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득하게 기다린 전략
외환위기로 국가가 부도 위기에 처한 혼란기에 주식시장이 어땠는지를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객의 자산이 감소하는 현실이 1년 넘게 지속되었기에 주식시장에는 절망과 한숨만이 가득했다. 경제가 10년 전으로 후퇴해서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를 장식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의 경제가 붕괴한 것이 아니라 단지 금융시스템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라는 믿음으로 우량기업에 투자하며 버텼다.
결국 그 기다림은 경제회복에 따른 주식시장의 상승으로 보상받을 수 있었다. 한국경제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진득하게 기다린 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IT버블이라는 새로운 시련이 나에게 닥쳐왔다. 외환위기가 지나가고 신성장동력으로 IT가 부각되면서 IT기업의 주가는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IT는 우리의 삶을 근본부터 바꿀 혁명적인 기술이기에 IT 주식의 폭발적인 상승은 어느 정도 예견했으나 문제는 그것이 너무 과했다는 것이다.
나는 IT 주식의 질주가 버블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IT주식을 매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IT기업이 아닌 전통산업을 영위하는 회사 주가는 우량기업임에도 불구하고 폭발적 상승장 속에 무참히 하락하고 있었다. 당시 우량 굴뚝기업의 주식만을 보유하고 있던 나의 심정은 참담하기까지 했다.
“기술주 열풍으로 펀드 수익률이 하락하고 투자자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나는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느낌이 들고 손이 떨렸다. 연말에 라식수술을 받았는데, 스트레스로 인해 수술도 실패했다. 귀에는 물이 찼고 온몸이 구석구석 아팠다.” (拙著 이채원의 가치투자 ‘가슴 뛰는 기업을 찾아서’ 에서)
‘혹시 나 혼자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회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비이성적인 버블에 열광했던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피하지 못했고, 원칙을 지키면서 참았던 투자자들은 좋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유례가 없는 폭락과 버블을 짧은 기간에 경험하면서 내가 얻은 ‘원칙과 기다림’이라는 교훈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최근 거론되는 금융위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10년 전의 버블을 떠올리곤 한다. 10년 전과 지금은 비이성적인 감정이 이성을 압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경제지표들이 말해주는 우리의 현실이 어렵기는 하나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만큼 절망에 빠질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대응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얼마 전까지 국가가 부도날 수 있다는 공포가 한국을 뒤엎더니 이제는 미증유의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공포로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차분하게 현실 바라봐야
물론 악화하는 경제상황으로 우리는 분명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실물과 금융부문의 부진이 과거에 우리가 극복해온 위기보다 압도적일까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대우그룹, 현대그룹이 해체되는 과정이라든지, 카드 버블이 붕괴할 때의 상황을 떠올려보라. 그때도 대한민국이 붕괴할 듯한 공포가 만연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는 해결됐다. 지금 우리 앞에 떨어진 문제 역시 차분하게 대응한다면 충분히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시기일수록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외환위기 당시와 비교했을 때 대한민국 경제의 체력은 강해졌고, 우량기업들의 체질 역시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졌다. 눈앞의 공포에 휘둘리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대응한다면 지금의 위기는 기회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