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면세점에서 내가 가장 잘한 쇼핑은 술이다. 국내외에서 쇼핑을 해온 구매의 ‘달인’들에게 물어봐도 ‘술’이라고 말할 것이다. 술은 충동구매를 했다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사면 무조건 유용하고도 남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세금 많이 내는 월급쟁이들은 억울할 만큼 주세도 높다. 그러니까 1인당 두 병으로 국내 반입을 제한하는 게 아닐까.
통계로 보면 국내 면세점 판매순위 1,2,3위는 모조리 숙성 연수만 다른 발렌타인이다. 외국 공항에서 나도 발렌타인 줄에 몸을 던졌다가 바로 내 앞에서 의기양양 “노, 솔드아웃, 업-써요”라고 말하는 직원과 한국 단체관광객을 무섭게 째려본 적도 있다. 그러다 한두 해 전부터 판매대에서 부쩍 넓은 자리를 차지한 낯선 종목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바로 ‘싱글몰트 위스키’다. 삼각형 오브제 같은 병에 끌려 처음 산 싱글몰트가 글렌피딕이었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이름처럼 ‘몰트(보리싹)만을 사용해 한 증류소에서 생산된’ 위스키다. 많이 알려진 싱글몰트 위스키의 이름으로 글렌피딕, 매캘런, 야마자키 등이 있다. 몰트위스키에 귀리와 호밀 등을 쓴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든 것을 ‘블렌디드 위스키’라고 하는데, 발렌타인과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등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위스키가 여기에 해당한다.
싱글몰트 위스키의 가장 큰 특징은 몰트 자체의 강렬한 풍미와 향이 살아 있다는 데 있다. 여기에 몰트를 건조할 때 ‘피트(이탄)’를 사용하므로 스모키한 향이 더해진다. 이런 특징이 폭탄주처럼 단숨에 넘겨버릴 때 쓴 뒷맛이 넘어오는 것처럼 느끼게 하므로, 폭탄주로 끝장을 내는 우리나라 주당들에게는 ‘터프한’ 몰트보다는 목넘김이 부드러운 블렌디드 위스키가 선호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취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drinking)이 아니라 위스키 자체의 역사와 개성을 즐기려는(tasting) 사람이 많아지면서 싱글몰트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또 ‘순수’를 사랑하는 단일민족의 심성이 술 소비에서도 발휘되는 건 아닌가 싶게 싱글몰트 소비층은 기왕이면 동일한 숙성통에서 나온 ‘싱글배럴(single barrel)’을 선호하는 듯하고, 물을 섞거나 여과하지 않고 숙성통에서 병으로 직행시킨 ‘캐스크 스트렝스(cask strength)’에 열광하는 듯하다. 싱글몰트의 풍부한 향과 개성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캐스크 스트렝스는 일반 위스키의 알코올 도수가 43도인 데 비해 무려 58~63도에 이르지만 독하기보다는 ‘짙고 풍요로운’ 맛을 선사한다. 따라서 위스키에 물을 타는 이른바 ‘미즈와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향을 억제하는 얼음이나 너무 차가운 물이 아니라 상온의 생수를 넣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술이 세도 위스키에 물을 한 방울이라도 넣어 마시는 방법을 권한다. 잠자던 위스키가 깨어나 물과 융합하려 하면서 다양한 향을 발산한다는 것이다.
11월8일 서울에서는 ‘2008위스키라이브’란 행사도 열렸다. 위스키 마니아들이 모여 희귀한 위스키들을 맛보는, 겨울과 어울리는 ‘화끈한’ 행사인데 스코틀랜드와 일본에서도 열린단다. 한국에선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열린 이번 행사에 선보인 90여 종의 위스키 중 절대 다수가 싱글몰트 위스키였고, ‘캐스크 스트렝스’가 적지 않았다. 또 회원들이 수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에 가서 직접 병입한 술도 있다. 뭘 해도 이 정도 하면 존경해줘야 할 것 같다.
언젠가 외국 공항에서 산 매캘런 캐스크 스트렝스를 한잔 따라놓고, 1824년부터 매캘런을 생산하는 증류소의 역사를 찾아 읽었다. 멋 부리지 않은 듯 박력 있는 병과, 그 안에서 출렁이는 황금호박색을 보고 있자니, 혼자 스코틀랜드의 스페이 강을 따라 오르는 듯한 기분이다. 겨울에 자랑할 만한 술 쇼핑의 추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