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의사는 최근 기자회견을 열고 “내 말이 왜곡돼 시장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앞으로 일정 기간 증시전망과 투자분석을 일절 중단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그는 시장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신동아’에 주식형 펀드에 대한 의견을 남겼다. 이제 막 발아한 간접투자의 문화가 열매를 맺기 위해선 판매사는 계열 운용사를 생각하지 않고 좋은 펀드를 고르는 일에만 주력하고, 운용사는 자사가 운용하는 기업이나 주식에 대한 평가에 겸허해야 하며, 증권사는 좋은 정보와 판단자료를 생산하는 일에만 주력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시골의사는 그렇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금융위기, 신뢰의 위기는 언제든 재발할 것이라고 일갈한다.
역설적으로 이는 자산운용사들이 현재의 시장을 얼마나 자신 없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증권사의 기류는 좀 다르다. 11월 초를 기준으로 ‘베어마켓 랠리(약세장 속의 강세장)’라는 전제를 깔고는 있지만, 대다수의 증권사는 900포인트를 허문 주가가 1200선까지 반등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장은 내년 초 2000포인트 돌파를 외치기도 하고, 또 어느 증권사의 투자전략 담당자는 연내 초강세장의 도래를 주장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동안 신중한 입장을 지속적으로 취하면서 투자자를 보호해오던 모 증권사 리서치센터장까지 1350포인트 이하에선 주식을 사라는 강세입장으로 선회하기도 했다. 자산운용사는 자신감을 잃고 있는데 증권사는 자신감을 보이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 이유는 바로 증권사와 운용사의 기능상 차이에 있다. 이론적으로 증권사는 고객의 자산에 대해 매매 중개와 매매 조언 그리고 매매 대행을 하는 기관이다. 이를테면 고객이 자신의 증권 계좌에 돈을 넣고 증권사 직원에게 조언을 부탁할 수도 있고, 아예 거래를 대신 해달라고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후자는 ‘매매 조언’이 아닌 ‘일임 매매’가 된다. 이는 이론적으로 불법은 아니지만, 고객과 증권사 직원 간의 이해상충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통로가 된다.
증권사와 운용사의 차이
증권사 직원 처지에선 자신이 담당한 고객이 잦은 거래를 통해 매매 수수료를 많이 발생시키면 시킬수록 인센티브를 많이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아무래도 고객의 자금을 자주 사고 팔아 수수료가 많이 나오도록 심정적으로 유도하게 된다. 하지만 고객의 처지에선 주식을 자주 사고팔수록 수수료 부담이 커지고 나중에는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물론 고객의 수익도 크고, 거래도 많아 증권사의 이익 또한 클 때는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객은 자신의 수익률이 나빠지는데 잦은 거래로 말미암아 수수료가 지급된다면 수익률 저하를 문제 삼게 된다. 대개 증권사의 일임 매매 분쟁이란 이런 데서 출발한다.
이런 일임 매매가 자주 문제를 일으키자 꽤 많은 증권사가 이런 유형의 영업을 자체적으로 억제하는 한편 그 대신 ‘랩 어카운트’ 제도를 도입했다. ‘랩 어카운트’는 고객이 맡긴 돈을 증권사의 리서치나 시장팀이 판단한 기준에 따라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증권사 일선 직원의 판단에 따라 임의로 매매하는 구조가 아니라, 증권사라는 조직이 가진 역량이 고객 자산의 운용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자산운용사에서 거대 규모로 운용하는 펀드가 아무래도 몸집이 무거운 점을 감안하면, 경우에 따라 이 상품의 수익률이 펀드보다 좋기도 하다. 하지만 이 방식은 고객의 입장에선 익숙하지 않고, 수수료도 비싼 편이라 그리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며 일부 고액 자산가나, 증권사에서 직접 관리하는 법인고객만 이런 형태의 거래를 한다.
