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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교수의 ‘재미학’ 강의 ⑧

까꿍놀이와 정원 가꾸기의 공통점

  • 김정운 명지대 교수·문화심리학 entebrust@naver.com

까꿍놀이와 정원 가꾸기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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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사라지고 있다. 사는 게 각박해져서 그런지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게 쉽지 않다. 피해를 당할 것 같아 물러서고, 도움이 될 것 같아 다가서다 보면 관계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간혹 우리로 묶이기도 하지만 그 끈은 금세 풀린다. 오늘을 사는 많은 이가 외로움을 느끼는 건 그 우리라는 울타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
까꿍놀이와 정원 가꾸기의 공통점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한국 사람이 무례하다고 한다. 지나가다 어깨를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꼭 덧붙인다. 정말 그렇다. 독일에서 13년을 살고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 우리 부부도 매일 우리나라 사람들의 무례함과 불친절함에 대해 불평했다. 힘세고 용감한 아내는 매번 쫓아가서 따졌다. 생전 처음 당하는 황당함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상대방을 돌려세우고, 씩씩거리는 아내를 끌고 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을, 몸집 큰 아내가 냅다 쫓아가서 따지니 상대방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무례한 것일까? 한동안 깊이 고민했던 주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무례한 것이 아니다. 무례해 보일 뿐이다. 다들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한국인의 교양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나라의 국민으로 글로벌한 매너와 규칙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조건 무례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왜 그런지를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상호작용의 원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양의 근대화란 다양한 방식의 집단, 즉 민족, 계급, 종족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나(I)’라고 하는 주체의 성립과정이다. 물론 이 집단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근대성이라는 비판적 사고를 통해 집단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적 합리성의 근거는 ‘나’라는 주체의 성립이다. ‘나’가 있어야 그에 상응하는 ‘너’라는 존재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나’와 ‘너’의 동등한 관계로서 만날 때, ‘우리(We)’가 가능해진다.

서양인은 타인의 존재는 항상 ‘나’의 상대방으로서의 ‘너’다. 동등한 주체로서의 상대방에 대한 무례함은 곧 ‘나’라는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곧바로 ‘날씨’이야기를 할 수 있고,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너’의 존재를 인정할 때, ‘나’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가 저서 ‘Ich und Du’에서 ‘나’라는 존재의 근거로 ‘너’와의 관계를 지적하고, ‘나’와 ‘너’의 관계를 모든 의미 구성의 기본단위로 여기는 이유도 바로 이런 문화적 맥락 때문이다.

‘우리’가 성립되는 그 순간



반면 한국인의 상호작용 양상은 사뭇 다르다. ‘나’와 ‘너’의 상호작용이 서구인들처럼 곧바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라는 상호 주체의 만남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남’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야만 가능하다. ‘남’은 상호작용의 상대방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질문이 무서운 것이다. ‘남’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무시해도 된다.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건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타인이 일단 ‘우리’라고 하는 경계 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 ‘타인’은 더 이상 남이 아니다. 그에게 절대 무례해서는 안 된다. ‘우리’라는 경계선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상대방은 ‘너’라는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나’와 ‘너’라는 주체적 상호작용은 ‘우리’가 성립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뤄진다는 이야기다.

서구인에게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성립된다면, 한국인은 ‘우리’가 먼저 만들어지고 난 후에 비로소 ‘나’와 ‘너’가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섭섭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혹은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럴 수 있는 거니?” 거기다 대고,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이야기는 바로 ‘우리’라고 하는 울타리를 깨고, 바로 ‘남’이 되자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남’이 되는 순간 어떠한 합리적 상호작용도 성립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한번 성립된 ‘우리’는 좀처럼 깨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서구인들과 달리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너’에게 ‘나’는 정말 간까지 빼줄 만큼 잘한다. ‘우리 사이’에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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