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절을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아무도 그 시신을 챙기지 않아 시신이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예수 편을 든다는 인상을 줄 경우 자신의 목숨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당시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나아가 장사를 지내겠다며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그는 예수의 시체를 넘겨받은 뒤 돌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이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다. 요셉은 예수의 숨겨진 제자였다고 한다. 요셉은 예수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12명의 제자’에도 속하지 못했고, 그가 예수의 제자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요셉은 로마제국 의회 의원이었다. 예수의 제자인 사실을 숨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목숨을 내건 일종의 ‘커밍아웃’을 하면서 손수 예수를 장사한 요셉을 기독교인들은 존경하고 있다.
예수의 ‘복심(腹心)’이라 할 수 있는 제자 12명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흩어져 자취를 감췄다. 목숨을 내걸고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은 예수가 ‘잘나갈 때’는 예수의 제자라며 나름대로 권세와 명예를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예수가 필요로 할 때는 옆에 없었다. 마지막에 예수 옆에 남은 사람은 숨겨진 제자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2. 요셉을 찾는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9개월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여권은 정비가 안 되고 어수선하다. 정부 출범 1년도 안 돼 또다시 청와대 조직개편과 연말 개각설이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 연말 개각설이 퍼지면서 공직사회는 동요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초 공직사회를 장악하지 못해 공직사회에서는 아직도 “정권교체가 진행 중”이라는 말마저 나온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연말 개각설을 띄우면서 많은 의원이 ‘모수자천(毛遂自薦)’을 하고 있다. 여당으로서 제대로 일 할 생각은 뒷전이고 ‘자리’만 탐하는 격이다. 청와대는 대통령만 바라보고 있을 뿐 국정운영에 총대를 메는 사람이 없다. “청와대에는 이명박 대통령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권이 이처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은 주인 의식을 갖는 ‘중심세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당초 이명박 정부를 만들었던 ‘친이(친 이명박) 세력’이 중심 역할을 하리라 예상했지만 권력을 놓고 서로 총질을 해대다가 대부분 ‘변방’으로 밀려났다. 한나라당내 일부 친이계 의원들은 ‘친이계’라는 딱지를 떼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 대신 ‘떠오르는 차기 주자’에 줄 서기 위해서다. 여당 내에서는 ‘월박(越朴)’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친이에서 친박(친 박근혜)으로 옮겨가는 사람들의 행태를 꼬집는 말이다.
대통령의 오랜 측근은 “미국산 쇠고기 파동 후 이 대통령이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주변에 손발을 맞춰 일할 사람이 없더라”고 말했다. 이 측근은 “이 대통령이 잘 나갈 때 ‘측근’ 행세를 하며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대통령이 정말 어려울 때 사심 없이 나서주는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3. 변방으로 밀려난 개국공신들
이명박 정부를 만든 개국공신은 많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함께 실질적으로 국정을 꾸려나가는 ‘핵심 측근’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이상득 국회의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박형준 대통령홍보기획관, 김백준 대통령총무비서관 등이다.
많은 측근은 친이계 내부 갈등과 불신이 원인이 돼 ‘변방’으로 밀려나 있다.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 정두언 의원,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곽승준 전 대통령국정기획수석, 박영준 전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 이방호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 정종복 전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권력의 뒤안길을 너무 빨리 맛봐서일까. 이들은 한결같이 친이계의 재단합을 강조하며 이명박 대통령, 이명박 정권, 대한민국의 성공을 기원했다. 자신이 요셉이 될 수 있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서로 날카롭게 공격하던 변방의 개국공신들은 자신의 과거 모습에 대한 반성도 빠뜨리지 않았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다.
▼ 이재오 전 최고위원
“오래만이야. 워싱턴에 한번 와. 여기 단풍이 정말 끝내줘.”
