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 예술가, 특히 작곡가들은 수많은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냈지만 브람스처럼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평생 해바라기같이 한 여인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한 작곡가는 거의 없다.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3명의 주인공 중 로베르트 슈만은 독일 작센지방의 당시 인구 5000명의 작지만 운치 있는 ‘츠비카우(Zwickau)’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 작은 도시는 슈만이 나고 자란 18년의 기간 덕분에 지금도 ‘슈만의 도시’로 불리며 슈만의 가곡을 그리워하는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1955년 당시 동독 정부가 세운 슈만기념관은 예술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출판업에 종사하던 슈만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로서 책을 만들고 기고를 하며 문학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어린 아들이 작곡을 시작하자 주의 깊게 관찰하던 아버지는 비록 음악 가정은 아니었지만 아들을 위해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린 슈만은 아버지를 따라간 음악회에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지만, 16세 때 아버지가 숨진 뒤에는 원치 않은 상황에 직면한다.
슈만의 도시 츠비카우
음악에 빠진 부자를 못마땅해했던 어머니는 집안이 기울자 어린 아들의 미래를 더욱 걱정했다.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는 법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지역의 큰 도시인 라이프치히로 유학을 보낸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슈만은 법학 공부보다는 음악에 열중했고, 좀처럼 공부에 진중하게 집중하지 못했다. 1년 만에 다시 하이델베르크 법과대학으로 학교를 옮겨 학업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슈만의 머릿속에는 음악뿐이었다.
이미 19세의 ‘꽃미남’이 된 슈만은 매력적인 여인들과 차례로 사랑에 빠진다. 이 중 클라라라는 이름의 다른 여인도 있었고, 부유층 고위직 관리의 딸도 있었다. 물론 많은 작곡가처럼 슈만도 그 여인들을 기리면서 ‘아베크 변주곡(작품번호 1번)’ 같은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재정 지원도 한계에 달하면서 자신도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릴 적 보았던 공연의 전율을 기억해냈고.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비크(1785~1873)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크 역시 슈만의 재능을 평가해 자신의 집에서 하숙을 시키며 레슨을 하고, 또 슈만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레슨을 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비크의 집에는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며 힘이 넘치는 신들린 연주를 하는 9세 어린 딸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아내가 되는 클라라였다. 일부 문헌에는 슈만의 재능을 그의 미래의 장인이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패기만 높은 시골 청년에게 편의를 봐주며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 ‘구두쇠’ 비크가 재능을 높이 평가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이러한 문헌은 은혜도 모르는 바람둥이가 금쪽같은 딸에게 마수를 부렸다는 것을 알게 된 장인이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사위의 예술적 능력을 저평가한 데서 나왔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다.
어쨌든 슈만은 독창적으로 고안한 방식의 강도 높은 훈련을 수행한 결과 4번째 손가락의 감각을 잃는 불운을 겪게 된다. 4번째 손가락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손가락을 매단 끈을 천장에 붙여놓고 생활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로베르트 슈만(왼쪽)과 요하네스 브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