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태의연한 전통에서 벗어나 오늘을 전통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한국화의 이단자’ 박병춘.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으로 개발한 그의 탄탄한 준법과 탁월한 필력은 상상력과 만나면서 실제 풍경과 관념 산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1968년 충북 영동 출생<br>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 졸, 동대학원 석사<br> 개인전 17회<br> 現 덕성여대 동양화과 교수
우리 전통회화를 지칭하는 말이 이렇게 두 갈래가 된 것은 일제 강점의 결과다. 일제는 민족성 자각을 꺼려 우리의 전통기법과 양식에 따라 그려진 회화를 조선화(朝鮮畵)로 지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대신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했다. 그래서 종래까지 서양화에 대응하는 지리적 개념으로 통용되던 동양화라는 명칭이 우리의 전통회화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중국 전통회화는 중국화로, 일본 전통회화는 일본화로 지칭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동양화로 명명된 한국 전통회화의 명칭을 되찾은 것은 광복 후 30년이 훨씬 지나서였다. 1970년대 초 청강 김영기(1911~2003) 등이 ‘한국화 명칭 사용에 대한 건의문’을 국회에 제출했고, 1982년에 이르러 각종 공모전에서 공식적으로 ‘동양화’ 명칭을 ‘한국화’로 변경했다.
1983년에 개정된 새 미술교과서에도 ‘동양화’ 대신 ‘한국화’로 표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동양화와 한국화 명칭은 병용되고 있다. 대학에서도 학과명이 제각각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회화를 규정지을 이름 하나 변변하게 갖추지 못한 탓에 사람들이 ‘한국화’와 ‘동양화’ 사이에서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文字香 書卷氣
지금까지 한국 전통회화는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 조선후기 쟁쟁한 화선들의 정신과 화법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 하기보다는 ‘그림은 곧 인품의 반영’이라는 추사의 관념적이고 고답적인 정신을 붙들고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전통이란 틀 속에 자신을 가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여전히 음풍농월하던 문인화가의 자세를 유지한 채 세상사와 담 쌓고,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고집하면서 세상사 흐름을 외면하며 문인사대부 또는 학자연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한국의 전통회화는 여전히 고루한 액자에 갇혀 있었다. 한국의 전통회화가 진정한 민족의 회화가 되기 위해서는 ‘틀에 갇힌 전통’이 아니라 시대와 조우하면서 스스로 살아 숨 쉬고, 변화하는 생물 같은 생명력을 지녀야 한다. 전통이란 시대와 조우하면서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통과 틀에 가두어 둘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박병춘(朴昞春· 40)의 회화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구태의연한 전통이 아니라 오늘을 전통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 즉 먹으로 종이에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의 회화는 새롭게 오늘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될 만큼 충분히 넉넉하다. 하지만 그는 그 넉넉함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대지를 달려나가는 물줄기의 힘찬 포효를 그칠 줄 모른다.
그의 탁월함 또는 분명하게 남다른 점은 전통에 안주하기보다는 전통을 바탕으로 스스로 방법을 개척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여 있는 물을 가두는 전통회화의 둑을 과감하게 허물어버렸다. 그리하여 전통화단으로부터 이단이라는 지적을 감수해야 했지만 소위 요즘 사람들과 코드가 맞았다. 과거와 역사에 기대어 자신을 방어하기보다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회화적 가치로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기 때문이다.
검은 풍경 175X130 한지.
그는 전통적인 방법과 재료에 머물지 않고 과감하고 다양한 실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지명도를 얻었음에도 늘 새로운 형태, 또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한국적 화단 현실에서 본다면 겉멋만 좇는 ‘철없는 젊은이’로 보였지만 선배와 은사 그리고 그의 동료들과는 다른 면모로 자신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에게 전통이란 지키고 감내해야 할 가치지만,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정신도 그에 버금가는 가치라고 믿었다. 그의 자연관과 산수화적 태도는 단순히 바라보고 즐기는 와유(臥遊)의 대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생한 날것으로서의 자연을 포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산수화는 원래 현실기피적인 문인이나 지식인들이 청담사상을 근저로 한 운둔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전통은 조선후기 진경(眞景)의 시대, 그리고 일제 강점기 실경(實景)산수로 이어지면서도 여전히 산수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뼈대였다.
하지만 박병춘의 산수는 ‘채집된’ 동시에 ‘흐르기’도 하고, ‘낯선 풍경’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의 새로운 산수는 우리에게 자연을 보고 대하는 태도를 달리하게 하는 한편, 자연이 우리의 삶의 공간을 확정짓는 공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부족한 문자향 서권기를 땀내 나는 셔츠와 수북한 사생화첩의 양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조선 땅 방방곡곡을 발로 딛고 손으로 그려 마침내 그 위업을 달성했던 것처럼, 발로 구석구석을 더듬고 나다니면서 사생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의 자연을 재구성한다. 이것은 삶과 사람과 유리된 풍경, 자연이 아니라 사람의 살 냄새나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다.
