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우리 땅 지천에서 커피나무가 자라는 풍경,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나요”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0-07-30 13: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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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박종만(50)씨를 만나러 가는 건 소풍 같았다. 덕소에서 양수리로 이어지는 6번 국도와 양수대교에서 춘천까지 뻗은 45번 국도, 두 도로를 연이어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는 줄곧 한강이 내다보였다. 한여름 소나기에 흠뻑 젖은 산등성이는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진초록빛으로 반짝였다. 박씨는 이 길이 닿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가에서 커피나무를 기르고 있다. 1995년 첫 씨앗을 뿌린 뒤 오늘까지, 15년간 이 일에 매달려왔다.

    한겨울 추위가 매서운 한국 땅에서 커피 재배가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긴 세월 수많은 사람이 타이르고 설득했다. 그러나 박씨는 뜻을 꺾지 않았다. 챙 있는 모자에 카키색 작업복, 농부 혹은 탐험가 같은 차림의 그는 “우리 땅에서 난 커피를 마시고 싶다. 춥고 비가 덜 오는 환경에서도 커피 열매가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속 실험중”이라고 했다.

    “에티오피아, 브라질, 미국 커피보다 우리나라 커피가 더 맛있을 것 같지 않아요?”

    이유가 참 담백하다. 내가 마시고 싶어 기른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문제는 커피 재배가 원한다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커피는 아무 데서나 나지 않는다. 북위 25℃부터 남위 25℃사이, 무덥고 습기 많은 아열대 기후권이 커피의 주산지다. 기온 분포로 보면 영상 11℃에서 26.5℃사이. 겨울 기온이 영하 10℃아래로 떨어지기 일쑤인 우리나라에서는 언감생심 꿈꿀 일이 아닌 셈이다.

    굳이 커피를 얻고 싶다면 온실을 만들어야 한다. 강원도 강릉의 한 농부는 지난 봄 이 방법으로 커피 40㎏을 수확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관령 기슭에 대형 온실을 짓고 평균 기온 15℃, 습도 60% 이상의 환경을 유지했다. 그런데 박씨는 이 길을 따라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우리 기후, 우리 토양에서 자생적으로 싹트고 열매 맺는 커피나무라야 진짜 우리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도 거스르는 막무가내 고집이다.



    영상 6℃에서 자라는 커피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 우리나라가 아열대 기후가 되기 전엔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득 모든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지 않나, 그걸 이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프리카에 있는 커피나무를 우리나라에 옮겨 심으면 얼마 못 가 죽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땅에 원산지와 똑같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조금씩 온도, 습도를 낮춰가며 적응 훈련을 시키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라는 게 박씨의 주장이다. 5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한국 환경에 적응한 커피나무가 탄생하지 않을까, 사계절 변화에 익숙해지고, 추운 겨울과 낮은 습도를 받아들이는 완전히 다른 품종의 한국형 커피나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지금 박씨가 남양주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이 실험이다.

    그는 1995년 온실을 짓고, 세계 15개국에서 커피종자를 들여다가 묘목으로 키웠다. 커피 재배 기술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하와이 코나 지방의 커피 농장에 취업해 1년간 잡부로 일하고, 뒤늦게 강원대 원예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전문 지식도 쌓았다. 곧이어 커피나무가 한국 계절과 온도, 습도에 적응하도록 하는 이른바 ‘내한성(耐寒性) 훈련’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 실험을 시작하던 날 ‘종자 개량에 성공하면 우리 땅 지천에서 커피가 열리겠구나’생각하니 가슴이 뛰더라고 했다.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춥고 눈 내리는 두메산골에서도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집 마당 한쪽에 커피나무를 심어 직접 수확한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그의 온실 중 한 곳에 들어가봤다.(박씨는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온실 여러 개를 가지고 있다.) 성인 남자의 키만한 커피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선 사이로, 에어컨이 찬바람을 내뿜고 있다. 박씨는 “지난 겨울 영상 6℃의 추위를 이기고 살아남은 녀석들”이라고 자랑했다.

