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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⑩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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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쓰지 못하는 9세 ‘파파걸’ 클라라

클라라가 사랑한 슈만,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츠비카우 시내 풍경. 성모마리아 교회의 높은 첨탑이 보인다. 길에는 동독 시절의 승용차 트라비가 다니고 있다.

클라라 비크 슈만(1819~1896)은 유럽 단일 통화 유로화 때문에 현재는 통용되지 않지만 100마르크 지폐에 등장한 우아한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독일인에게 매우 친근한 인물이다. 비크와 피아니스트 마리안네의 2남3녀 중 차녀로 태어난 클라라는 항상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무조건 복종을 강요하는 성격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데리고 가출을 감행한 어머니 때문이었다. 독선적이고 자신의 교육방식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는 자신의 교육방식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어린 클라라에게 고강도 훈련을 강요했고, 결국 클라라의 연주 실력으로 그의 교수법은 인정을 받게 된다.

비크는 어쩌면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베토벤의 아버지를 반반 섞어놓은 듯하다. 아들을 아버지의 틀 안에 머물게 하면서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끊어버렸지만 열성적인 교육열로 음악적 성장을 이끈 점에서는 모차르트의 부친과 비슷하고, 연주 수입으로 들어오는 부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욕심으로 자식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점은 베토벤의 부친과 일맥상통한다.

가난했던 비크는 누구보다도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딸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사회성이나 언어력, 사고력이 부족했던 것처럼, 9세의 클라라 역시 피아노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지만 독일어로 자기 이름을 쓰지 못했고, 자신의 의사도 어눌하게 겨우 표현하는 ‘파파걸’이 됐다.



그런 클라라에게 슈만은 집과 연주장 밖 세상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지적 통로였고, 슈만의 언변과 필력은 어린 클라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적 편견에도 작곡을 하기 원했던 클라라에게 슈만은 신과 같은 존재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슈만이 폰 프리켄 남작의 수양딸인 에르네스티네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약혼하자 클라라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했다. 일설에는 슈만과 클라라의 관계를 의심한 비크가 일부러 다른 여인을 소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남작의 수양딸이기에 본인이 원하는 결혼을 하면 남작의 재산을 한 푼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슈만이 알고 파혼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클라라와의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슈만이 파혼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슈만의 주변 여자는 모두 정리됐고 클라라만이 남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해공작은 이미 도를 넘어, 16세의 클라라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편지로 슈만과 왕래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야만 했다. 클라라는 슈만의 곡을 일부러 연주 레퍼토리에 넣어 발표했고, 슈만은 공연장 어디에선가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클라라가 18세가 되자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했지만 비크의 집요하고 완강한 반대로 결국 결혼 허가를 법원에 요청하기에 이른다. 3년여의 법정 투쟁 끝에 법원은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했고, 온갖 술수를 부렸던 비크는 18일 동안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3명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우여곡절 끝에 클라라의 21번째 생일을 하루 남긴 1840년 9월 12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슈만은 안정되고 행복한 결혼생활에 영감을 받아서인지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고, 100여 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비크는 3년이 흐른 후 딸과 사위에게 용서의 편지를 썼고, 슈만은 그 용서를 받아들였다. 여느 장인과 사위의 관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더 이상 원수는 아니었다.

장인과 법적투쟁으로 쟁취한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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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슈만 하우스. 슈만의 생가를 개축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결혼을 위해 겪었던 끔찍한 투쟁의 시간을 보내고 클라라의 보살핌 속에서 슈만은 교향곡 1번과 4번을 작곡하고 실내악의 작곡에도 박차를 가한다. 1843년에는 부부가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로 초빙된다. 슈만은 안정되고 다복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수많은 곡을 작곡했고, 자신의 곡을 발표해주는 클라라는 듬직한 우군이 됐다.

1844년 드레스덴으로 터전을 옮기면서 슈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명성을 날렸고, 1850년에는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휘자라는 직책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단원을 이끌고 그들과 소통하고 화합해야 하는 자리였다. 사교적이지 못한 슈만에게는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예술가로서의 압박감이 그를 정서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전부터 조금씩 엿보이던 우울증은 환청, 환각 등의 정신분열증세로 악화됐다. 정신병으로 자살한 13세 위의 누나와 슈만처럼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친 슈만의 차남을 유추해보면, 그의 정신병은 외부 요인보다는 집안 내력으로 인한 유전적인 질병으로 보인다.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며 심령술에 의지한 슈만은 결국 1853년 11월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 자리를 내놓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클라라 혼자서 버는 연주비와 레슨비로는 6명이나 되는 아이의 양육비와 남편 치료비용을 대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때 슈만과 클라라 앞에 등장한 인물이 브람스였다. 그가 지휘자 자리를 내놓기 몇 달 전, 이 듬직한 젊은 독일청년은 추천장을 들고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슈만은 브람스가 작곡한 곡에 감탄하면서 그의 평론지 ‘음악시보’에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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