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르네상스
서구문화와 종교의 핵심이 된 ‘성경’을 제외하고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자본론’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은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실천력을 얻어 날개를 달며 단숨에 세계의 틀을 바꿔놓았다. 마르크스와 ‘자본론’이 20세기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사후 1세기 동안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마르크스주의자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국가와 정부의 통치 아래 살았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김일성 같은 철권통치자들은 물론 체 게바라 같은 자유투사들도 ‘자본론’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반면에 마르크스의 적대자들은 악마의 화신으로 여겼다. 이 책을 혹평하는 유명 경제학자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 시대를 풍미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자본론’이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자본론’을 영감의 보고(寶庫)요 만세반석(萬世盤石)으로 우러러 보는 수많은 이 중에는 바보가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시인한다. 그러나 이 따위 책이 어찌하여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아연해진다. 지루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가득 찬 책이기 때문이다.”(‘죽은 경제학자의 살아 있는 아이디어’, 토드 부크홀츠)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론’은 사형선고를 받았는가? 소련이 해체된 이래 그 위상은 지난날에 비해 약해졌지만, 막강한 영향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지구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어떤 의미에서든 모두 마르크스의 승계자다. 마르크스 없는 미래란 없다”고 단언한다. 2005년 영국 공영방송 BBC는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마르크스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선정했다. 철학자 제라르 그라넬은 ‘자본론’을 가리켜 ‘흔들리지 않는 천둥’이라고 표현했다.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 천둥소리는 그 뒤 끊임없이 증폭돼 오늘날에는 우리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가 됐다는 뜻이다.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시위자들도 “자본론이 옳았다!”고 외친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곳 근무자들의 일부도 마찬가지다.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면 일할수록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확신이 커진다. 나는 마르크스의 접근방식이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굳게 확신한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무차별적으로 확산시키는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개념과 상통하며, 이 때문에 ‘자본론’은 여전히 새로운 사고를 위한 출발점이 된다고 역설한다.
공교롭게도 우파 사상가들조차 최근 들어 마르크스가 실은 자본주의자라며 그의 사상을 수용한다. 보수우파인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세계 경제위기 때 ‘자본론’을 읽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과시하기도 했다. 책의 판매량도 이를 실증한다. 2008년 세계공황 이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한 갈증으로 ‘자본론’에 관심이 급증했다. 최근 독일에선 이 책의 매출이 3배나 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에선 이 책의 만화 버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에서도 ‘자본론’ 특강에 일반인이 몰려들고, 서점가에서 역시 관심도를 상당부분 만회했다고 한다. 2008년 4월 ‘교수신문’이 교수·지식인 103명을 대상으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을 조사한 결과, 압도적 1위로 꼽힌 것이 ‘자본론’이다. 가히 ‘자본론 르네상스’라 부를 만하다. 어떤 이는 묘비명 뒤로 사라졌던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왔다고 표현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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