반면 운용사는 대개(아닌 경우도 있지만), 공모건 사모건 여러 사람의 자산을 모아서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운용한다. 즉 증권사는 고객 1인을 대상으로 영업하지만, 운용사는 고객의 자금을 하나로 묶어 패키지로 관리 운용하는 셈이다. 따라서 아무래도 자산운용사는 증권사의 영업태도와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또한 많은 자금을 운용하는 운용사의 기능에 대해선 법적인 견제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펀드 운용자, 즉 펀드매니저는 이름 그대로 펀드를 운용하는 운용사에 집중되어 있고, 증권사에는 기업을 분석하는 애널리스트들과 영업을 담당하는 창구 영업직원들이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악어와 악어새
이런 운용사와 증권사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우선 운용사의 펀드를 창구에서 파는 판매처는 증권사와 은행이다. 많은 사람이 펀드 가입을 은행에서 하지만 사실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아무래도 증권투자 관련 상품은 증권사 직원들이 더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를 기준으로 보면 운용사는 ‘을’이고 증권사는 ‘갑’이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나라에서 실제 판매되는 펀드 수만 해도 거의 1000개에 육박하기 때문에 펀드란 우선 증권사에서 추천하고 판매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증권사나 은행을 모기업으로 두지 않은 중소형 운용사들이 탄탄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고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주식의 거래는 기본적으로 증권사를 통해야 하고, 이 거래를 수행하는 증권사는 그 수수료가 중요한 수입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운용사가 고객의 돈을 모아 펀드를 운용할 경우, 어떤 주식을 사고 어떤 주식을 팔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펀드매니저, 즉 운용사에 있지만, 이 결정이 실제 매매로 이어지는 곳은 증권사라는 얘기다. 증권사는 매매과정에서 수수료를 취한다. 이는 부동산 매매자가 공인중개소에 비용을 대고 계약서를 쓰는 이치와 같다. 이 경우는 물론 증권사가 ‘을’이고 운용사가 ‘갑’이 된다. 운용사는 자신의 펀드자금으로 주식을 사고팔 때, 자기 마음에 드는 증권사를 택할 수 있다. 계열 증권사를 두고 있는 운용사라 하더라도, 지나친 매매를 통해 계열 증권사의 이익을 늘려주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일정비율은 다른 증권사를 통해 매매해야 한다. 운용사의 선택은 곧 증권사의 수입으로 연결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증권사는 운용사가 자기 증권사를 통해 매매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자체 리서치센터에서 생산한 고급 정보를 운용사의 펀드매니저에게 전달한다. 운용사의 펀드매니저가 그 정보를 참고해 주식을 사고팔도록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증권사에는 운용사의 매매거래 위탁이 쏠리게 된다. 이때 여러 증권사가 특별히 밀어주는 펀드는 소비자에게 노출되기 쉽고 판매가 잘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면 운용사는 자신의 펀드를 많이 판매할 수 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관계가 바로 증권사와 운용사의 관계다. 둘 간의 관계에 있어 가장 이상적 선택은, 운용사는 가장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리서치센터를 가진 증권사를 거래창구로 많이 이용하고, 반면 증권사는 가장 좋은 운용능력을 가진 운용사의 펀드를 전문가의 눈으로 골라 고객에게 추천하는 것이다.
주가지수에 연동해 성과가 발생하도록 설계된 인덱스 적립식펀드.
