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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⑩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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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승의 아내를 남몰래 사랑했고, 스승 사후에도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보호했던 제자….
  • 현실보다는 드라마나 소설에 등장할 법한 설정이지만, 음악사에서는 로베르트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 그리고 그의 제자 브람스의 강렬했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하다. 정신병자가 된 스승 슈만과 그만을 사랑했던 클라라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평생 독신으로 산 브람스. 스승의 아내가 죽은 충격으로 1년 뒤 그녀를 따라 죽은 대목에선 시대를 넘어 세인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의 음악이 왜 비 오는 날이나 늦가을에 감상하기에 알맞은지, 왜 그토록 애절하고 우울한지 알 수 있다.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브람스의 스승 로베르트 슈만(1810~1856)의 일생을 알게 되면 그의 음악이 왜 그토록 서정적이고 편안한지 이해할 수 있다.

남자 예술가, 특히 작곡가들은 수많은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냈지만 브람스처럼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평생 해바라기같이 한 여인을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한 작곡가는 거의 없다.

낭만주의 시대를 풍미했던 3명의 주인공 중 로베르트 슈만은 독일 작센지방의 당시 인구 5000명의 작지만 운치 있는 ‘츠비카우(Zwickau)’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 작은 도시는 슈만이 나고 자란 18년의 기간 덕분에 지금도 ‘슈만의 도시’로 불리며 슈만의 가곡을 그리워하는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1955년 당시 동독 정부가 세운 슈만기념관은 예술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목사의 아들로 출판업에 종사하던 슈만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로서 책을 만들고 기고를 하며 문학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어린 아들이 작곡을 시작하자 주의 깊게 관찰하던 아버지는 비록 음악 가정은 아니었지만 아들을 위해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어린 슈만은 아버지를 따라간 음악회에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지만, 16세 때 아버지가 숨진 뒤에는 원치 않은 상황에 직면한다.

슈만의 도시 츠비카우



음악에 빠진 부자를 못마땅해했던 어머니는 집안이 기울자 어린 아들의 미래를 더욱 걱정했다. 경제적인 자립을 할 수 있는 법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지역의 큰 도시인 라이프치히로 유학을 보낸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 도착한 슈만은 법학 공부보다는 음악에 열중했고, 좀처럼 공부에 진중하게 집중하지 못했다. 1년 만에 다시 하이델베르크 법과대학으로 학교를 옮겨 학업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슈만의 머릿속에는 음악뿐이었다.

이미 19세의 ‘꽃미남’이 된 슈만은 매력적인 여인들과 차례로 사랑에 빠진다. 이 중 클라라라는 이름의 다른 여인도 있었고, 부유층 고위직 관리의 딸도 있었다. 물론 많은 작곡가처럼 슈만도 그 여인들을 기리면서 ‘아베크 변주곡(작품번호 1번)’ 같은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재정 지원도 한계에 달하면서 자신도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릴 적 보았던 공연의 전율을 기억해냈고.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비크(1785~1873)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크 역시 슈만의 재능을 평가해 자신의 집에서 하숙을 시키며 레슨을 하고, 또 슈만이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레슨을 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비크의 집에는 피아노 신동으로 불리며 힘이 넘치는 신들린 연주를 하는 9세 어린 딸이 있었는데, 바로 그의 아내가 되는 클라라였다. 일부 문헌에는 슈만의 재능을 그의 미래의 장인이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패기만 높은 시골 청년에게 편의를 봐주며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 ‘구두쇠’ 비크가 재능을 높이 평가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이러한 문헌은 은혜도 모르는 바람둥이가 금쪽같은 딸에게 마수를 부렸다는 것을 알게 된 장인이 분노와 배신감에 사로잡혀 사위의 예술적 능력을 저평가한 데서 나왔다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다.

어쨌든 슈만은 독창적으로 고안한 방식의 강도 높은 훈련을 수행한 결과 4번째 손가락의 감각을 잃는 불운을 겪게 된다. 4번째 손가락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손가락을 매단 끈을 천장에 붙여놓고 생활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로베르트 슈만(왼쪽)과 요하네스 브람스.

결국 슈만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작곡에만 몰두했고, 아버지의 문학적 재능을 이어받아 평론지를 발간하고 직접 주간이 돼 편집을 하고 평론을 기고했다. 이즈음 이교도인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처럼, 작고 초라할지라도 독일 음악의 전통을 굳건하게 계승한다는 취지로 ‘다비드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슈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프로레스턴’과 ‘오이제비우스’라는 필명으로 두 가지 극단적인 성향의 평론을 기고했다. 그의 평론은 너무나 날카롭고 비판적이어서 많은 이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평론계에서 그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장래가 불투명한 그에게 딸을 시집보낸다는 것은 장인 비크에게 어림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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