인생 후반부가 아름다울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집필실 없는 주부작가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살다 보니 둘 다 이제는 중년이고 나이를 먹었다. 홍대 앞의 복집에서 복지리를 먹었다. 식당 여주인이 그녀의 독자였다. 주인집 아들이 어머니에게 사인을 해줬으면 했는데, 여주인은 웃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면서 나중에 하자고 했다. 나이 든 여주인은 그녀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밥을 먹으면서 공지영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젊어서 만난 친구들이 평생 가는 것 같아요.”
가만히 생각하니 그렇다. 문단이라는 좁은 바닥에서 젊어 만나 오랫동안 가난한 마음을 나눈 사람들. 한 해 한두 번 보는 사람들인데도 만나면 바로 어제 만난 것처럼 친근감이 든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기 위해 노트와 연필을 꺼내자 자신도 연필을 깎아 쓴다고 한다. 그리고 ‘애들’은 샤프를 쓴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애들 이야기가 제일 먼저 나왔다. 그녀는 전업작가가 아니라 주부작가다. 세 아이를 키우는 주부작가. 그래서 따로 집필실이 없다.
작업량 때문에 한두 번 집필실을 마련해봤는데 효용성이 없었고, 세 아이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요즈음 그녀는 분당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글을 쓴다. 반 농담 삼아 일산으로 이사를 오라고 하니 토끼 눈을 뜨고 고개를 흔든다. 워낙 문인이 많고 술자리가 많은 동네다. 일산으로 오면 공지영은 고달플 것이다. 고래 같은 술꾼들이 바다 같은 그녀에게 풍덩풍덩 뛰어들 것이다. 그래서 말을 바꾸어 그녀에게 한국 문학을 위해 절대 일산으로 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침 박경리 선생이 위독하셨다(이 원고를 탈고한 오늘-5월6일-별세하셨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선생은 생전에 ‘토지’ 주인공들에 대한 말을 하면서 “이 땅에 발을 디딘 모든 사람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하셨다). 그녀는 박경리 선생의 책은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고 했다. 공지영 소설의 스승인 셈이다. 하지만 자주 뵙지는 못했고, 소설가 강석경과 한두 번 자리를 함께했다고 한다. 자주 뵙고 싶은데 워낙 어려운 분이라서 그러질 못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