하지만 실제 시장에선 이런 메커니즘이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다 알다시피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선 많은 운용사, 특히 시장 지배력이 큰 운용사는 대개 은행, 증권, 보험사를 모기업으로 두고 있다. 이 경우 증권사나 은행은 자기 계열의 운용사에서 설정한 펀드를 고객에게 우선적으로 권유하게 된다. 이런 일을 일러 그들은 ‘캠페인’이라고 부른다. 자기계열 운용사의 시장 지배력을 지켜주기 위해 판매 창구에 할당량을 배분하거나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식이 그것이다. 이때 고객의 안위나 권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캠페인은 이렇게 자기 계열사뿐 아니라, 수수료 비중이 높은 펀드에도 집중된다. 이를테면 총 펀드 수수료가 3% 일 때, 판매 수수료가 1.6%, 운용보수가 1.4%라면 정작 펀드를 운용한 운용사보다 그것을 판매한 창구의 수수료 이익이 더 커질 수도 있다. 그러니 판매 창구에서는 수수료 비중이 높은 펀드를 고객에게 집중 추천하는 캠페인을 벌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캠페인을 벌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펀드 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판매 수수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운용사는 자사의 펀드를 운용하는데 실력으로 평가받기보다는 펀드를 발매할 때 얼마의 수수료를 책정해야 하는지를 더 고민하게 되고, 좋은 펀드매니저를 고용하고 시장을 분석하는 데 투입될 운용비용 중에 상당액을 판매 수수료로 지급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결국 이런 구조에선 강력한 판매 창구를 가진 은행계 모기업을 두거나, 아니면 파격적인 수수료를 떼주는 운용사의 펀드만 살아남고, 강하지만 작은 펀드들은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고객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 펀드 고객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운용사와 증권사의 묘한 힘의 균형이 만드는 불합리성이 펀드의 안정성을 저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를 모기업으로 두지 않은 운용사는 자체 리서치 인력만으로 모든 기업을 분석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를 가진다. 따라서 증권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증권사는 기본적으로 자사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위해 기업과 시장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애널리스트의 집단, 즉 리서치 조직을 따로 두고 있다. 따라서 증권사는 좋은 정보를 운용사에 제공하고 운용사는 맘에 드는 증권사와 거래하면 된다.
고객 울리는 메이저 운용사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우리나라 증권사와 운용사의 관계는 지극히 민감하다. 소위 메이저 운용사는 증권사에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운용사는 소위 법인고객이기 때문에 증권사는 이들의 요구를 거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 요구 중 대표적인 게 리서치 보고서다. 우리나라 증권사의 리서치 보고서가 외국계 증권사의 보고서보다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이유는 우리나라 증권사의 리서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시장의 역학관계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이를테면 특정 증권사가 A기업의 실적 부진을 예상하고, 이에 대한 매도 보고서를 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이 종목을 보유한 운용사가 법인 고객일 경우 큰 사단이 난다. 그리고 심하면 보고서를 취소하거나, 없던 일로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런 현상은 ‘펀드 애널리스트’의 경우에 훨씬 심각하다. 펀드 애널리스트는 펀드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다가는 거대 법인 고객을 잃어버릴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 구조가 단순히 특정 종목이나 펀드에 한정된 것이라면 그저 한두 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체 시장에 퍼진 구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메이저에 속하는 운용사의 입장과 증권사의 입장이 서로 다르면 당연히 증권사는 운용사의 과도한 낙관론, 또는 비관론에 대해 평가를 하거나 의견을 내고 조율을 시도하는 게 임무지만 대개 경우는 증권사가 거의 절대적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장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피해자는 바로 그 둘 사이에 있는 고객이 된다. 운용사가 증권사의 자료를 참조하지 않고, 펀드매니저의 독단적인 의견(직관이나 감각)에만 집착하거나, 판매와 위탁이라는 갑과 을의 관계를 힘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 활용하는 만큼의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자본시장통합법이 통과돼 증권사가 아예 운용사와 선물회사, 심지어는 소액결제까지 취급하는 형태로 통합되면 제아무리 방화벽을 쌓고 이해상충의 문제를 감시하고 견제한다고 해도, 시장의 부적절한 기능들이 연탄가스처럼 스며들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심지어 미국 투자은행들이 SEC(미국증권위원회)로부터 민감한 감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 대규모 금융 사고를 터뜨린 데서 알 수 있듯, 금융회사의 규율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측면이 요구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두 기관의 전망이 다른 까닭
그렇다면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증권사와 운용사의 시장 전망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우리 시장에선 두 기관의 알력이나 역학관계로 인해 같은 시장 전망이 나와야 옳은데 말이다. 2008년 10월8일 현재 우리 시장의 미래에 대해 대개의 증권사는 비교적 낙관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매수’ 의견을 내는 증권사가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필자가 당시 직접 만나본 운용 책임자들의 의견은 그와 달랐다. 심지어 모 운용사의 운용책임자는 시중의 극단적인 의견들에 대해 오히려 동조하는 시각을 보이면서, 향후 시장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운용사의 경우는 예외 없이 이런 보수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시장은 대한민국 시장이라는 단일시장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모두 업계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소속회사의 성격에 따라 이렇게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앞서 말한 대로 증권사는 의견을 말하는 곳이고, 운용사는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증권사의 시장전망 타율이 얼마인지는 분기별로 정산돼 순위가 매겨지지 않지만 운용사의 실적은 펀드 운용수익률로 정확하게 공시된다. 이 순위에서 하위권을 기록하는 운용사는 이후 자본시장의 속성상 큰 부담을 안게 된다. 따라서 잦은 거래를 통해 수수료를 발생시켜야 하는 증권사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운용사는 지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산운용사의 펀드매니저들. 이들의 기업분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다른 증권사의 리서치센터장은 이렇게 말했다.