미국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에 거주하면서 존스홉킨스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11월11일 기자가 건 전화를 반갑게 받아줬다. “건강은 어떠냐. 요즘 사는 낙(樂)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전 최고위원은 “잘 지내고 있지. 건강해. 요즘 낙은 단풍으로 물든 워싱턴 시내를 자전거로 오가며 세계적인 학생들에게 한국학을 가르치는 거, 그것만한 게 뭐 있겠나”라고 답했다. 이 최고위원은 집에서 대학까지 자전거로 1시간10분 거리를 매일 왕복하고 있다.
이 최고위원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이 전 최고위원의 귀국 시점 등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관심이 많다”며 기자가 은근슬쩍 정치 얘기로 주제를 옮기려 하자 “정치 얘기는 하지 말지. 오랜만에 전화해서. 그나저나 한번 놀러와. 여기 정말 좋아”라고 화제를 다시 돌렸다.
한참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이 전 최고위원이 불쑥 “그런데 말이야. 이명박 정부가 정말 성공해야 하는데 걱정이야. 여기서는 이런저런 안 좋은 소식만 들리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밖에 나와 있으니까 정말 나라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하고 있어.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을 놓고 그렇게 우리끼리 얼굴 붉힌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라고 했다.
“서로 그만 으르렁대고…”
이 전 최고위원은 “앞으로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뭘 할 생각이냐”는 질문에 “글쎄, 지금은…”이라며 말끝을 흐리다가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이제는 서로 그만 으르렁대고 단합해서 국민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이명박 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으로 한때는 정권의 ‘2인자’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4월 총선을 앞두고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의 불출마를 권고하면서 이 의원과 사이가 벌어졌고, 총선에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에게 석패해 지난 5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 전 최고위원은 송별회에서 “나를 제물로, 희생양으로 해서 성공하는 정부, 성공하는 대통령을 만들어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정두언 의원
11월7일 밤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 빌딩 13층에서 내근을 하고 있던 기자의 귓가에 많이 익은 목소리와 노래가 들려왔다. “진실한 마음이 지금에 당신을 만들었어, You are so beautiful.”
가수협회 가수로 등록돼 있는 정두언 의원이 2년 전쯤 창작곡으로 발표한 노래였다. 정 의원이 청계천에서 열리는 한 행사에 초청돼 이 노래를 부른 것이다. 공연이 끝난 뒤 시민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좋았다. 무대에서 내려온 정 의원에게 잽싸게 전화를 걸었다.
기자가 “정말 가수 같던데요. 반응도 예상외로 좋고”라고 말하자, 정 의원은 “야, 가수보고 가수 같다고 하면 욕 아니냐. 그리고 반응이 좋은 것은 노래를 잘할 거라고 전혀 기대를 안 하다가 그나마 조금 하니까 그런 거지”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에 버금가는 정권의 실세 중 실세였던 정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당선인의 정권 인수위원회를 끝으로 자의반 타의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다. 이후 이상득 의원의 총선 불출마 권고에 참여하고, 박영준 전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과 갈등을 겪으며 친이계 내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표현되기도 했다.
“의정활동 하고 지내지”
정 의원은 요즘 각종 행사에 초청받아 노래를 부르고, 뮤지컬에 출연하는 등 일종의 ‘외도’를 하고 있다. 11일 전화통화에서 “뭘 하고 지내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 의원의 답변은 간단했다. “의정활동하고 지내지.”
정 의원은 “그런데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어.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 의정활동인데 의정활동 한다고 하면 별일 안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단 말이야. 몰라서 그렇지 의정활동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바쁜 줄 알아?”라고 반박했다.
“정권을 만든 사람으로서 이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마디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추궁에 정 의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이런 말 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정권창출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무한책임을 갖고 있지. 정부가 표류하고 있는 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해. 이명박 정부는 반드시 성공해서 재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면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야. 항상 준비하고 있어.”
정 의원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동안 여러 가지 내부적 잡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계속 자숙할 생각이야.”