그의 고난과 희열이 교차하는 사생현장에는 언제나 아내가 동행했다. “나에게 있어 화첩은 삶이다. (중략) 새벽안개가 내린 강가에서 작업(사생)을 하고 있으면 옆에서 아침밥을 짓는 아내의 호흡이 함께했다. 산과 들, 계곡에서 나와 아내의 사랑은 끈끈하게 묶이고 내 붓은 나만의 개성을 찾아갔다”는 그의 술회처럼 그의 그림에 대한, 사생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부창부수라고나 할까. 그뿐 아니라 전공을 같이한 손위의 아내까지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었다.
모필을 들고 사생하는 남편과 그 옆에서 새벽바람을 맞으며 밥을 짓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는 자연을 바라보며 사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남편과 그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에게 자연과 산수화는 더 이상 호연지기를 기르는, 또는 인격도야를 위한 유한한 자리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처절하게 자연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의 삶의 장이자 실천의 장인 동시에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었다.
가족과 함께 사생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름다운 일이고 즐거운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변변한 시간강사 자리 하나에 목을 매고 있는 그에게 가족과 함께 떠나는 사생이란 여행이 아니라 장돌뱅이가 오일장을 떠도는 것처럼 삶 줄이 걸린 일이었다. 그의 산수화가 현실도피적인 속성을 지닌 은둔자들을 위한 산수화가 아니라 현실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인 것은 바로 자연이 화가인 그에게는 직장이자 살판 아니면 죽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라면 필법
그의 산수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전통회화의 맥을 이은 회화들은 개인적인, 극도(極度)로 격을 따지는 그림들이 주를 이루었다.
조선말기 재주 많던 오원 장승업(1843~1920)의 등장과 그에 대한 평가는 박병춘의 작업이 왜 독특한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실례가 된다. 뛰어난 기량을 지녔던 장승업은 인물산수, 기명 등 다양한 화제를 능란하게 다루어 화명을 떨치고 후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기이한 형태와 강렬한 필묵법과 설채법을 특징으로 하는 장승업의 화풍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그들의 그림에는 격조가 없다 하여 크게 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간과된 것이 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음에도 사대부들은 은둔과 은일사상에 경도되어 변화하는 시대에의 적응을 애써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시대를 인정하고 그 시대를 넘어서려 노력하기보다는 애써 숨고 피하고자 하면서 오원과 심전, 소림을 폄훼한 것이다. 이런 전통은 21세기인 요즘에도 여전하다.
하지만 박병춘은 구름 같은 격조보다는 현실, 현장의 날것을 선택했다. 그냥 날것이 아니라 그의 손과 눈을 통해 채집되고 재현되고 그리고 다시 구성된 자연으로서 살내, 땀내가 담긴 산수화였다. 격조는 없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담겨있고 사의보다는 분명 사생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겸재 정선의 대표작 ‘인왕제색도’는 ‘실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진경’을 그린 것이다. 즉 작가의 자연에 대한 생각과 반응을 담는 동시에 그것에서 느끼는 감정을 담아내고 있다. 굵고 검은 선, 짙은 색의 주조, 강렬한 농담의 대비, 그리고 물결치듯 굽이치는 산봉우리와 계곡과 안개가 중첩하는 역동감은 서양의 ‘리얼리즘’보다 ‘표현주의’에 더 가깝다.
이런 점에서 박병춘의 그림은 ‘인왕제색도’와 닮았다. 특히 2003년경의 화첩들을 들춰보면 그런 면면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필법을 고안해내기 위해 사생에 몰두했다. 그의 필법은 다양하지만 간단하면서 군더더기 없는 선의 집적, 또는 횡으로 종으로 반복되는 칼칼한 선이 특징이다. 종래의 준법보다는 새로운 필법으로 표현하기를 즐긴다.
대표적인 게 소위 ‘라면 필법’인데, 라면 필법은 그의 작품 ‘흐린 풍경’이나 ‘낯선, 어떤 풍경’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제 그의 묘법은 박병춘묘법이라 해도 될 만큼 자연을 섬세하고 분명하게 묘사한다. 또한 오브제를 직접 이용하거나 라면을 이용해서 자연을 만드는 설치작업도 사뭇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이제 그에게 산수화는 단순한 산수화가 아니라 하나의 또 다른 자연이자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주체로서 자연을 거니는 사람으로서 자연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예전의 산수화에서 인간은 부수적인 존재였다.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에 함몰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박병춘의 산수화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동시에 서로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이룬다. 그의 산수 속 인물들은 등산이나 관광을 와서 자연을 즐기고 자연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자연을 따라 흐리기도 하고 자연의 품에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생생한 실존적 자아로서 존재한다.
