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처음으로 나는 이효석의 생가터를 찾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 현장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김용성의 ‘한국현대문학사 탐방’에 몇 장의 사진과 함께 현지의 분위기가 잘 그려져 있어서 찾아가는 길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여느 산골 마을이 다 그렇듯이 봉평 장거리도 한낮의 적요를 덮어쓰고 있었다. 냇돌이 깔린 개울을 건널 때는 이 어디쯤에 젊은 날의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애가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물레방앗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골 안쪽 마을을 향해 걷는 때는 농로 옆으로 맑은 도랑물이 함께했다. 둔덕에서 만난 마을사람들에게 ‘이효석’을 말해봤지만 아는 이가 드물었다. 뒤늦게 만나 중년 남자가 산 아래 외딴집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도랑을 건너고 밭두렁길을 걸었다. 큰비 내린 뒷날이었던가. 구두 바닥에 자꾸 진흙이 달라붙었는데 도랑에는 흰 모래가 쓸리고 있었다. 솔숲 길을 돌아 외딴집으로 드는 때까지도 너른 밭에는 감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무렵에도 더러 찾아오는 이들은 있었던 모양이다. 효석의 옛터에 살고 있는 이가 방명록을 보여줬는데 공책 앞뒷면에 빽빽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당 나무그늘에 앉아 감자꽃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뒷산 숲에서 뻐꾹새 소리가 들렸던가.
마당에서 혼자 사금파리를 갖고 노는 효석, 허리에 책보자기를 질끈 맨 채 꼬챙이 하나를 휘두르며 밭길을 걸어오는 어린 효석을 그려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이 산골에 드리워지는 막막한 햇살과 바람은 내 유년에도 항상 마주했던 것. 하도 세상이 고요해, 하도 세상이 아득해 장독 뚜껑에 고인 빗물에 떨어진 송홧가루 한 알마저 지극정성으로 건져보던 그 어린 시절이 아닌가 말이다. 손톱 끝으로 아카시아 이파리를 훑고 있어도 기울 줄 모르던 햇살. 고요와 아득함, 그리움과 안타까움. 산골의 정적과 무량한 권태는 외롭고 감수성 예민한 아이에게는 천연적인 문학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 작품은 그를 바탕으로 먼 훗날 새롭게 생산되게 마련이다.
이효석의 길, 봉평에서 대화까지
그 후로도 서너 해에 한 번꼴로 봉평의 그 집을 찾아가는 일이 생겼지만 더는 별다른 감흥을 갖지 못하는 여정은 일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왜 그대로 있음을 그대로 있질 못하게 하는가. 갈 때마다 바뀌는 그 터의 풍경을 보면서 내가 가지는 항변이었다. 감자밭을 죄 메밀밭으로 바꾼 것쯤은 이해가 간다. 가산공원 귀퉁이에 재현(?)해놓은 ‘충주집’ 운운의 술집들은 도대체 뭔가. 귀여운 장삿속이라면 정녕 귀여운 맛을 풍겨야 하고 풍속의 재현이라는 야무진 속셈이라면 봉평마을 전부를 1910년대쯤으로 돌려볼 일이다.
봉평마을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유명한 문화답사지가 되었다. 효석의 소설 한 편 읽지 아니한 이들까지 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명소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편리와 재미를 위해 기막힌 건물과 조형물들이 늘어섰으며 그 사이 정겹던 밭두렁길은 대형 버스가 드나드는 포장길로 바뀌었고 적막하던 생가터에도 찻집이며 술집이 들어섰으며 이윽고 기념관까지 만들어졌다. 서구식 펜션에서 잠을 자고 허브마을에서 박하향에 잔뜩 취한 뒤에 작가의 생가터를 일별하고 기념관에 들러 흑백사진 몇 장을 보고 나오면서 일용의 양식처럼 ‘문화’를 섭취했다고 여기는 행태는 지극히 속물적인 것이다. 문학을 문학으로 만나지 않는 여하한 만남도 세속적 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봉평에서 영동고속도로 장평인터체인지로 되돌아 나오는 길, 산과 골이 겹치는 이 어디쯤도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다. 봉평 장거리에서 술 한잔 걸친 뒤 대화장으로 이동하는 장돌뱅이들 즉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동이가 걷는 길이 이쯤으로 상정돼 있기 때문이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 하나를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히듯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잡히듯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은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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