“2008년 11월6일 기준 우리나라 주가 순자산 배율이 1배 수준이고, 주당 순이익 배율이 9배 수준이므로 역사적 저평가 국면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막가파 주식 분석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문제는 ‘역사적’이라는 말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주가 순자산 배율은 과거 0.6~0.7배까지 내려간 적이 있고, 주당 순이익 배율은 6배 수준 이하까지 하락한 적도 있다. 특히 주당 순이익 배율은 과거 우리 증시에서 대개 6 수준에서 하한선을, 14 수준에서 상한선을 기록해왔다. 이 리서치센터장의 ‘역사적’이라는 발언에는 ‘최근 우리 증시의 가격배율 평균으로 볼 때’라는 말이 빠졌다. 이 말은 최근 주가가 고평가됐던 시기를 기준으로 많이 싸졌다는 의미지, 우리 증시 30년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전혀 ‘역사적 저점’이 아니다.
이 보고서를 정확하게 다시 쓰면 ‘최근 5년간 우리나라 기업의 가치기준으로 볼 때 저평가된 것이다’라고 하는 게 옳다. 더구나 기업의 청산가치인 순자산 배율을 증시 저평가의 논거로 삼은 것 자체가 낯 간지러운 일이다. 기업의 자산가치란 따지고 보면 현금을 제외하면 공장 부지나 설비 등 돈이랄 게 별로 없다. 기업을 청산하려고 하는데 쓰던 책상이나 컴퓨터, 그리고 기계들을 제값으로 쳐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에서 순자산 배율이라고 하면 대규모 부동산을 보유한 기업(그나마 그것도 부동산 침체기에 들어가면 환금성이 없어지거나 평가익이 하락해서 기준이 모호해진다), 혹은 현금을 자산으로 보유한 금융기관 등에서나 일부 쓰일 수 있는 기준일 뿐이며 그것을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은 지는 이미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언론이나 보고서에는 증시 저평가의 이유를 들 때마다 버젓이 등장하는 게 바로 ‘순자산 배율’이다.
이런 식이니 일반인은 고사하고 운용사가 증권사의 이야기를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운용사의 이런 논리도 사실은 궁색한 데가 있다. 설령 증권사의 시황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시장을 향한 메시지, 즉 일반 고객을 향한 서비스일 뿐, 증권사의 시장 전망을 운용사가 참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증권사도 알고 운용사도 아는 일이다. 즉 증권사의 시황 보고서는 증권사도 굳이 발표하고 싶지 않지만 지식이 부족한 일반 고객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망되는 것이기 때문에 운용사는 그것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10월10일 열린 증권사 사장단 모임. 주가 폭락으로 고민에 빠져 있다.
하지만 운용사에서 무시해선 안 되는 게 한 가지 있다. 바로 증권사의 개별 기업분석이다. 별도의 리서치 조직이 없는 특정 운용사가 2000개가 넘은 기업을 일일이 분석하고 업종이나 업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운용사가 증권사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고객의 돈을 투자 가능한 모든 대상을 바탕으로 운용하지 않고, 펀드매니저가 아는 기업만을 대상으로 편협한 범주에서만 운용함으로써 고객 자산의 분산과 투자 기회의 손실을 입히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운용사는 증권사의 기업분석 보고서를 충분히 검토하고 증권사의 의견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 종목을 선택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여기에는 운용사의 편견을 막는 측면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함의가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운용사가 특별한 이유 없이 특정 기업의 지분을 확대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운용사가 지분을 집중 매입한 효과로 주가는 오르지만, 막상 운용사가 그것을 팔려고 하면 주가는 하락한다. 매집자의 운명인 것이다. 하지만 운용사가 정말 혜안이 있어서 기업의 실적이 아주 좋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투자자가 주목하기 전에 미리 주식을 사들인 혜안을 발휘한 것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제 이 운용사가 사들인 주식이 주가가 올랐더라도 뒤늦게 다른 투자자들이 그 기업의 미래성장성을 주목하고 추격매수를 함으로써 그 운용사가 비싼 값에 되팔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운용사는 소위 대박을 맞은 셈이 된다.