    “원래 커피나무는 영상 15℃아래서는 못 살아요. 하루 이틀 사이에 다 죽지요. 그런데 ‘얘네’는 낮은 온도에 차차 적응해온 덕분에 버티는 겁니다. 아직도 상당수는 죽어나가요. 재작년 겨울, ‘영상 8℃’ 환경을 실험했을 때는 나무의 80%가 얼어 죽었죠. 그때 산 나무 중에서 이번 겨울을 또 견딘 건 10% 정도밖에 안 되고요.”

    다행인 건 그래도 꾸준히 살아남는 나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최고 기록을 가진 커피나무는 이미 한국에서 12번째 겨울을 넘겼다. 그 나무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 그러니까 4세대 커피 씨앗이 올해 싹을 틔웠다.

    1989년, 일본

    박씨는 “이런 종자 안에는 분명 원산지에선 존재하지 않던 추위 적응 유전자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게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점점 강해지면 언젠가는 한국 땅 어디서나 뿌리내릴 수 있는 커피나무가 생산될 거라는 얘기다. 30대 청춘이 50대가 되기까지, 긴 세월 커피농사에 매달린 끝에 그가 얻은 것은 이 확신뿐이다. 여전히 커피나무는 온실 속에 있고, 추위 적응 유전자가 언제 완성될지는 기약이 없다. 많은 사람의 생각처럼 커피 내한성 훈련은 끝내 실현되지 않은 채, 실패한 프로젝트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왜 이 승산 없는 실험을 계속하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한국형 커피 생산에 매달리는 걸까.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박씨와 마주 앉았다. 실험용 온실 바로 옆에 마련된 그의 사무실에서다. 미리 밝혀둘 게 있다. 박씨는 사람들에게 농부보다는 ‘관장님’ 혹은 ‘사장님’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앞서 말한 북한강변, 그림 같은 장소에 그의 ‘커피 왕국’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전문 박물관이자 카페 겸 레스토랑인 ‘왈츠와 닥터만’이다. 그의 온실과 사무실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 3층에 있다.

    박씨가 커피 사업을 시작한 건 1989년. 일본 출장길에 ‘왈츠’라는 커피숍을 본 게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인테리어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젊은 사업가의 눈에 일본식 커피하우스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커피를 파는 공간이라면 으레 건물 지하에 자리 잡은 다방밖에 없던 시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피’라는 단어를 들으면 프림과 설탕을 듬뿍 넣은 인스턴트 커피를 떠올렸다. 그런데 ‘왈츠’는 환하고 깔끔한 실내에서 직접 볶은 원두커피를 팔고 있었다.

    “그때 일본에서 세 가지를 눈여겨봤어요. 깨끗한 커피숍, 현대식 미용실, 프랜차이즈 빵집. 우리나라의 다방, 미장원, 제과점과 비교하면 확실히 경쟁력 있어 보였죠. 뭘 들여오면 가장 잘될까 이리저리 생각했어요.”

    그중에서 커피숍을 하게 된 건 ‘왈츠’ 커피공장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그곳에서 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50년 넘은 공장 문을 연 순간 커피 볶을 때 피어나는 자욱한 연기 사이로 짙은 커피향이 코끝을 휘감았다. 잘 볶아진 커피를 꺼내기 직전 요란하게 팝핑하는 소리,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서로에게 소리치며 커피 나르는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웅장하게 들렸다. 커피가 그런 건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도 접하지 못한 신세계일 것이 분명했다. “야, 이거 되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커피에 미친 남자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그해 가을 그는 서울 홍대 앞에 원두커피 전문점 ‘왈츠’를 열었다. 일본 ‘왈츠’와 계약을 맺고 이름과 커피 원두, 추출 기술 등을 전부 전수받은 것이다. 경쟁자가 없던 터라 사업은 기대 이상으로 잘 풀렸다. 분점을 내고 싶다는 제의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체인점이 70개까지 늘어났어요. 제가 하던 인테리어 업체에서 가게 공사를 다 맡았으니, 말 그대로 제 인생의 황금기였죠.”

