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호

‘환차손’ 급등 때 눈물겨운 절약으로 감원·감봉 막아

이철 연세의료원 세브란스병원장

  • 입력2008-12-02 16: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환차손’ 급등 때 눈물겨운                       절약으로 감원·감봉 막아
    나는 1997년 세브란스병원 기획관리실장을 맡았다. 세브란스병원 소아과의사로서, 의과대학교수로서 평생 환자 치료를 천직으로 삼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병원 행정을 감당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결재 서류에 있는 금액이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아 억을 세는 데 매번 일, 십, 백, 천을 되짚어야 했다. 몇 달을 고생하며 서류와 씨름하고 있던 차에 우리나라를 강타한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원화 평가절하’의 위력

    당시 많은 경영자처럼 나도 외환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16, 17년 전 의과대학 실험기구를 엔화 차관으로 도입했는데 현재 갚아야 할 금액이 도입 당시 금액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는 보고를 받게 됐다. 세월이 지나 실험기구는 이미 폐기 처분했고 10년 넘게 원금과 이자를 상환했는데 구입 당시 금액이 그대로 남아 있다니! 참으로 ‘환차손’‘원화 평가 절하’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알게 됐다.

    당시 병원에서는 많은 의료장비를 외화 리스로 구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은 다른 병원보다 더 많은 첨단의료장비를 외화 리스로 들여왔다. 리스회사가 폐업하고 의료장비 구매가 중단되는 사태를 맞게 됐다. 의사들이 첨단 의료장비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전쟁터의 장수가 칼을 빼앗기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할 수 없이 의료장비를 현금 구매하는 수밖에 없었다. 외환위기 전보다 몇 배로 비쌌지만 위급한 환자 진료에 꼭 필요한 의료장비는 구매를 뒤로 미룰 수 없었다.

    얼마 후 다시 리스회사들이 영업을 시작했다. 나는 리스회사에 외화 리스가 아닌 원화 리스를 제시했다. 세브란스병원은 리스회사에는 최대 고객이었으며 또한 리스회사들이 의료장비 리스를 시작할 당시 최초의 고객이기도 했다. 세브란스병원을 무시할 수 없었던 리스회사들은 우리의 요구조건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우리나라 모든 대학병원이 우리처럼 원화 리스 방식을 따라 했고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환자가 줄어들었다. 특히 경기에 민감한 치과, 피부과, 성형외과는 큰 영향을 받았다. 수입이 줄어드니 당연히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해 임금이 동결됐다. 당시 인천에 인천세브란스병원이 있었다. 개원 이래 연간 20억원 씩 적자를 내는 병원이었다. 환자 일인당 진료수입은 세브란스병원의 40%에 지나지 않았지만 직원들은 동일 재단 동일 임금정책에 따라 신촌세브란스병원과 같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인천세브란스병원의 문을 닫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은 인천세브란스병원의 직원을 모두 받아들였다. 직원들은 감봉, 감원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돌이켜 보면 그 결정은 참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고용을 보장해줄 수 있었고 이후 세브란스병원은 망하기는커녕 세계 각국 의사들이 와서 찬사를 보내는 최고의 병원 건물을 새로 지었다. 또 단시간 내 세계에서 로봇 수술을 가장 많이 하는 병원으로 성장했다.

    ‘내 병원’이라는 일념

    나는 재벌의 첨단 경영기법은 잘 모른다. 그러나 나와 직원들은 ‘하나님이 주신 병원이다’‘내 병원이다’라는 일념으로 근무해왔다. 주인의식이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외환위기 때 병원의 절약은 눈물겨웠다. 형광등에서 전구를 하나씩 빼고 화장실 변기통에 벽돌을 넣었다. 뇌파 검사지의 이면을 사무용지로 사용했다. 회의 때 종종 서류에 적힌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뇌파 검사지는 색이 노랗게 바랬고 어지럽게 인쇄된 뇌파가 이면까지 비쳤기 때문이다. 지금 새하얀 인쇄용지나 컬러로 인쇄되는 보고서를 보고 있으면 10년 전 뇌파 검사용지의 이면에 글자를 쓴 행정서류들이 생각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