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호

‘미신적 음악 감상’과 ‘지적 감상’ 사이

음악이 다가오지 않을 때 오디오 놀음에 빠져보라

  • 김갑수 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입력2008-12-02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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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리 좋은 음악을 들어도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수십년 끈을 놓지 않았던 음악과 담을 쌓을 수도 없다. 이전의 삶 자체를 부정할 순 없으니까. 하쿠나마타타폴레폴레! ‘걱정 마 다 잘될 거야’라는 뜻의 주문을 외운다. 따지고 보면 일생 벗해온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가의 이름이 바로 그런 뜻의 주문이었다.
    ‘미신적 음악 감상’과 ‘지적 감상’ 사이

    줄라이홀 내부



    ‘내이름은 건이야. 마를 건(乾), 건씨라고 나를 불러줘….’연애의 계절풍이 다시 불어온다면 상대에게 요즘 이런 글발을 날리고 있을 것 같다. ‘가(감흥)이 사망하도다.’ 감흥 없는 이 마음을 연애는 이렇게 표현하게 만들 것이다. 연민은 ‘련민’이 되고 해돋이는 ‘해도디’로, 평상시는 ‘평상소’로, 가소롭다는 ‘가로솝다’로 배배 꼬인다. 맞춤법에 승복할 수 없는 팍팍한 기분. 그 어감의 심리학을 판독해주고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이젠 없다. 연애 상대가 없는 건 생물학적인 현상이고, 인류학적으로 대범하게 그러려니 한다. 문제는 도대체 ‘가이 없는 것이다. 음악 말이다. 세상에나! 음악이 나를 울리지도 죽이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토요일 오전부터 일요일 밤 깊은 이 시간까지 판을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리고 있으나 내 이름은 ‘건’이에요. 가이는 대체 오데로 갔나?

    책상 위에 방금까지 듣던 LP 박스세트를 올려놓아본다. 콰르테토 이탈리아노가 연주한 9장짜리 모차르트 현악 4중주 전집이다. 메이드 인 홀랜드란 글자가 선연하게 박혀 있는 필립스 오리지널이다. 4명의 멤버 가운데 제2 바이올린 엘리사 페그레피가 할머니로 쭈글쭈글해지기 전 중년 초입의 넉넉한 표정으로 재킷을 장식한다. 값비싼 최고수급 연주집이다. 전반적으로 속도가 느릿느릿한 제 18번 A장조, 쾨헬(KV) 464번을 오르토폰 주빌리 카트리지로 샅샅이 들었고 그 직전에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고에츠 실버그라도로 제17번을 완청했다. 음악칼럼을 줄창 쓰던 시절이라면 무언가 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모차르트 생애 어느 시기의 작품이고 연주자들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했고 어쩌구저쩌구. 그러나 나 건씨 아저씨는 지금 모차르트조차 ‘가로소울’ 판이다. 웬일이니?

    삶은 비(非)가역

    읽기 싫은데 책을 읽고, 듣기 싫은데 음악을 계속 듣는다. 살고 싶지 않을 때가 있건만 계속 살아가는 것과 동일한 이유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두는 것이 불가능한 비가역적 영역이 인생에 있다. 가령 이 순간부터 내가 책읽기와 음악듣기를 완전히 중단한다면 이전까지의 생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럼 그 다음엔 무얼 하지? 땅을 파나, 산을 타나, 주식 부동산 같은 재테크 쪽으로 눈을 돌려보나. 좋으나 싫으나, 미우나 고우나 가던 길을 계속 가고 하던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영역이 있다. 그것이 비가역이고 불가역이며, 다른 말로 팔자고 숙명이다.