    가맹점을 관리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성공은 그만큼 급속도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원두커피 전문점이 늘면서 신선함을 넘어서는 ‘내공’이 필요해진 탓이다. 그는 여전히 커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속이 탔다.

    ▼ 필요에 의해 커피 공부를 시작하셨겠군요.

    “호구지책이었죠. 아무리 찾아봐도 커피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서 일본 책 구해 떠듬떠듬 읽으며 독학했어요. 커피 맛을 익히느라 하루에 30잔씩 마셨고요. 그러면 손이 덜덜 떨리는 거 알아요? 꽤 오랫동안 수전증 환자처럼 손을 떨고 다녔어요. 커피 로스팅을 혼자 해보다가 커피콩과 기계까지 몽땅 태우기도 하고…. 좌충우돌이었죠.”

    ▼ 그러다가 진짜 커피 맛에 빠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턴가요.

    “글쎄요. 커피맛에 빠진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책 보면서 커피를 배워서, 늘 내가 느끼는 게 신맛이냐 쓴맛이냐, 아까 마신 것보다 강하냐 약하냐 그런 생각만 했거든요. 커피를 즐기는 방법은 몰랐어요. 거의 병적으로 공부에 매달렸죠.”

    커피 등급은 커피콩 300g 안에 결점두가 몇 개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는 커피 품종을 구해다놓고 결점두 개수가 등급에 맞는지 일일이 세곤 했다. 베토벤이 매일 커피콩을 60알씩 넣고 커피를 만들어 마셨다는 내용을 읽으면, 커피가 59알일 때와 61알일 때는 각각 어떻게 다른 맛이 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일일이 커피를 끓여보곤 했다. 커피 품종에 가장 적합한 수온을 알아내려고 품종마다 50℃에서 100℃까지의 물을 부어가며 커피를 내리기도 했다. 물론 그 커피를 모두 다 마셨다. 손이 덜덜 떨릴 때까지.

    “낮에는 커피숍 일과 인테리어 사업을 해야 하니까 공부할 시간이 없잖아요. 가게 문 닫고 밤이 되면 혼자 커피를 끓여 마셨어요. 그러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동이 터요. 아, 내가 고3 때도 안 해본 밤샘을 서른 살 넘어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참 자주 했죠.”

    ‘듀마고’의 추억

    ‘커피학개론’에 익숙해진 뒤엔 이탈리아, 프랑스 등 커피 선진국으로 ‘출장’을 다니며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일본에서는 커피를 블렌딩할 때 세 가지 품종 이상을 섞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유럽 카페에선 열 가지 스무 가지 이상의 품종을 섞어 만든 커피를 내놓곤 했다.

    커피가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여지는 사실도 신선했다. 유럽 거리의 수백년 된 카페 골목에는 어디를 가나 그곳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대문호가 시를 발표하고,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가 악상을 떠올린 공간이 즐비했다.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커피뿐 아니라 역사의 향기까지 들이마셨다.

    “프랑스 파리의 카페 ‘듀마고’에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앉아 원고를 썼다는 테이블이 있어요. 언제 가도 늘 예약 중이죠. 파리 사람들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관광객들이 오직 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려고 찾아오더군요.”

    일본 ‘왈츠’의 커피 공장에서처럼, ‘듀마고’에서 그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단 한 번도 커피 맛에 빠진 적이 없던 그는, 커피 자체보다 그 액체를 둘러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커피가 만들어내는 삶의 여유,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사람 사이의 교류와 문화와 역사. 이런 커피의 진짜 매력이 한국에는 전해지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웠다.

