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과 함께 한 루이스 부르주아.
“카타르시스(정화)다. 내가 경험한 상처, 증오, 연민을 표현하고자 한다.”
▼ 초반에 주목받은 작품들이 남자에 대한 미움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강했다면, 최근에는 ‘용서’나 ‘화해’ 같은 주제를 담은 작품이 많은 것 같다.
“잊어버리기 위해서는 화해하고 용서해야 한다. 요즘에는 빨간색을 주로 쓴다. 아마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감정의 한가운데서도 이해받고 사랑받기 원하는 내면의식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에게 예술은 두려움을 넘어서기 위한 작업이다.”
▼ 당신은 일흔의 나이에 뉴욕 MoMA 개인전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아흔이 넘은 나이인데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나이에 대해 갖는 생각은.
“살아갈수록 나는 ‘우리가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한다.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나는 항상 내가 장거리 주자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말해왔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너무 야망이 크고 모든 게 빨리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런 성향은 파괴적이 될 수 있어 위험하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1911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태피스트리(tapestry·다채로운 선 염색실로 짜서 만드는 실내 장식물) 사업을 해온 집안에서 자라난 덕분에 일찍부터 예술적 감수성에 눈떴다.
그러나 어린 그녀의 의식세계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치명적 상처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어머니의 침묵과 묵인하에 일어난 아버지의 불륜 행각이었다. 어린 시절에 병약했던 부르주아는 어머니 대신 입주영어 가정교사 새디를 친자매처럼 의지하며 자랐다. 그러나 언니처럼 따르던 가정교사가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불륜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행복하던 소녀시절은 지옥으로 변한다. 아버지는 한때 가족을 버리고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의 무의식에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됐다. 그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떠나자 어머니가 몹시 불안해했다”면서 “어머니의 불안은 우리에게 전염됐고, 우리도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선할 태피스트리를 모으기 위해 여행을 자주 떠났고 나는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증오와 연민, 함께 똬리를 틀다
이와 함께 또 한 가지 그녀를 괴롭히던 것은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아버지는 부르주아가 태어날 무렵 반드시 남자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름조차 자신의 이름과 똑같게 정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딸이 태어나자 실망이 컸다. 이런 아버지의 실망을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마치 죄라도 되는 양 주눅이 들어 자랐다. 이것은 다시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대학시절 전공은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수학과 기하학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정서적 불안감을 느끼던 부르주아는 비정상으로 가득한 현실에 대해 회의했다. 그리하여 예측 불가능한 현실보다는 수학과 기하학의 세계가 주는 예측가능하고 안정된 체계에 끌린다. 그녀는 명문 소르본 대학에 입학한다. 부르주아는 “기하학은 사람 관계와 달리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깨지지 않는 법칙들이 있다. 기하학은 내게 구조에 대해 가르쳐줬고 나는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