    이번엔 컴퓨터 옆에 바닥부터 쌓아올린 책들에 눈을 준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필경 이 책을 금서(禁書)로 지정한 국방부 덕일 것이다. 주위사람 상당수가 이 책을 읽었거나 구입했다. ‘참 나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비평서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체감 숫자가 적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도 상당한 독자가 있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하지만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부른다는, 진화생물학에 입각한 강렬한 종교 비판서다. 간혹 주경철의 ‘대항해시대’의 독자도 목격된다. 고교 시절의 수업으로 더 이상의 학습을 끝내고 마는 것이 세계사 분야인데 근대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새로운 시야를 제시한 멋진 책이다. 아주 드물게 독자를 만날 수 있는데, 너무도 알려지지 않아 신비로운 느낌마저 드는 저자 김상태의 ‘도올 김용옥 비판’도 있다. 3쇄째 책이다. 꽤 여러 권 나온 김용옥 비판서의 결정판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전우용의 ‘서울은 깊다’는 이른바 인문적 소양이 넘쳐나면 이런 정도의 글맛과 함량을 보일 수 있다는 사례가 될 만한 책이다. 나이 좀 들고 생의 무게와 근력이 부풋한 사람이라면 마음먹고 읽을 만하다. 여기에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서병훈의 ‘포퓰리즘’, 도정일의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등도 추가된다. 출간 재출간을 거듭한 김열규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도 있고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가 또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나의 소소한 일상’은? 에릭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는?

    모차르트에 사로잡힌 영혼

    권장도서 목록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작업실 컴퓨터 옆에 쌓여 있는 근래 읽은 책 목록이다. 정리해보자면 첫째, 방향도 취향도 짐작할 길 없는 ‘구구리 잡탕’이라는 것. 둘째, 문학책 예술책이 없다는 것(다자이 오사무 책은 신변잡기를 쓴 생활에세이다). 셋째, 근간의 지적 동향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 내가 듣는 음악이 그렇듯이 정처 없는 독서의 실상을 쌓여 있는 책이 증명한다. 활자에 눈을 박다가 잠시 커피 놀이를 하다가 더 많은 시간은 음반을 돌리며 보낸다. 부러워하시든 세월 좋네 타박하시든 맘대로 하시라.

    물론 밥벌이하러 세 군데 방송사를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간간이 집에 들러 가족도 만나고 드물게 친구도 만난다. ‘여인’ 쪽은 주둥이만 동동 뜬 채 실체가 없어진 지 오래다. 나이 들어 신체의 기계작동이 빌빌해지면 여인이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기회 근처까지 가도 스스로 포기해버린다. 그렇다고 ‘정신스럽고 겉멋스러운’ 플라스틱 아니, 플라토닉 퍼피 러브를 꿈꾸기에는 늙었고 낡았다.

    요컨대 무엇에 붙들려서 혹은 무엇을 채우면서 살아 있는 날들을 보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장하준이나 도킨스인가. 친구거나 먼 그대들인가. 아니면 밥벌이 방송 마이크인가. 혹시 모차르트인가. 빙고! 모차르트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차르트들, 그것으로 채우고 싶다는 말이다.

    잠시 주문을 외워본다. 오블리 비아테! 좋은 기억만 남겨두고 나쁜 기억은 사라지게 만드는 주문. 어떤 커피숍 이름이었는데 알고 보니 해리포터에 나오는 거란다. 이하 출전을 모르는 주문들이다. 루프리텔캄! 모든 것을 이루어지게 한다. 세렌디피티! 생각지 못한 귀한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하는 행운의 주문이다. 하쿠나마타타폴레폴레! 걱정 마 다 잘될 거야, 라는 위로의 주문. 마하켄다프펠도문! 슬픔과 고통을 잊게 해주노라.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연주자들

    웬 주문들인지 짐작이 가시는가. 일생토록 내게는 모차르트들이, 그러니까 온갖 작곡가 연주가의 이름이며 존재가 하쿠나마타타폴레폴레, 다 잘될 거야, 같은 구실을 했던 것이다. 마하켄다프펠도문, 슬픔도 괴로움도 견뎌낼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클래식 음악에 전념하기 전에는 때로 밥 딜런이, 또 때로 마일스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이 그러했다. 루프리텔캄, 오블리 비아테! 그러니까 이것은 음악의 미신적 단계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환상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 음악에 앞서 음악가들의 생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들이 겪은 삶의 고통과 노고, 그들만이 느끼고 이해한 어떤 비경이 내 것으로 다가온다. 많은 것이 과장된 오해에서 비롯될 수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고흐나 뭉크의 생애 사실이 다른 모든 회화작품을 압도해버리는 것과 유사한 단계다.