    박씨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커피 사랑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수준이다. 두메산골 늙은 농부도 새참과 함께 믹스 커피를 마시고, 서해안 어부들이 만선 깃발 휘날리며 들어와 가장 먼저 찾는 것도 커피 아닌가. 서울에선 채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다국적 커피 체인점, 직접 커피콩을 볶아 커피를 내려주는 로스터리숍, 식당 안팎에 놓인 자판기까지 종류도 다양한 커피 판매점을 숱하게 만난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한국 커피’에서는 유럽의 그것에서 느껴지는 매력과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다. 문화와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박씨가 유럽 커피 문화의 매력에 홀려 세계를 떠도는 동안, 사업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처음 문을 열었던 홍대 앞 왈츠 본점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그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거 다 정리해서 우리나라에도 100년 이상 이어질 수 있는 커피숍을 만들자, 거기서는 커피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문화와 이야기까지 만들어 팔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1994년의 일이다. 전국을 돌며 커피숍 자리를 보러 다닌 끝에, 탁 트인 강 풍경이 인상적인 지금의 자리를 구한 뒤 인테리어 노하우를 총동원해 ‘100년 갈 집’을 지었다. 고강도 교량용 콘크리트를 사용해 폭탄을 맞아도 끄떡없는 틀을 만들었다. 건물 1층은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꾸미고, 2층에는 커피를 테마로 한 박물관을 세웠다. 3층에는 한국형 커피 재배를 위한 온실을 넣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경희대 호텔경영학과에 진학해 카페 경영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기도 했다. 가게 터를 보러 다니던 때부터 ‘왈츠와 닥터만’ 문을 열기까지 꼬박 2년 동안, 그는 커피를 직접 기르고, 세계의 커피 문화사를 공부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커피의 세계를 파고들었다. ‘닥터만’은 박사를 뜻하는 ‘닥터’에 그의 이름 끝자 ‘만’을 붙여 만든 상호. 대한민국 최고의 ‘커피박사’가 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옛날 다방에 가다

    흔히 커피광이라고 하면 커피의 맛과 향에 심취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자메이카산 블루마운틴은 부드럽지만 향이 강하고, 에티오피아산 모카는 뒷맛이 시며, 하와이 커피가 부드럽다면 콜롬비아산은 진하다’ 같은 정보를 꿰고 다닌다. 커피 맛에 대한 취향도 분명하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박씨는 커피광이라고 하기 힘들다. 그는 커피라면 뭐든 잘 마시고, 심지어 인스턴트 커피도 가리지 않는다. 인터뷰 도중 우리 앞에 놓인 커피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잘 모르겠는데…, 꼭 알아야 해요?” 하고 반문했다.

    “한때는 커피 맛을 구별하기 위해 밤을 새운 적이 있어요. 이젠 그런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요. 어느 커피에서는 달콤한 꽃향기가 나고, 어느 건 톡 쏘는 신맛을 낸다…. 그런 정보는 사실 많이 왜곡된 거예요. 경기도 여주쌀은 어떻고 전북 정읍쌀은 어떻다 얘기하는 거나 똑같죠. 여주쌀이라고 맛이 다 똑같겠어요. 김씨네 논, 황씨네 논, 박씨네 논 쌀 맛이 다 다르고 가물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도 또 달라지잖아요. 어느 지방에서 난 무슨 품종 커피인지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커피를 멋지고 근사하게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커피를 마실 때 품종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찻잔, 자신이 좋아하는 온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더 많이 따진다. 2007년부터 해마다 ‘커피역사탐험대’를 꾸려 세계의 커피 문화를 ‘탐험’하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커피를 즐겼을까 알아내는 것이 커피 품종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즐겁다. 그는 커피 문화에 관심 있는 대학생 등으로 탐험대를 꾸린 뒤 자신이 전액 경비를 댄다. 탐험 첫해에는 커피의 고향으로 알려진 아프리카 지역 7개국을 답사했다. 커피의 주산지인 케냐와 탄자니아부터 에티오피아, 예멘의 아덴과 모카항,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 시리아, 터키까지 커피의 초기 이동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지구 온난화가 반가운 ‘커피 농부’ 박종만
    “우리나라 문헌에는 한국인이 커피를 처음 접한 게 1896년 아관파천 때로 나옵니다. 고종 황제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했을 때 커피를 마셨다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옛 자료를 찾아보니 1800년대 중반에 이미 선교사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다는 기록이 나와요. 아무리 공신력 있는 정보라도 내가 직접 확인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죠. 커피의 원산지가 에티오피아라는 것도 과연 진실인지, 그렇다면 그곳에서 커피가 어떻게 탄생 성장 변화했는지 내 눈과 내 발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이듬해엔 커피 문화 발상지 아랍 3개국 탐험, 2009년에는 커피 문화를 꽃피운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등 유럽대륙 탐험을 다녀왔다. 한국 커피 역사를 찾기 위한 탐험도 꾸준히 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중에게 커피를 판매한 곳으로 알려진 인천개항지의 대불호텔 터, 50여 년 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진해의 흑백다방, 우리나라 최북단 청솔다방 등 2000여 곳의 다방을 직접 다녀왔다. 그곳에서 유물을 모으고 옛 이야기를 채집해 ‘왈츠와 닥터만’에서 여는 ‘소중한 우리 문화, 다방 전’을 통해 공개한다. 1950~60년대 다방을 재현해놓고 달걀 노른자가 동동 뜬 그 시절 모닝커피를 제공하는 이 전시회는 문화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꽤 화제다. 이런 ‘탐험’을 통해 수집한 옛날 다방의 낡은 커피잔, 마담들이 커피 배달을 갈 때 사용하던 보자기, 국번 없는 전화번호가 적힌 다방 성냥갑 등은 그가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 중인 커피 유물들이다.

