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내놓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란 첫 노래가 조금 알려지기 시작해 30년 넘는 세월을 가수라는 직업으로 살아오며 때론 과분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고, 때론 하루에도 몇 번씩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인기란 시간이 흐르면 떨어지는 게 당연한 이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보니 당사자로선 견디기 힘든 치욕적인 일들을 겪게 된다. 그건 마치 어떤 큰 힘에 의해 높은 절벽에서 밀려 떨어지는, 까만 어둠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떨어져 내리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쉼 없이 울리던 전화벨이…
예를 들어 쉼 없이 울리던 전화 벨소리 횟수가 서서히 줄어든다. 그 시차의 불안감이란. 더욱 견디기 힘든 건 피부에 다가오는 모멸감, 바로 돈 문제다. 예를 들어 노래하던 클럽의 출연료가 한 달에 100만원이었다 하자. 어느 날 클럽 사장이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60만원만 받으라고 한다. 안 그래도 눈치를 보고 있던 차에 말이다. 그런 경우 상당수 가수는 그 놈의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만두게 된다. 그러다 간혹 어쩔 수없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출연료는 40만원이 된다. 죽을 맛이라더니.
잘나가던 시절엔 방송국 PD 양반이 정중하게 해오던 출연 섭외도, 어느 날부터 나이 어린 여자작가의 시큰둥한 목소리로 바뀐다. 그래서 어쩌다 방송국엘 가보면 거기서 또 잘나가는 후배들에게 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한다.
1985년부터인가. 한 4~5년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겪었다. 열심히 만든 노래는 팔리지 않고 방송은 물론 지방행사, 야간업소 공연까지 끊어져 실업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동안 부동산 투자라도 해놨더라면 어떻게 해봤겠지만 전세아파트를 전전하던 신세였으니. 갓 태어난 딸아이를 안고 아내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반도 안 되는 출연료라도 자존심 좀 굽히고 일 좀 해보지. 어이구 저 웬수 같은 똥고집’이라 했을까. 아니면 ‘그래, 고생 좀 되더라도 내 남편이 그런 형편없는 출연료에 노랠 부를 순 없지’ 했을까.
돈에 대해 잔소리 없던 아내
한번도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내는 후자를 택했던 것 같다. 친정 신세를 졌는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는지 모르지만 그 세월 동안 아내는 내게 잔소리 한번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내 지갑 속에는 항상 몇만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그 고마움을 그땐 몰랐다. 철없이 무슨 연예인 축구다 뭐다 해서 어울려 다니며 술값 밥값이나 쓸 줄 알았지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 한번 해본 적 없었다. 천성이 게으른 탓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한심한 모습이다.
그러던 중 마침 LA 한인방송에서 일을 해보자는 연락이 와 ‘그래 이거다. 가수는 무슨 놈의 가수. 그건 내 팔자가 아냐’하며 미련 없이 보따리를 쌌다. 그 후 낯선 나라에서 구구절절 청승맞은 일을 겪었다.
내년이면 예순이다. 남 눈, 말, 악플 신경 끄고 산다. 남이 팔불출이라 손가락질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나는 정말 아내를 사랑한다. 빈 지갑을 채워주던 아내여서가 아니고 묵묵히 나를 믿고 곁을 지켜준, 하늘이 내려준 예쁘고 착한 내 아내를 사랑한다.
가수들도 힘든 시절이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후배들의 어려움이 느껴진다. 그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항상 가족의 곁을 지키고 사랑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