    대학 시절, 영어에 까막눈인 록 음악광(狂)을 판 가게에서 만나 알고지낸 적이 있다. 그는 내게 홀(Hall)이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힐? 하고 물었다. 네, 힐이요, 라고 나는 답변해주었다. 그는 모든 음반을 재킷의 그림으로 판별하고 있었다. 날마다 10여 종 이상의 신보가 해적음반(빽판)으로 나오던 시절이라 없는 판이 없던 그때 그는 모든 음반을 다 듣고 모든 뮤지션을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불가사의한 정보량에 믿을 수 없는 소스였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 음악을 들으면 평면이 입체로 다가왔다. 가령 그는 캐나다 3인조 록그룹 러시(RUSH)의 음악을 추종하는 4대 학파가 캐나다 최고 명문대학마다 포진해 있어 엄청나게 논쟁 중이라고 했다. 각 학파 간의 논쟁이 캐나다 대학계의 최대 관심사라고 했다. 실제로 ‘국립 캐나다 대학교’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의 음악을 토론하는 석학들의 학술회의 장면에 대한 그의 실감나는 묘사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나는 실제로 당시 숭배하던 록그룹 슈퍼트램프의 풀스 오버추어(Fool´s Overture) 음반의 예술성과 사회성에 대해 그런 학계에 나가 발표할 내용을 정리해본 적도 있다. 네오레프트를 이끄는 마르쿠제도 등장하고 나치 히틀러의 집단 광기도 거론하는 아주 현학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여인의 사랑과 생애’

    일생토록 이 미신적 단계에서 음악을 섬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신빙성 있는 지식이나 음악학적 이해와 음악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간혹 만나는 연주자들 가운데 음악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다. 그들에게 음악은 엄마가 강요한 업보이고 숙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네 미신 음악 애호가들은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때로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워하며 음반을 돌려왔다. 푸르트벵글러는 신이고 카살스는 산신령이고 시게티는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고 뭐 그런 식. 간혹 전공자 중에도 미신 음악가가 있는데, 줄리어드씩이나 나온 내 친구 피아니스트 김진호는 역사상 딱 세 명의 피아니스트만 존재했다고 단언한다. 호로비츠와 루빈스타인과 라흐마니노프. 녀석은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의 현란한 콘서트를 다녀와 탄복하는 나에게 차라리 원숭이 서커스를 구경하라고 비아냥거렸다.

    미신적 음악 감상에서 음악적 요소는 소리와 연상 작용이다. 소리, 즉 사운드는 자극이다. 피아노의 자극과 타악기의 자극은 원리적으로 흡사하지만 반응은 엄청나게 다르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비올라와 첼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이렇게 순차적으로 규모가 달라지는 현악기 간의 감각적 차이와 그것의 앙상블을 가닥을 추려 쾌락으로 받아들일 때 이른바 ‘미치는 기분’에 도달한다. 듣는 귀가 뚫린 자의 기쁨이 그것이다. 그리고 감상자는 자유로운 연상을 한다. 센티멘털한 감성이 주된 것이겠지만 그 연상을 대개 ‘해석’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때 작품 본래의 의미와 내용에 얼마나 적실히 닿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독일계 예술 가곡을 들을 때 특히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 나는 슈만의 가곡을 대단히 좋아한다. 샤미소의 시에 붙인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 같은 경우는 남자인 내가 내 노래라고 주장하는 정도다. 하지만 슈만이 가져온 시들, 하인리히 하이네나 뫼리케, 뤼케르트, 아이헨도르프의 시편들을 번역으로 접하면 민숭민숭하기 이를 데 없다. 슈만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이 아름다운 오월에’의 내용을 보자.

    ‘미신적 음악 감상’과 ‘지적 감상’ 사이

    작곡가 슈만과 피아니스트 클라라 부부.

    이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꽃봉오리들이 열릴 때

    내 마음속에

    사랑이 꽃피었네.

    이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새들이 노래할 때

    내 동경과 소원을

    그녀에게 고백했네.

