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도 빠진 적이 있는 그는 “학생 때의 사회주의 운동은 한 번쯤 치러야 할 홍역이지만, 인간의 본성인 이익 추구를 부정하는 좌파사상에는 매력을 오래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한때 꿈은 외교관. 고등학교 때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서 1년가량 공부하면서 서양 문화에 매료됐으나 미국에서 돌아와 읽은 ‘일리아드’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영어 대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독학하면서 지중해 세계에 빠져든 것.
대학 졸업 후 ‘아사히신문’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낙방한 뒤 딱히 이렇다 할 직업을 갖지 않고 있다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탈리아로 건너간다. 5년 동안 이탈리아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가 몇 년 후 다시 건너가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해 피렌체에 정착했다. 집필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 무렵부터다. 데뷔작은 1968년 ‘중앙공론(中央公論)’에 발표한 ‘르네상스의 여인들’이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1970년 첫 장편이자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인 체사레 보르자의 일대기를 그린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으로 마이니치(每日) 출판문화상을 받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남편과는 일찌감치 헤어지고 그 후 줄곧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살고 있다.
일관, 집중, 집요, 지속
그에게 처녀작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쓰게 한 가스야 잇키 전 ‘중앙공론’ 편집장은 시오노의 초년병 시절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30년 전 이탈리아에서 시오노씨를 만나 사흘 동안 그로부터 로마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상당히 건방졌다. 불끈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은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 르네상스에 흥미가 있다면 ‘여자’에 대해 써보는 게 어떠냐 했더니, 왜 하필 여자냐고 되물었다. 하지만 반 년 뒤 정말로 책을 써 왔다. … 많은 작가와 사귀었지만, 시오노가 가장 성장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많이 컸다. 집중과 지속이라는 미덕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다. 어찌 보면 꼭 수도하는 수녀 같다. 기독교를 경유하는 역사에 도전하고, 20세기 인간의 환상에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일을 마지막까지 뒷받침하고 싶다.”(‘로마인 이야기 길라잡이’ 중)
그의 말대로 시오노의 작업 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일관성과 집중력이다. 조직에 매인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에라도 묶여 자기절제를 할 수 있지만 작가는 철저히 혼자다. 웬만한 인내력이 없이는 힘든 작업을 지속할 수 없다. 시오노는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글을 쓰기 위해 서재로 건너갈 때는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정장을 차려입는다는 그였기에 장장 15년에 걸쳐 15권의 ‘로마인 이야기’를 써냈으리라. 그 사이 나이는 50대 중반에서 70세가 됐다. 그동안 여름휴가 한 번 안 갔다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 완간 인터뷰에서 “혹 나쁜 병이라도 발견되면 일을 중단해야 하고, 일단 중단하면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 병원에도 한 번 가지 않았다”고 고백해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집요함은 번역 작업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번역을 모두 자기 돈으로 진행했다. 특정 국가가 아닌 인간 일반을 위해서 썼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고의 번역자와 감수자를 택하느라 도쿄에 집을 사려고 모아둔 돈까지 모두 썼다는 것이다.
그가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한 동기는 ‘지력, 체력, 경제력, 기술력 등 모든 면에서 주변 민족보다 열세에 있던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1000년 넘게 경영한 비결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바로 그 ‘의문하는 힘’이야말로 시오노에게 세상과 사람을 보는 특별한 눈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