▼ 곽승준 전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
“학생들과 강의시간에 토론하다 보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을 때가 많다. 대부분 아이디어 차원이지만 조금만 가다듬으면 좋은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게 꽤 많다. 수업료 안 내고 공짜로 배우는 셈이다. 그런 아이디어는 수첩에 꼼꼼히 적어놓고 있다. 언제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잘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꼼꼼히 챙기고 있다.”
학교로 돌아간 곽승준 전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은 학생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으로서, 대통령국정기획수석비서관으로서 못다 이룬 일들에 대한 아쉬움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일까. 곽 전 수석은 다른 누구보다도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또 정권을 만들었던 개국공신들의 단합도 강조하고 있다. 친이계의 ‘가교’ 구실을 자처하고 있는 곽 전 수석이 10일 전화통화에서 “친이계가 지난 대선을 치렀을 때처럼 단합된 힘을 보여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곽 전 수석은 친이계를 이끌고 있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과 정두언 의원에 대해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했다. “정두언 의원이 대선을 치를 때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젊은 감성이 있어 젊은이들과 잘 소통했다. 정권 인수위원회 시절 2선으로 밀려난 뒤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대승적 차원에서 후배들이 섭섭하게 했더라도 포용력으로 크게 안아줘야 할 것 같다.”
“MB노믹스 확실히 습득하라”
곽 전 수석은 이재오 전 최고위원에 대해서도 한마디 던졌다. “이 전 최고위원에게는 아픈 얘기지만 총선에서 왜 졌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남을 좀 더 배려하는 모습, 이런 것들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이 전 최고위원은 친이계에서 필요한 사람이다.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전 최고위원은 대통령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는 친이계 초선 의원들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콘텐츠와 MB노믹스를 확실히 습득하고 의정활동을 해나가야 한다”면서 “이명박 정부의 성공이 곧 자신들의 성공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몸 바쳐 일하는 사람들이 청와대와 한나라당에서 없어졌다. 친이계가 결집해 힘이 세지면 그것은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정책들을 잘 집행하면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박영준 전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
정두언 의원으로부터 ‘인사전횡 장본인’이란 비판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난 박영준 전 대통령기획조정비서관도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최근 만나본 박 전 비서관은 활기에 차 보였다. 한동안 마음고생을 꽤 했지만 이제는 이명박 정부를 위해 백의종군할 준비가 된 듯했다. 청와대를 나와 지낸 5개월은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기간이었다고도 했다.
박 전 비서관은 10일 전화통화에서는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에 “청와대에 있는 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해외도 다녀왔다”고 했다. 유럽 동남아시아 등 6, 7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박 전 비서관은 특기인 ‘조직’도 챙기고 있었다. 흩어져 있던 중도세력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대선 때 지역별로 조직한 각종 포럼을 학술단체별로 재조직해 2개 사단법인으로 출범시켰다. 박 전 비서관은 또 이 대통령의 대선 외곽조직인 ‘선진국민연대’를 해체하고 대신 지역 현안이나 녹색 성장과 관련된 단체로 전환시키고 있다.
박 전 비서관은 정두언 의원으로부터 비판 받은 것을 포함해 그동안 친이세력 내 갈등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못했다”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 반성할 점이 있다”고 했다. 이어 “그동안 여러 가지 실수도 있었고, 10년 만의 정권교체에 따른 혼돈도 겪었다”면서 이명박 정부가 “세계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정권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박 전 비서관은 친이계를 향해 “이제는 작은 차이와 개인적인 불만을 모두 접어두고 이명박 정부의 위기 극복을 위해 총단결해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대통령의 의중과 정책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나서서 몸을 던질 때”라고 했다.