    질풍노도 시대 로맨티시즘 시어의 뉘앙스를 원어로 체득하지 못하는 한 노랫말이 주는 감흥은 참 싱거울 것이다. 이 곡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보자.

    ‘짧은 전주곡 속에서 조성은 올림 바단조와 가장조 사이에서 흔들린다. 노래가 시작되면서도 여전히 각 화성변화가 예기치 못한 느낌을 준다. 피아노 아라베스크(하나의 악상을 화려한 장식으로 전개하는 악곡)가 먼저 독자적으로 형성되고, 뒤에 가창의 보선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열린 종지는 불확정성 작곡법을 생각나게 한다. 종지의 풀리지 않은 딸림7화음은 슈만이 이 곡에서 경계와 종결을 지우면서 사전작업을 했음을 가리킨다.’

    알 듯 말 듯한 설명이긴 한데 이것으로 노래의 감흥을 느끼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가사는 싱겁고 해설은 번거롭기만 하다. 하지만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노란꽃 앞에 서 있는 젊은 페터 슈라이어의 음반을 들어보라. 어떻게 설명할 길 없는 페이소스로 숨이 막혀온다. 당연하지. 노래나 연주는 들어봐야 맛을 안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말이다. 그럼에도 거론하는 것은 연상 작용의 의미 때문이다. 특정한 연상이 고착될 때 그 곡은 나만의 유일 버전으로 변한다. 먼 옛날의 그녀들 가운데 클래식 음악을 애달프게 사랑하던 그녀가 내게 말해주었다. 영문학과에 입학한 그녀가 철학과 강의를 신청했는데 첫 시간, 교수는 수업에 앞서 슈만의 ‘이 아름다운 오월에’를 원어로 부르더라고. 마틴 부버의 ‘나와 너’를 번역한 표재명 교수였다. 그런 봄날을 지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슈만의 가곡, 특히 이 곡을 접할 때마다 떠오른다. 개나리가 ‘너무하게’(옛 친구가 많다는 뜻으로 자주 쓰던 표현) 피어나던 봄날의 개강식, ‘흐윳’길(이대 안의 가파른 언덕길)을 넘어 도달한 여자대학 강의실, 쑥스럽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열창하는 철학교수의 표정, 여고를 갓 졸업한 초롱초롱한 동경의 눈망울들….(그녀는 지금도 슈만을 사랑할까?)

    ‘차원 높은 음악 감상?’

    미신적 음악 감상에서 탈출하여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수가 있다. 곡의 정확한 내용에 대한 이해의 욕망이 생겨날 때다. 언제까지나 상상과 환상만으로, 그러니까 자의적인 음악 이해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옛날 음악학자 데이비드 랜돌프는 음악의 ‘지적 즐거움’이라는 표현을 썼다. 악곡의 내용을 이해하고 듣는 사람이 느끼는 기쁨이 바로 지적 즐거움이다.

    지적인 음악 감상의 출발은 곡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의 상호 관계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해서 형식을 이해하는 것이고 작곡가가 고안한 악상이 변화되고 전개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듣는 것이다. 형식의 이해란 곡에 제시되어 있는 주제와 변주 혹은 미뉴에트, 스케르초, 론도 같은 형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주제와 변주는 변주곡을 열심히 들어보면 접근이 가능하다. 가령 J S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열심히 들으면 깨닫기 쉽다. 첫 부분 아리아가 30회 다른 형태로 변용되는데 3분 남짓한 짧은 아리아의 선율을 기억하는 상태에서 들으면 꽤 선명하게 다가온다. 주제와 변주는 각종 실내악 곡이나 소나타 양식의 교향곡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의 4악장이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의 2악장은 변주의 교과서로 여겨도 될 법하다. 랜돌프가 특히 권하는 대목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느린 악장과 합창 피날레 부분이다. ‘환희의 송가’ 주제를 연주하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악장 전체가 오케스트라, 독창자, 합창 간의 거대한 주제와 변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뉴에트나 스케르초 같은 형식의 이해는 낱말 뜻만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도저히 춤출 수 없는 미뉴에트, 전혀 장난스럽지 않은 스케르초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악장 형식에 대한 이해는 정확히 말해서 구조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가령 미뉴에트는 3부로 이루어진 형식을 뜻한다. 각 섹션은 그 안에 시작의 느낌과 종결의 느낌을 감추어놓고 있다. 그 같은 온갖 약속과 규칙성, 그리고 그러한 규칙의 파괴를 파악하며 음악을 즐기는 것이 지적 음악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도 이런 식의 ‘차원 높은’ 음악 감상을 해보겠다고 끙끙거린 적이 꽤 있는데 즐거움 절반, 피곤 절반이었다. 전자는 작곡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기분에서고 후자는 물론 광분상태를 벗어나버린다는 점에서다. 아마도 미신 단계와 지적 단계의 선택에는 각자의 기질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어떤 방식에 도달하든 공통적으로 필요한 사항이 하나 있다. 반복 청취의 필요성이다. 설사 곡의 구조와 형식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라도 특정한 곡을 외울 정도로 반복해 듣다 보면 생소한 곡들로 하나하나 감상범위를 넓혀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지적인 음악 감상이란 ‘음악’을 듣는 것에 초점이 있다. 반면 미신적 감상은 음악보다 그 음악의 전설과 음향을 중심으로 듣는 것이다. ‘음악사의 뒤안길’ 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유머러스한 일화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기억난다.