하지만 이런 운용사의 판단이 틀렸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투자자는 그저 펀드매니저와 운용사의 감각이나 직관만 믿고 자신의 고유자산을 한곳에 집중 투자하는 셈이 된다. 이때 운용사가 고객에게 이 기업에 투자한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히 ‘우리 감각으로 그랬다’라는 말 외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되면 시장에서 투자자와 금융기관 사이의 신뢰가 무너진다. 최소한 ‘증권사의 리서치 보고서를 참조했고, 당시 운용사의 판단뿐 아니라, 우리와 이해관계가 없는 증권사의 능력 있는 애널리스트의 보고서에도 이 기업이 미래잠재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라는 설명 정도는 있어야 고객에게도 양해가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의 능력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과거 우리나라 금융사들은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획득하기에 많은 약점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IT 버블 때의 영업행태다. 당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은 주가지수 6000포인트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다녔다. 이는 그것이 실제 가능한 확신이었다고 해도 명백하게 잘못된 일이었다. 증권사 사장은 묵묵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장이 직접 나서서 고객에게 펀드를 팔고, 언론플레이를 하며, 강연회를 다니고 영업활동을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이 얼마나 원시적이었는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그뿐만 아니다. 2000년 초 우리나라 증권사들이 내놓은 주가 전망은 실로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2000년 이전까지 우리나라 기업의 회계장부는 그 자체가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증권사는 분식과 허위로 점철된 장부를 바탕으로 기업과 시장을 평가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그 분석은 스스로의 함정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부 신중한 운용자를 제외하고 IT 거품에 대한 위험성을 잊고, 집단 환각에 도취했던 것만큼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 증권기관의 발전
진짜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많은 증권맨이 2000년 초 시장이 이미 약세장에 접어들었음을 알았으면서도 투자자에게 그것을 경고하지 않았고, 리서치센터의 애널리스트 역시 기업의 비밀 내부정보에만 의존하며 큰 틀에서 ‘분석’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그뿐만 아니라 객장에선 여전히 상승장의 영업 관행에 젖어 잦은 거래를 통해 투자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비도덕적인 일이 횡행했다. 그 결과 투자자는 증권사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후 증권시장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했다. 리서치 인력의 전문성이 강화되고, 거시와 미시분야에서 이코노미스트와 기업분석의 전문가들이 속속 포진하면서 증권시장의 분석이 한 단계 향상된 것. 특히 일련의 붐을 타고 많은 펀드가 운용되면서 펀드매니저의 운용경험도 상당히 누적됐다. 물론 이번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하고 고객의 자산을 위험에 빠뜨린 측면은 아쉽지만, 사실 이 부분은 미국이나 선진국 굴지의 금융기관들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니 이 부분을 두고 한국 증권업의 역량 한계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위기에서 얻는 타산지석
증권사는 좋은 정보와 판단 자료를 생산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시장에서 이제 막 발아하기 시작한 간접투자의 문화가 활짝 개화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선 필자는 이런 부분들이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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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운용사, 증권사, 기타 판매사가 이익의 타깃을 명확히 해야 한다. 판매사는 계열 운용사를 생각하지 않고 좋은 펀드를 고르는 일에만 주력하고, 운용사는 자사가 운용하는 기업이나 주식에 대한 평가에 겸허해지며, 증권사는 좋은 정보와 판단 자료를 생산하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투자자는 보호되고 시장의 신뢰가 형성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지금 자본시장의 신뢰도로 볼 때 겨우 자리 잡기 시작한 간접 투자문화에 위기가 오고, 그것은 곧 전체 자산시장에 대한 위기가 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