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이 맛없는 식당 주인의 딜레마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맛있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삶의 재미와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즐겁고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의 구체적 조건에 대한 이해가 없는 한국인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이 경쟁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단순히 상품생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일궈나가야 하는 구체적 삶의 조건들도 행복과 재미라고 하는 가치를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좋은 것이 뭔지 도대체 아는 바가 없는데 어찌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김혜수를 좋아하시나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배우 김혜수를 싫어했다. 왠지 불필요하게 도도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타짜’를 본 이후, 나는 김혜수에 대한 내 편견을 단번에 다 버렸다. 이제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할 수 있다. 살펴보니, 배 나오고 탈모로 고민하는 내 주위의 중년 남자들은 대부분 김혜수를 좋아한다. 그들도 그 영화를 본 후부터 좋아하게 됐다고 한다.
다 그녀의 엄청난 가슴 때문이다. 김혜수는 ‘타짜’에서 단 몇 초간 자신의 가슴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장면에서 철없는 중년들은 한결같이 정신이 혼미해진다. 김혜수의 과감한 연기 이후 가슴 큰 여배우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드러낸다. 영화제 시상식이나 시사회가 있는 날의 뉴스에는 어김없이 그녀들의 가슴을 볼 수 있다. 이들이 가슴을 드러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가슴을 훔쳐보는 철없는 이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왜 남자들은 큰 가슴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미국식 포르노그래피에 길들었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미국식 포르노그래피는 큰 가슴 외에도 정말 많은 것을 보여준다. 채찍, 가죽장화…. 그러나 이 땅의 사내들은 그중에서 유독 큰 가슴에만 집착한다.
이런 현상의 배후에는 심층심리학적 욕구가 숨겨져 있다. 사는 게 재미없는 한국 남자들의 첫 번째 현상, 즉 ‘큰 가슴으로의 퇴행’이다. 그것은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살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게다가 세상은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무기력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온통 뒤바뀌어 황당했던 경험이 반복되면 오히려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의사소통의 문제다. 진정한 의사소통 행위는 정서공유가 전제돼야 한다. 그러나 서로 정서를 공유하는 과정이 박탈된 논리적 의사소통 행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로 인한 불안 때문에 한국 남자들은 큰 가슴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큰 가슴에 머리를 깊이 처박고 울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 가장 완벽한 소통을 경험하는 곳은 어머니의 가슴에서다. 어머니의 젖을 빨 때, 아기는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또 다른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또 다른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의사소통행위는 시작된다. 이를 철학적인 개념으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