    바그너의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이 있고나서 바그너 음악의 대표적 비판자인 한슬리크에게 바그너 숭배자가 관람 소감을 물었단다.

    “부분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으나 부분적으로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슬리크의 답변이 이랬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느냐고 숭배자가 다시 묻자 한슬리크의 간명한 답변이 돌아왔다.

    “음악입니다.”

    (많이 웃어야 맞는 건데) 어쨌든 음악과 음악의 전설이 구별되는 예화다.

    전설의 명기에 빠져

    전설은 책과 음반 재킷의 글귀를 통해, 소리는 오디오로 접한다. 미신적 감상자들에게는 음악 듣는 도구에도 어떤 일치점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아날로그의 곁을 좀체 떠나지 못한다는 것. 아무리 노력해보고 적응해보아도 사운드의 쾌감은 LP의 끈적한 느낌을 따를 것이 없다. LP냐 CD냐 하는 것은 음원 추출과정에서 접촉 비접촉이 빚어내는 원초적 느낌의 차이다. 덧붙여 복잡성이냐 단순성이냐의 문제도 함께한다. 카트리지(바늘)가 소리를 파내는 LP는 접촉이고 복잡이며, 광선이 스쳐지나가는 CD는 비접촉이고 단순이다. 아무리 편견을 털고 공정하게 느껴보아도 공허한 CD 사운드에서 도취의 열광을 찾기란 힘겹다. 사실 오디오계에서는 이미 판정이 끝난 쟁점이기도 하다.

    ‘미신적 음악 감상’과 ‘지적 감상’ 사이

    줄라이홀 주인장은 네 대의 고급 턴테이블에 여섯 대의 톤암(tone arm)을 걸어놓고 번갈아가며 음반을 튼다.

    최근에 턴테이블을 한 대 더 들여놓았다. 이제 총 네 대의 턴테이블에 여섯 대의 톤암을 걸어놓고 번갈아가며 음반을 튼다. 먼저 턴테이블을 구동시키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판이 올려지는 면을 플래터라고 하는데 이 플래터를 어떤 방식으로 돌려주는지에 따라 음질의 성향이 크게 갈린다. 가장 초기 방식이면서 빈티지 오디오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아이들러 방식이다. 모터가 고무로 된 링을 돌려주고 그 링이 플래터와 맞물려 돌아가도록 고안된 방식이다. 아이들러 턴테이블에서는 아랫도리 저역이 꽉 찬 듯 무겁고 단단하고 깊이 있는 소리가 재현된다. 단점은 우릉우릉 하는 잡음, 소위 럼블이 발생하기 쉽다는 것인데 그 정도 문제는 소리의 깊이감으로 감내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아이들러 턴테이블은 1940년대 독일에서 방송국용으로 딱 800대를 만들었다는 EMT 927F이다. 당대 최고급 최고가 턴테이블로 군소 방송국들은 하위 모델인 EMT 930으로 달랬다고 한다. 지금도 전세계 애호가들은 전설의 명기(名器) 927 턴테이블을 최종 목표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아기다리 고기다리’ 하여 이 물건을 입수하던 때의 감격이 삼삼하다. 여기에 997과 297 두 대의 롱 톤암을 부착하여 스테레오는 EMT TSD15 카트리지를, 모노는 오르토폰의 1950년대 초반 모노 카트리지를 사용한다. 아마도 EMT 927 같은 항공모함급 턴테이블은 다시 만들어지기 힘들 것이다. 그때의 장인들은 이제 세상에 없으니까.

