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실 가는 길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
태실이란 왕실에서 산모가 태아를 출산한 뒤 나오는 태반을 묻는 장소로, 태봉(胎封)이나 태묘(胎墓)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태의 자리가 다음 아기의 잉태(孕胎)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액이 없는 방향에서 태를 태우거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는 신라 김유신도 태를 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미뤄보아 태를 묻는 풍습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것이라 하겠다.
태봉은 백제, 마한, 가야, 고려시대의 기록에도 나타나며, 풍수지리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는 의궤까지 편찬했을 정도로 왕실의 중요한 의례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봉에 관한 논의가 120여 회나 나타나며, 태실에 대한 조선시대의 연구자료(‘조선의 태실’)에 따르면 조선의 국왕과 그 자녀의 태반을 묻은 구체적 위치나 지명이 90여 곳에 달한다. 그밖에 ‘태봉’이라 불리던 지명까지 망라하면 276곳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각지의 명당에 분포해 있다고 한다. 조선 왕실이 100리 이내에 왕릉을 썼던 것과는 달리 왕실의 뿌리인 태실을 전국 각지에 골고루 둔 것은 왕실과 지역 주민 간에 일체감을 갖게 만들 의도였으리라는 해석도 있다.
숭유억불 견뎌낸 ‘태실 수직사찰’
직지사의 정종 태실은 평소 사찰림과 조선 왕실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원하지 않던 임금 자리를 억지로 맡을 수밖에 없었던 방과는 왜 2년(정확하게 26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 그것도 하필이면 즉위 첫해에 자신의 태실을 직지사로 옮겼을까. 옮겨진 정종 태실은 그 후 직지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태실 주변의 산림을 태봉산(胎封山)으로 지정해 철저히 보호하던 조선 왕조의 산림정책을 참고할 때 직지사의 태실은 사찰림의 기원과 기능에 대한 사례를 찾던 나에게 좋은 연구대상이었다.
직지사는 풍수적으로 마니산, 태백산 문수봉, 오대산 적멸보궁과 함께 ‘기(氣)를 폭포수처럼 분출하는’ 생기처(生氣處)로 알려져 있으며, 정종의 태실은 풍수에서 최고의 길지로 알려진, 뱀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는 형상의 머리 부분 혈(蛇頭血)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다.
동생 이방원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정종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고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19년 동안 영위하다가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사두혈에 태실을 옮긴 덕분인지 몰라도 정종은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지만, 나머지 7명의 부인 사이에 15남 8녀를 두었다. 냉엄하고 비정한 권력 다툼의 세계에서 한발 벗어나 상왕생활을 19년간이나 누리고, 또 23명의 자식까지 둔 정종이 누린 영화(?)가 풍수적 최고의 길지에 자신의 태실을 옮긴 덕분인지, 내 짧은 풍수지식으론 감당할 수 없다.
조선 왕실에 태실을 내어준 직지사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정종은 직지사를 수직사찰(守直寺刹)로 지정해 태실 수호의 소임을 맡겼다. 직지사의 주지는 수직군의 소임을 수행하는 승려들의 수장이기도 했다. 덕분에 직지사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숭유억불의 모진 세월 속에서도 비교적 순탄하게 사세(寺勢)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왕실은 태실을 보호하고자 직지사 주위 30리 내에서는 벌목과 수렵과 경작을 금했다. 태실 수직사찰의 사격(寺格)을 확보한 덕분에 직지사는 태실 주변의 산림을 태봉산으로 수호하는 한편, 넓은 영유지(領有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직지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현재 약 600㏊의 산림을 보유하고 있으며, 직지사에서 12㎞나 떨어진 김천시내의 법원과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영유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