    커피가 품은 이야기

    “명동예술극장 앞거리 바닥에는 ‘이 거리는 예전에 돌체다방 갈채다방 등이 있어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즐겨 다니던 거리입니다. 갈채다방과 돌체음악다방은 문인, 대학생, 지식인들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다양한 문화행사로 당시 경제적으로 궁색했던 젊은 예술가들의 지적인 풍족감을 충족시켜주던 문화의 장이었습니다’라고 적힌 돌이 박혀 있어요.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도 커피 문화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내용이죠. 그런 걸 현대에 다시 살려내는 게 제 꿈이에요.”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석 잔의 커피가 바닥을 보였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처음의 질문을 던진다. 그는 왜 우리나라에서 커피나무를 기르려 하는가. 왜 커피나무 종자를 구하기 위해 남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와 태평양, 카리브 해의 작은 섬을 누비고 다니고, 하와이 코나의 커피농장에서 1년간 잡부로 일했는가. 지난 15년간 계속한 실험이 변변한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도 계속 그 작업에 매달리는 이유는 뭔가. 그는 “커피나무를 기르는 것이 한국에 아름다운 커피 문화를 만드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커피가 맛있는 건 그 안에 문화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50년, 누군가 제 뜻을 이어 100년 더 커피 농사를 지은 끝에 우리나라에서 커피를 재배한다면, 그 커피가 로스팅되고 추출돼 누군가의 찻잔 속에 담겼을 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솟아날까요. 한국 커피의 세계가 얼마나 깊어지고 넓어지겠어요. 저는 그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는 요즘 우리 젊은이들의 커피에 대한 관심이 바리스타 자격증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만 집중되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맛있는 커피를 만드는 것은 커피의 세계에서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박씨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커피 교실에서는 커피의 생태와 재배 방법, 문화와 역사, 한국 커피의 변화상 등 커피가 품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알려준다. 수업에 충실히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로 장학금을 지급한다. 커피 기술자가 아닌 전문가를 길러내기 위해서다.

    ▼ ‘왈츠’로 돈을 많이 버셨나봐요.

    내내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커피에 미쳐서 벌이는 일이, 하나같이 돈벌이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젓는다.

    “통장 보여줄까요? 사람들이 그런 얘기 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공항에 가면 늘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해요. 아련함과 무서움. 여행 준비할 때마다 늘 어쩌면 그렇게 돈이 없는지, 집사람이 배웅하고 돌아서는 거 보면 가슴이 미어져요. 무서운 건 커피 유물 들고 들어오는 것 때문에 그래요. 희귀한 커피잔, 커피 종자, 수동 그라인더 같은 것들, 박물관에 전시하려고 직접 갖고 들어오다 망가뜨리기도 하고 세관에 걸려서 잡혀 들어간 적도 있어요. 돈이 많아서, 허영에 들떠서 이 일 하는 거 아닙니다. 정말 커피가 좋아서, 그 마음 하나로 이러는 거예요.”