    아이들러 방식에서 더 진화한 것으로 그 후에 개발된 것이 벨트 드라이브 방식이다. 모터와 플래터 사이에 고무벨트를 감아 돌리는 방식이다. 아이들러 같은 리지드 방식(고정되어 있는)의 뻑뻑한 느낌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플래터를 플로팅(띄워놓은)시킨 것인데 사운드는 낭창낭창 여리고 섬세해진다. 거의 대부분의 턴테이블이 벨트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나는 미국산 VPI의 HF4 모델을 사용한다. VPI 사에는 T.N.T라고 부르는 플래그십 모델(최상위 모델)이 따로 있다. 내게는 뼈아픈 기억이다. 어떤 실수로 T.N.T 값을 주고 하위품인 HF4를 구입했던 것이다. 오디오 기기를 구입하다 보면 어이없게 옴팡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쨌거나 HF4에 SME 5 톤암을 부착해 오르토폰 주빌리 카트리지를 사용한다. 뭔 소리인고 하니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숏암에 중상급 현대 카트리지를 사용하는 거라고 알면 된다. 아주 개방적이고 울림이 커다란 사운드로서 음흉한 EMT 쪽과 크게 대조를 이룬다.

    한쪽으로 치우친 인간들

    아이들러와 벨트 방식의 장점만 취하겠다고 개발된 턴테이블이 있다. 모터가 아이들러 고무링을 돌리고 그 링이 벨트에 감겨 플래터를 돌려주는 복합방식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국내 애호가들에게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스위스 토렌스 사의 TD124가 그것이다. 한때는 영국제 가라드 301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는데 그 가라드를 밀쳐낸 놈이 바로 TD124이다. 턴테이블을 얹는 보디가 중요해서 내 경우는 거대한 자작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적층해 좀 과한 크기의 몸체가 만들어졌다. 롱암으로 SME 3012R, 숏암으로 독일 클리어오디오사의 초현대식 티타늄 톤암을 사용한다. 각각 SPU 실버 마이스터, 고에츠 실버그라도 카트리지를 사용한다. 중립적인 사운드라고나 할까. 토렌스를 사용할 때면 이렇다 하게 치우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안정적이고 어찌 보면 평범한 음색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지금도 이베이에 꾸준히 매물이 나오는데 그리 비싸지 않은 터라 언젠가 아날로그에 도전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고려해볼 만한 턴테이블이다.

    ‘미신적 음악 감상’과 ‘지적 감상’ 사이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

    세상에는 꼭 치우친 사람이 있다. 이 TD124 턴테이블 모터의 윤활유로 순록의 머릿기름이 최고라 하여 그걸 한 드럼이나 구해놓았다는 일본 애호가의 무용담을 읽은 적이 있다. 국내 애호가 한 분이 TD124 모터 전용 기름을 왕창 수입했다고 광고를 했다. 나도 그걸 덥석 샀는데 그 분량이라니…. 한 100년쯤 사용하면 절반이나 쓸까.

    턴테이블 모터 구동방식으로 최종의 것이면서 실패한 방식이 다이렉트 드라이브이다. 아무런 중간 단계 없이 모터와 플래터가 직접 연결된다. 그만큼 정밀해야 하고 기능적으로 탁월하다. 그런데 실패했다. 일본의 저가품 공세 때문이었다. 다이렉트 방식이 개발되어 EMT사가 950 모델 같은 최고급 선수를 내던 시기에 일본은 값싼 보급품 턴테이블에 다이렉트 방식을 도입했다. 원가절감형 보급품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다.

