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지사가 임금의 태실을 지키던 원찰임을 알려주는 안양루 앞 태석.
조선의 王木이자 생명의 나무
정종의 어태(御胎)를 530년 동안 모셨던 직지사의 독특한 이력을 생각하면 이 절집이 포용하고 있는 숲의 식솔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식솔들 중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숲은 무어라 해도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는 조선의 왕목(王木)이었고, 풍수적 관점에서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에 생기를 제공하는 생명의 나무였다. 소나무가 풍수적 소재로 식재된 사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왕릉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왕릉 주변에 식재된 소나무는 왕의 유택을 길지로 만들어 왕조의 무궁한 번영을 꾀할 수 있다고 믿은 조상들의 풍수사상이 반영된 흔적이다. 왕이나 왕후의 태를 모신 태실 주변도 예외는 아니다.
산문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들머리 숲에서는 대부분의 소나무가 사라졌지만, 산문 내 부도전에서 양옆으로 갈라지는 세 갈래 길의 오른편 숲길에서는 몇 그루 낙락장송을 찾을 수 있다. 이들 소나무로 미뤄보아, 오른편 숲길이 태실로 향하던 옛 길임을 추측할 수 있다. 가운데 길은 일주문을 지나 만세루를 거쳐 경내로 진입하는 길이며, 왼편 길은 산내의 여러 암자로 향하는 포장된 길이다.
태실을 향한 오른편 길을 따라 조금만 북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대나무 숲에 이어 꽤 넓은 면적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난다. 대부분 수령 50년 전후의 어린 소나무이지만, 직지사 일대에서는 쉬 볼 수 없는 소나무 단순림이라 이채롭다. 태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솔숲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태실을 지키는 원당의 위상에 비춰볼 때 직지사도 여느 절집과 마찬가지로 들머리를 비롯해 주변에 솔숲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절집 주변을 지키던 솔숲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등 사회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옛 솔숲의 흔적은 사천왕문을 거쳐 만세루에 이르는 진입로 곳곳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에서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정종의 태실은 북봉에 없다. 조선총독부가 조선 왕실의 정기를 차단하고자 1928년 전국 각지의 명당에 매장되어 있던 왕실의 태 53위(왕의 태실 21위, 공주 및 왕자의 태실 32위)를 파헤쳐 서삼릉으로 옮겼을 때, 정종의 태옹(胎甕)도 함께 옮겼기 때문이다. 정종 임금의 옛 태실 흔적은 안양루 앞의 태석과 청풍료 마당에 전시된 태실의 난간석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직지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화상이 418년(신라 눌지왕 2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신라시대에 자장(慈藏)과 천묵(天默)이 중수하고, 고려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당우(堂宇)들이 1970년대 이후 녹원스님에 의해 30년간에 걸친 복원사업으로 오늘의 모습을 이루게 됐다.
‘직지사(直指寺)’라는 절 이름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창건주 아도 화상이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直指)‘저 산 아래에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한 데서 전래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