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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주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⑤

‘오적’·생명담론과 김지하

70년대를 걸머진 양심 “촛불 켜라 모셔야겠다”고 나선 뜻

  • 윤무한 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오적’·생명담론과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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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발적인 담시(譚詩)와 풍자로 폭풍 같던 정권의 칼끝에 섰던 1970년대, 그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감히 돌이킬 수 없는 절창이었다. 죽음과 죽임이라는 실존의 극단을 경험한 그가 어두운 감방의 끝자락에서 ‘생명사상’에 심취한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었을 것이다. 끝내 성공하지 못한, 혹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스스로 들판에 버려진 ‘모로 누운 돌부처’ 김지하가 이제 다시 시대에 좌와 우를 묻는다.
‘오적’·생명담론과  김지하
1970년대의 어느 날, 야당이던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동빙고동의 도둑촌’에 관한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그 무렵 동빙고동 일대에는 고위층과 재벌들이 남아도는 돈을 주체할 길이 없어 너도나도 다투어 호화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그곳을 가리켜 ‘도둑촌’이라고 불렀다. ‘사상계’는 이미 1970년 2월호에 그 실태를 르포로 다루었다. 당시가 1970년대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번 살펴보자.

“이들 주택의 건축비는 최저 5000만~6000만원에서 최고는 3억원…건축자재는 외국 수입품이 사용되고, 사치품의 구입을 규제하는 법률은 마이동풍, 건물의 유지비만도 매월 10만원은 들며, 승용차 두 대, 구내 엘리베이터, 응접실의 열대어 등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오적’·생명담론과  김지하
때마침 김지하는 ‘사상계’로부터 한 편의 정치풍자시를 청탁받았다. 김지하는 ‘민주전선’의 ‘도둑촌’기사를 소재로 삼아 판소리 스타일의 풍자적 서사시 형식으로 쓰겠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미아리의 어느 골방에 틀어박혀 써 갈긴 것이 300행이 넘는 담시‘오적(五賊)’이다. 김지하 자신이 잘 모르거나 확인해 보지 않은 부패사안들, 도둑질 방법, 호화판 저택의 시설이 펜을 드는 순간 단박에 떠올라 신명나게 써 내려간 것이다.

확인도 안 해보고 짐작으로 두들겨대거나 비아냥거린 부패, 호화, 사기, 비리 등의 묘사는 그 뒤 그가 중앙정보부에 붙들려가 조사를 받을 때 크게 문제가 되었다. 취조관들은 입을 모아 “우리가 가서 보고 확인한 뒤에 과장이면 너는 골로 간다. 반공법에 국가보안법, 간첩죄에 해당한다, 알겠어?”라고 을러댔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다섯 도둑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담은 풍자 담시였다. 이들을 꼬집어 짐승 이름을 뜻하는 벽자(僻字) 투성이의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에 옥편을 찾아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다섯 도둑 이야기’의 파문

‘오적’을 쓰던 당시의 심정을 훗날 김지하는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다”는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 도입부는 이렇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 내 어찌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 / 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겠다 /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겄다

‘오적’은 이어 다섯 도둑의 악행을 차례대로 묘사해나간다.

(재벌) 재벌놈 재조 봐라 /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 세금받은 은행돈, 외국서 빚낸 돈 / 온갖 특혜 좋은 이권 모조리 꿀꺽/이쁜 년 꾀어 첩삼아, 밤낮으로 작신작신 새끼까기 여념없다/귀띔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몫잡고…

(국회의원)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끓는 목소리로 / 혁명공약 모자 쓰고, 혁명공약 배지 하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 우매한 국민 저리 멀찍 비켜 서랏 / 골프 좀 쳐야겠다…

(고급공무원) 어허 저놈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 산같이 높은 책상 바다 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앉아 / 쥐뿔도 공 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 한 손은 노땡큐 다른 손은 땡큐땡큐 / 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 없어…공금은 잘라 먹고 뇌물은 청해 먹고…

(장성) 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 죽는 쫄병들은 /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 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 집 크게 지어놓고 부속차량 피복 연탄 부식에 봉급 위문품까지 떼어먹고 배고파 탈영한 놈 군기잡아 주어패서 / 영창에 집어넣고…

(장차관) 굶더라도 수출, 안 팔려도 증산 / 아사한 놈 뼈다귀로 현해탄 다리 놓아 / 가미사마 배알하듯 / 예산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 / 행여 냄새 날라 질근질근 껌 씹고 캔트 피워 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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