    한국 땅에 커피를

    그는 ‘커피로 돈벌이한다’는 말이 듣기 싫어 커피 묘목을 팔자는 주위의 제안도 다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가 내한성 실험을 위해 기른 커피 묘목은 한때 10만주에 달했다. 지금은 거듭된 실험 탓에 절반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막대한 양이다. 이 사실을 아는 지인들이 ‘아파트 베란다에 나만의 커피 농장을 만들자’는 콘셉트로 사업을 하면 어떠냐고 권했단다. 사시사철 난방이 되는 아파트 안에서는 커피나무가 얼마든지 자랄 수 있는 만큼, 제법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번 돈을 투자하면 커피 재배 실험도 좀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언하기도 했다.

    “맞는 얘기죠. 큰돈을 벌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래도 안 할 겁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커피나무 기르겠다고 나서는 게 실은 묘목 장사 하기 위한 구실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저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커피문화를 만들려고 뛰어다닌 1세대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가장 큰 꿈을 꾼다면 ‘왈츠와 닥터만’이 100년 넘게 이어지고, 제가 살아생전 커피나무 재배에 성공하는 거죠. 언젠가 후손들이 우리 카페에 앉아서 ‘여기 창업자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커피나무를 재배한 사람이래’라고 얘기하며 커피를 마실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 사람들 집 마당에 한국 커피나무가 한 그루쯤 자라고 있으면 좋겠고요. 그게 제 꿈의 전부입니다.”

    원두커피 즐기는 방법

    커피는 맛보다 분위기로 마신다. 박종만씨의 지론이다. 하지만 질 나쁜 원두를 엉터리로 추출한 커피는 아무리 좋은 분위기에서라도 즐기기 어렵다. 박씨에게 좋은 원두 고르는 법과 커피 맛있게 추출하는 법에 대해 들었다.

    ■ 커피 원두 고르기

    원두를 살 때 흔히 아로마밸브를 통해 향만 맡아보고 선택한다. 되도록 눈으로 직접 원두의 상태를 확인한 뒤 고르는 것이 좋다. 모양이 반듯하고 곱게 볶아진 원두가 맛도 좋다. 신선도 역시 커피의 맛과 향을 좌우하는 요소. 원두커피도 반드시 제조일자를 확인, 가장 근래의 제품을 구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볶은 지 2주일이 지난 제품은 구입하지 말아야 한다. 커피는 공기 중 산소와 결합하면 향이 사라지므로 개봉 상태에서 오래 보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필요한 양만큼 소포장 단위로 조금씩 구입해 그때그때 갈아 먹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갈아놓은 원두커피를 구입하는 것도 금물. 갈아놓은 커피는 제조과정에서 향이 날아가버리기 쉬운 데다 원두의 품질도 확인하기 어렵다.

    ■ 원두 커피 우려내기

    원두는 마실 때마다 먹을 양만큼만 분쇄기에 가는 것이 좋다. 원두를 곱게 분쇄할수록 물과 접촉하는 부분이 많아지므로 진한 커피를 원하면 곱게 가루를 내고, 순한 맛을 원하면 조금 굵게 가는 게 좋다. 너무 곱게 갈면 쓴맛이나 떫은맛이 지나치게 강해질 수 있다.

    원두커피를 우려내는 방법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분쇄기에 간 원두가루를 여과지에 넣고 뜨거운 물로 걸러내는 드립식 추출법이다. 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추출할 땐 우선 커피가루가 살짝 부풀어 오를 정도로 물을 넣은 다음 커피 전체를 골고루 적실 정도로 3∼4번에 나눠서 물을 부어야 한다. 가능하면 불순물이 적은 정수기 물을 사용하고 수돗물은 바로 받아서 팔팔 끓인 뒤 사용한다. 끓인 물은 90∼95℃ 되도록 잠시(약 5초) 식힌 상태에서 부어야 최고의 맛과 향을 우려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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