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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비상한 시대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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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와 태평양은 완전히 다른 바다였다. 오가사와라 섬에서 그의 상대는 주로 동네 아이들이었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의 80수년 전 귀양살이와는 차원이 또 다른 것이었다. 그곳 일본 최남단을 2년 만에 겨우 벗어나자 이제는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로 옮겨져 한없는 눈과 냉기로 류머티즘이 골수에 사무치는 경험을 한다. 그 속에서 북해도의 이민 개척 행정기관인 개척사(開拓使)가 활발히 추진하고 있던 농장일도 난생 처음 경험하게 된다. 그가 회고록에서 자주 쓴 표현대로 “그 숱한 일을 다 적을 수는 없다.” 일본 영해의 광대함과 사방으로 경계를 확장해나가는 일본의 활력을 최일선에서 그처럼 생생히 체험한 조선인은 그 이전에 없었다. 1881년부터 갑신정변 이전까지 사절단에 끼어 도쿄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받았던 충격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북해도 식민 개척의 대본영인 삿포로에는 개척사가 직영하는 맥주 양조장도 가동되고 있었다. 독일에서 맥주 제조법을 배워와 1876년부터 생산을 개시한, 개척사의 상징인 빨간 북극성 마크를 단 삿포로 맥주였다.

10년 만의 귀국

남과 북 양극을 오가면서도 김옥균이 가장 오래 산 곳은 도쿄였다.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를 위시해 그와 친교를 나누는 후원자들이 다들 거기에 있었고 망명 생활 중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대개 거기서 이루어졌다.

도쿄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그 말고도 많이 있었다. 같은 배로 온 박영효와 갑신정변의 행동대원들은 물론 12년 뒤 그가 죽고 난 다음에 건너온 이준용도 그 하나였다. 두 사람이 김옥균의 비문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두 사람이 재일 망명객이었다는 데 있다. 그들이 비명을 써서 유족에게 준 1904년 2월은 일본 육군 선발대가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들어가고 해군이 요동반도 여순(旅順)의 러시아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개막한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러시아가 거꾸러지지도 않은 이상 조선 내에 김옥균의 비문을 쓰겠다고 나설 사람은 없어보였다. 갑오년의 청일전쟁과 갑진년의 러일전쟁 사이 10년간 조선 내 지배 권력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옥균이 살해되고 곧 청일전쟁이 발발해 청국의 10년 지배가 끝났고, 그의 사후 10년 만에 비문이 세워질 때 러일전쟁이 일어나 러시아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

박영효와 이준용은 도쿄 거주 조선인 중 단연 최고급 신분이었다. 박영효는 김옥균과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벌인 갑신정변의 동지다. 김옥균은 1884년 이래 10년간 일본생활을 견디다 못해 마지막 돌파구를 상하이에서 찾아보려다 무덤으로 걸어 들어간 격이 되고 말았다.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박영효는 김옥균이 비명에 가고 불과 5개월 뒤인 1894년 8월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청일전쟁 발발로 급변한 정국의 분위기가 그를 불렀다.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조선은 일본군을 돕는다는 내용의 군사동맹이 체결되기 3일 전이었다. 10년 뒤 러일전쟁을 맞아 일본이 강요한 공수동맹과 같은 식이었다.



박영효를 고종에게 강력 천거한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백작은 박영효 귀국 두 달 뒤 신임 일본공사로 부임했다. 그는 10년 전 박영효에게 정변을 일으켜보라고 부추긴 장본인이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조선 문제에 관해 전권을 위임받고 특파된 그는 역대 조선 주재 일본 공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중량급 인사였다. 두 번째로 총리직을 맡아 청일전쟁을 지휘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이노우에와 동향으로 친구이자 동지였다. 1885년 말 일본에 내각제도가 탄생하고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이토가 임명되었을 때 이노우에는 외무대신이었다. 33세의 김옥균과 23세의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피한 지 1년 되던 때였다. 이토와 이노우에는 그로부터 23년 전 에도(江戶)에서 영국공사관 방화사건을 벌이며 서양 오랑캐 배척(攘夷)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다 다음해 둘은 함께 영국 유학을 떠났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닫고 외국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렬한 개국파로 변신했다. 신임 공사 이노우에는 그의 부임과 박영효 귀국 사이에 이미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도 고향 친구였다. 일본 육군의 창설자로 불리는 야마가타는 이토가 총리를 네 차례 역임하는 사이사이에 두 차례 총리를 지냈다.

갑신에서 갑오로

그렇게 귀국한 박영효는 10년간의 대역무도(大逆無道) 죄인에서 벗어나 7개월간 내부대신을 지냈다. 고종과 민비로부터 실권을 부여받은 박영효는 10년간의 원을 풀기라도 하듯 개혁을 추진해나갔다. 이른바 제 2차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이 기간에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되고 시행되었다. 하루 한 개꼴로 새로운 법안과 규칙이 만들어졌는데 그중 3분의 1에 박영효의 서명이 들어있었다.

총리대신 김홍집의 반발을 사고 심지어 이노우에 공사로부터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과감하게 몰아치는 박영효의 개혁조치는 3개 파로 분열 대립하던 조정의 분위기를 더욱 술렁이게 했다. 마치 갑오년이 아니라 갑신년으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있었다. 일찍이 일본 망명 중에도 박영효는 지치지 않고 국왕과 대원군에게 서신을 보내 개혁조치를 촉구한 바 있다. 그중 고종에게 보낸 1888년의 상소문은 그 길이가 한문으로 1만3000자에 달했는데 총론에 이은 8조의 각론은 114항목에 이르렀다. 4년 전 갑신년에 미처 펴지 못한 개혁정책의 기본구상이 총정리되어 담겨 있었지만 책 한 권 되는 분량의 그 글을 조정의 누가 펼쳐보았는지는 확인할 바 없다. 이제 두말 할 것 없이 그 모든 것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왔다. 바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은 조급하고 행동은 과격했다. 의정부가 내각으로 바뀌고 아문(衙門)이 부(部)로 변경됨과 동시에 모든 제도가 근대화되었다. 그 모범은 일본식 근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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