    다이렉트 턴테이블은 곧 싸구려이고, 디스코텍 같은 데서나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가 꼭 있게 마련. LP시대가 종말을 고하던 무렵 일본 켄우드 사의 엔지니어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항공모함급 다이렉트 드라이브 턴테이블을 개발해냈다. L-07D 모델이다. 켄우드 측은 사용하기에 불편한 것도 극한까지 가보기로 연구한 것 같다. 기존 턴테이블에는 없던 디스크 휨 보정 장치를 개발해 판 한 장 트는 데 모두 네 번의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괴상하고 무겁고 불편한 턴테이블의 장점을 찾아내 열광적으로 추천하는 인물이 미국 최고의 오디오 평론가 켄 케슬러다. 켄 케슬러가 주력기로 사용한다면 굉장한 제품이 아닐 수 없다. 자국에서 버림받고 많이 만들지도 않은 물건이 미국에서 되살아나 현재도 L-07D 동호회와 전문 사이트가 활발히 활동 중인데 나는 그런 꼴을 두고 못 본다. 일본까지 가서 구해온 애호가의 물건을 최근에 덜컥 구입하고 말았다. 화려하다고 할까, 유연하다고 할까, 아직은 연구 중인 턴테이블이다.

    오디오파일(애호가)이 아닌데 아직까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대단한 참을성을 가진 사람이다. 자신이 아는 분야를 들어 유추해보라. 한발 더 들어간 세계는 말로 표현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장황해진다. 내가 사용하는 턴테이블을 소개해봤지만 사실 고급 턴테이블에서 필수적으로 고심하는 과정인 승압트랜스 선택 문제, 케이블 문제, 공명(共鳴) 차를 고려한 지지대 세팅의 문제 등은 거론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논점은 무엇에 붙들려서 혹은 무엇을 채우면서 살아 있는 날들을 보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건(乾)씨 아저씨로 팍팍하게 살아가는 요즘 심경을 말했다. 음악조차 억장을 두들겨 패지 않더라고 한탄도 했다. 더러더러 인생도 쉬는 것을, ‘그래 들리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되리라’일까. 그러다 멀어진다. 그러다 다른 길로 샌다. 음악에 몇 년 몰두하다 쉽사리 딴청에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그래도 모차르트는 계속되고

    프루스트는 단풍나무 숲 사이로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했다. 한 길을 선택해야만 했고, 그래서 가보지 못한 길을 그리워하노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서라, 가보지 못한 길이란 없다. 길이란 걸어가야 길인 것이니 길을 걷지 않은,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많을 따름이다. 이것저것 기웃거린 삶은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고 뱅뱅 제자리 맴돌이를 한 것뿐이다. 다만 가는 길에 변주는 있을 수 있다. 음악이 들리지 않을 때, 건하고 곤하고 피폐할 때 변주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음악에서는 오디오질이다. 오디오에 몰두하는 동안은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오직 사운드 ‘체킹’만이 존재할 뿐이다. 음악은 듣다 멈추다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 비교적 용이하지만 오디오는 훨씬 복잡하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일단 물건의 위치를 움직이는 데 체력이 많이 소모되고 혼자 작업할 수 없는 일이 많아 만만한 지인에게 비굴한 전화를 자주 해야 한다. 과거에는 사진작가 윤광준이 내 오디오질의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신적 음악 감상’과 ‘지적 감상’ 사이
    김갑수

    1959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졸업

    시인 및 음악칼럼니스트

    저서 : ‘나의 레종데트르’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시집 ‘세월의 거지’ 등


    그가 베스트셀러를 내고 사회 저명인사로 인생이 분주해지자 한번 모시기가 별 따기여서 아니꼬운 마음 그지없다. 요즘은 내가 출연하던 케이블 TV 사장과 배짱이 맞아 무려 ‘사장님’께서 운전기사 노릇 겸 짐꾼 노릇 겸 저쪽에서 선을 붙들고 납땜의 대기조 노릇을 하는 일이 잦다.(그에게 삶의 축복과 평화를!)

    당분간 줄라이홀은 오디오룸에 충실해질 공산이 크다. 그것으로 삶의 시간을 채울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모차르트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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