▼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은 7월 대통령실장에서 물러난 뒤 학교로 돌아갔다.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지도하면서 교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지리학연합회 사무총장도 맡고 있는 류 전 실장은 최근 신임회장단 집행위원회 회의를 서울에 유치하는 등 대외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를 만든 개국공신인 만큼 간접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지원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이 대통령의 대선 싱크탱크였던 국제전략연구원(GSI)을 모태로 한 민간 연구소가 문을 열었는데 류 전 실장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이 연구소는 미국 보수진영의 싱크탱크인 ‘후버 연구소’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대선 이후 흩어져 있는 학계 여론 주도층을 재결집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초심대로, 실용으로…”
류 전 실장은 청와대 1기 비서진이 정기적으로 회합하는 구심점이 되고 있다. 그는 10일 전화통화에서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이 언론에 대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내가 나설 때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의 한 지인은 10일 통화에서 “류 전 실장의 지론이 ‘비서는 얼굴도 없고 입도 없다’는 것 아니냐. 류 전 실장은 ‘일류국가를 만들겠다는 이 대통령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초심대로 꿋꿋하게 국정을 이끌었으면 좋겠다. 세계 질서가 개편되는 과정에선 실용주의에 입각해 미래를 보고 유연하지만 확고한 방향을 갖고 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소개했다.
▼ 이방호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
“설마 했는데…. 솔직히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에게 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대통령을 만든 실세’라는 꼬리표가 아마 나를 자만하게 만들었나 봐. 총선 과정에서 사무총장과 공천심사 위원으로 밤잠 설쳐가며 일하다 보니 정작 지역구는 자주 못 가게 되더라고. 유권자들이 후보를 만나고 싶어하는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던 거지.”
6일 서울 광화문 사석에서 만난 이방호 전 한나라당 사무총장은 달라져 있었다. 지난 4월 제18대 총선에서 패배해 정권 실세에서 평범한 인사로 전락한 탓일까. 이전에는 없던 겸손함이 느껴졌다. “주일이면 교회를 빠지지 않고 가. 신앙심이 더 깊어졌지. 기도를 하면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반성도 하고….”
이 전 총장은 자신의 지역구인 경남 사천과 서울을 오가며 재기를 꿈꾸고 있다.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다가가고 있고, 서울에서는 친이계의 단합을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내년 1년은 이명박 정부의 명운이 달린 중요한 시기”라면서 “이명박 정부의 철학과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정권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상득 의원, 이재오 전 최고위원, 정두언 의원, 박영준 전 비서관 등 누구 한 사람도 배제하지 말고 이제는 다 함께 가야 한다”며 친이계의 대단결을 강조했다.
정종복 전 한나라당 사무부총장도 친이계의 단합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 전 총장은 법무법인 ‘홍윤’에서 고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경주에서 있을 국회의원 재선거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명박 정부가 엇박자인 것처럼 국민 눈에 비치는 것은 정권의 중심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친이계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대통령을 중심으로, 대통령을 만들 때처럼 합심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친이 재결집 그리 쉬울까?
권력의 정점으로부터 비켜나 있는 핵심 측근들은 자신이 속한 친이계가 이 대통령의 ‘요셉’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를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몸을 던질 준비가 돼 있다고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친이계가 다시 힘을 합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지금까지 10개월 동안 친이계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이들이 부르짖는 친이계의 재결집은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대통령의 대선 초기 캠프인 안국포럼 멤버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3,4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친박 대 친이’ 관계보다 어떤 경우에는 더 갈등과 대립이 심하다고 한다. 한 안국포럼 출신 의원이 “더 이상 안국포럼이라는 울타리는 의미가 없다”고 말할 정도다.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명박 정부는 지금 ‘풍전등화(風前燈火)’다. 내부단결이 없으면 정권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권좌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권력을 다시 찾고 싶은 욕구도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들이 다시 ‘단합’을 얘기하는지 모른다. 이명박 정부가 실패하면 종속변수인 이들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변방으로 밀려난 개국공신들이 친이계의 재결집을 한목소리로 외침에 따라 친이계가 다시 결집할 가능성은 커졌다. 하지만 이 결집이 발톱을 숨긴 전략적 제휴가 될지, 아니면 국익을 위한 진정한 화학적 결합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10월 31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