새장의 새들을 풀어주다
그의 회화는 많은 변모를 거쳐왔다.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95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3년 동안 17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놀랄 만한 작업량이다. 그의 작업은 여백을 중시하는 일반적인 수묵담채와는 다르다. 풍경을 세세히 묘사하거나 설치 등 파격적인 실험을 그치지 않는 그의 작업은 질과 양에서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초기 그의 작업은 존재론적 의미를 찾기 위한 방황에 지나지 않았다. 대개의 한국 화가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인간에 대한 완성, 자기인격 도야를 전제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1997년 개인전에서 보여준 ‘명동성당’(190×130cm, 한지에 수묵, 1997)은 지금의 필묵법과 묘법을 예고하고 있다.
채집된 산수-푸줏간.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은 다름 아닌 작가의 가족이다. 이즈음에 등장한 부부 사이의 아이는 요즘 그림에도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부모의 품에 안겨 있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큰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의 산수화도 이렇게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커왔다.
그의 회화는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고 그때마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뚝심과 사생력으로 밀어붙인 셈이다. 추사 이래로 새장에 가둬두었던 새들을 풀어준 셈이다. 그는 새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해왔으며 먹과 붓의 사용법을 실험했고 회화적 형식실험은 물론 다양한 재료를 통해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동년배 작가들과 ‘동풍’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새로운 회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활동은 1980년대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 동인들 이후 침체일로를 걷던 전통화단에 새로운 기운을 진작시켰다. 돌풍을 몰아왔다.
2002년과 2003년의 개인전은 ‘기억의 풍경’이란 이름으로 조촐하게 치렀다. 담묵으로 묘사된 자연의 잔상들이 서사적 화면을 구성하는 가운데, 그 안에 인물이나 선녀가 등장하고 글들이 등장하면서 종합적인 서술적 화면을 완성시킨다. 여행 중 돌아본 산수와 자연 그리고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중첩되면서 모든 것이 부유하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을 콜라주해서 새로운 화면에 병치시킴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이즈음에 같이 선보이는 ‘칠판산수’는 새로운 시도였다. 존재 너머의 존재였던 동양의 자연관을 일시적이며 찰나적인 대상으로 전복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을 품는 이상향, 무릉도원으로서 관념 속의 자연이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낙하하는 것이다. 덧없는 존재로서의 자연은 전통화가들에게는 날벼락같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90권의 사생화첩
전통적인 준법을 거부하고 자기 그림에 맞게 개발한 탄탄한 준법과 탁월한 필력은 그의 상상력과 만나면서 실제 풍경과 관념 산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종이와 먹을 넘어서서 고무판을 잘라 먹선처럼 사용하는 ‘고무산수’, 뽀글뽀글한 라면으로 전시장을 채워 입체적 풍경을 만든 ‘라면산수’, 전시장 사방을 박스처럼 만들어 산수 속에 관람객들이 소요하면서 감상하게 함으로써 자연 속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박스산수’가 그것이다.
그리고 ‘까만 정물’을 통해 모든 것을 기호화하고 단순화함에도 불구하고 기억 때문에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선험적 경험에 의존하는 우리의 판단력을 조롱하기도 한다. 또 작품을 푸줏간의 고기처럼 걸어놓음으로써 완상용 또는 와유하는 자연이 아닌, 내 발로 직접 다가가고 들어가 보는 자연을 보여주고자 한다.
2004년 그는 자신의 전형적인 화법이 드러나는 ‘길이 있는 검은 풍경’전을 연다. 검은 풍경은 여백 또는 이듬해 ‘흐린 풍경으로 들어가다’로, 그리고 다시 이듬해에 낯선 어떤 풍경으로, 그리고 흐르는 풍경과 채집된 풍경으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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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해에 많게는 세 번의 개인전을 열면서 결코 안주하지 아니하고 새로운 실험을 계속해왔다. 그 결과 오늘의 새로운 풍경산수화가로 우리 앞에 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실험이 빛을 발하는 것은 탄탄한 자기수련과 연마의 과정 그리고 자신의 미학을 실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론을 개발한 때문이다.
그의 작업실에 쌓여 있는 현장 사생화첩 90여 권, 3000여 장의 초벌 그림이 그를 허투루 볼 수 없게 만드는 뒷심이다. 게다가 그림 곳곳에서 만나는 뜻밖의 사물들이 주는 재미까지 있음에야 무얼 더 바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