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외교 분야의 경험을 묻는 질문에 “알래스카에서는 러시아도 보인다”고 응수하거나, 미국 행정부가 지난 6년간 추구해온 ‘부시 독트린’에 대해 단어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식이다. 선거 막판에는 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장난전화에까지 속아 넘어가면서 백치미의 이미지가 더욱 굳어졌다. 이 때문에 공화당 내에서조차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한탄이 흘러나왔다.
페일린은 ‘하키맘’(자녀 교육에 열성인 엄마), ‘월마트맘’(대형할인점에서 쇼핑을 하는 엄마) 등 평범한 가정주부의 이미지를 내세워 여성 유권자의 표심을 잡으려고 애썼다. 특히 힐러리가 경선에서 탈락하면서 그녀를 지지했던 여성 유권자의 표를 흡수할 것이라 내심 기대했지만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여성계는 미국의 2인자 후보 자리에 여성이 지명됐다는 사실은 마침내 ‘유리천장’이 깨지고 있다는 신호라며 환영했지만 그것이 왜 하필 페일린 같은 여성에 의해서인지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한 노력은커녕, 성폭력과 근친상간의 경우에도 여성의 낙태 권한을 반대하는 등 여성계가 그동안 투쟁해온 사안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해왔기 때문이다.
미국 최대 여성인권단체인 전미여성협회(NOW)는 페일린이 후보에 지명되자 성명을 발표하고 페일린을 지지하지 말도록 촉구했다. 협회는 “우리가 힐러리를 지지했던 것은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의 권익을 위해 싸워왔기 때문”이라며 “매케인 진영은 (여성이 무조건 여성을 뽑을 것이라는)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페미니즘의 보수화
힐러리의 이미지는 미국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전형이다. 미국 페미니즘의 시작은 19세기에 시작된 여성 참정권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여성에게 선거권을 인정한 헌법 수정안이 통과되면서 이후 40여 년간 휴지기를 갖는다. 1960년대에 들어 부활한 2기 페미니즘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짧은 단발머리, 무채색 계열의 바지 정장, 단호한 표정과 말투 등 중성적 이미지의 전문직 여성은 미국 페미니즘이 표방하는 역할모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이들은 마치 여성이 남성과 같아질 수 있고, 그렇게 되길 원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해야 한다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남성을 닮아가는 것에서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본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이들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하며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일을 통해서는 자아실현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이런 주장은 공허하다. 그들은 차라리 가사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남성과 동등해질 것을 요구하는 기존의 페미니즘에 대항해 1980년대 중반에는 포스트페미니즘이 등장했다. 포스트페미니즘 세대는 페미니즘 세대가 거두어 놓은 성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제 양성평등을 이뤘으니 더 이상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자면 포스트페미니즘은 앞선 세대가 투쟁해온 역사를 역행하는 셈이다.
1947년생인 힐러리와 1964년생인 페일린은 각각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을 대변한다. 힐러리가 경선에서 탈락했을 때 많은 미국 여성은 “힐러리가 못하면 도대체 어떤 여자가 할 수 있단 말이냐”며 낙담했다. 그러나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페일린의 등장이“(힐러리처럼)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바지 정장을 입지 않아도 여성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미국 사회는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 여성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전환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것. 미국 인구조사(US Census)에 따르면 자녀가 있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비율은 2000년 이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가사와 육아의 부담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일터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퓨 연구소가 2007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성년 자녀를 둔 전업주부 가운데 “일하지 않고 집에 머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답한 사람은 48%로 1997년의 39%에서 9%p 증가했다.
반면 일하는 여성 가운데 “상근직(full-time)으로 일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21%에 불과했다. 이는 1997년의 32%에서 11%p 줄어든 수치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전업주부들의 만족도는 높아지고 일하는 여성의 만족도는 낮아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연히 가정보다는 일을 중요시할 것이라 예상되는 고학력 여성의 경우에도 전업주부를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2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자녀를 둔 박사학위 및 전문직 학위 소지자 여성의 41%가 아예 일을 하지 않거나(23%) 비상근직(18%)에 종사한다. 자녀가 6세 미만의 영·유아일 경우에는 그 비율이 54%로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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