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안에 있어야 행복하다
독일에 유학 가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노력한 일은 독일 친구를 사귀는 일이었다. 주말만 되면 학생들끼리 모이는 이러저러한 파티에 정말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러나 ‘굿텐 탁’만 하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독일에 왔는지에 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문을 트고자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면, 남쪽이냐 북쪽이냐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무지 독일 학생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주제를 찾을 수 없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들도 그저 날씨 이야기, 정치 이야기, 연극이나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대화하고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떻게 그 파티에 왔는지 서로 묻지도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는 듯했다. 서로 모르는 이들끼리 그토록 재미없는 이야기를 몇 시간이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계속 인사말만 하다 더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썰렁해지면 뒤에서 혼자 포도주만 홀짝거렸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구경할 수 없었던 다양한 포도주를 종류별로 홀짝거리며 공짜로 마시는 재미도 사뭇 쏠쏠했다. 혼자 포도주 마시고, 혼자 취한 나는 미친 척 기타를 들고 큰소리로 노래했다. 그러면 모두들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름 연습한 독일 노래를 부르며 중간중간 ‘에브리바디’를 외치면, 그 심심한 독일친구들은 열심히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게 전부였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쓸쓸할 수 없었다. 거의 4,5시간 이야기를 나눴지만 정작 이름이나 소속 학과, 사는 동네를 제대로 알게 된 녀석은 한 명도 없었다. 내 개인적 삶에 관해 물어온 녀석도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생소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다 그랬다. 만나는 그 순간부터 ‘나’와 ‘너’가 만나 아주 쉽게 ‘우리’가 되지만, 그뿐이었다. 돌아서면 그 ‘우리’는 아주 쉽게 해체돼버렸다. 발생론적으로 서구인들의 ‘우리’와 한국인들의 ‘우리’는 이렇게 질적으로 다른 종류인 것이다.

한국인 대부분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야 안도감을 느낀다.
주어를 생략하는 습관은 일부 아시아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주어로 ‘내’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우리’를 넣는 이 언어 습관은 한국어에서만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만들고, ‘우리’안에 있어야 행복한 까닭이다. 너와 나의 복수인 ‘우리’와 울타리를 뜻하는 ‘우리’가 같은 단어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가족주의와 집단주의가 그토록 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