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랬는데 한스 기벤라트는 자살하고 만다. 독일 남부 슈바벤의 작은 도시 칼프에서 신앙심 깊은 신교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헤세는 자신이 청소년기에 겪은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기벤라트의 죽음으로 토해냈다.
헤세는 명석한 소년들만 지원하는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고작 7개월 만에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왔고 그로부터 3개월 후에는 신학교에 자퇴원을 제출한다. 신학 교리와 라틴어 문법책에 사로잡힌 그의 영혼은 학교 밖으로 탈출하면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비록 낮에는 서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시를 짓거나 소설을 구상하는 힘겨운 나날이었지만 헤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켰다.
다만 소설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분신 기벤라트는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소설 앞부분을 보면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각 지역의 우수한 두뇌가 한자리에 모여 치열한 경쟁을 하는 시험에 참여하고자 소년 한스가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한스를 배웅하는 것이다. 기차역까지 따라 나온 이도 있었다. 일찌감치 한스의 탁월함을 알아본 교장과 목사는 마치 자기 집안의 일인 듯 온 정성을 다해 한스를 보살피고 격려한다. 어떤 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못다 이룬 드높은 꿈을, 한스라는 총명한 소년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는 심각한 정신적 갈등과 방황을 겪다가 그만 학교를 벗어나고 만다. 마을로 돌아와서는 허드렛일을 하거나 자유분방한 친구와 함께 낚시에 몰두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 특히 그를 각별히 아끼던 지역 유지들은 서서히 기대와 열망의 시선을 거두고 차츰 냉대하고 책망한다. 한스는 그렇게 조금씩 파멸의 길로 간다.
나는 지금 경기도 수원에서 오산으로 빠지는 국도변의 융건릉을 걸으며 한스 기벤라트, 곧 헤세의 좌절된 시대를 생각한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지난해 12월은 그야말로 북풍에 한설로 매섭고 추운 날씨였으나 해가 바뀌면서 추위도 누그러들었고 입춘도 지나 융건릉 권역은 잔설조차 녹아버린 따스한 풍경이다. 아마도 오뉴월이며 볕 좋은 가을에는 이 권역에 적지 않은 인파가 역사도 공부하고 숲 속으로 산책도 하기 위해 모여들건만, 평일의 겨울 낮에는 미세하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도 생생하리만치 오가는 사람이 드물다. 이 권역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융릉)을 조성하고 그 왼쪽 뒤편으로 자신의 무덤(건릉)을 조성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소중한 곳이다.
정조의 삶에 대해서는 수많은 문헌과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갖은 방식으로 증명한 바 있어서 이 지면에 일일이 옮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 능선에서, 그리고 정조가 야심 차게 일구고자 했던 수원 화성 일대를 순례하면서 오늘날 우리 삶의 어떤 양상을 복기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다음의 극적인 순간만큼은 이 융건릉과 수원 화성을 살피려면 잠시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정조는 일곱 살 때 세손에 책봉됐고 열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겪었다. 1776년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 1권’, 곧 즉위하던 해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776년 3월 10일,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승하한 이후 “정도에 지나치게 슬퍼하며 물이나 미음도 들지 않았고, 상사(喪事) 이외의 일”을 멀리했으며 이윽고 대소신료들이 왕위를 이어받기를 간청했으나 여러 날 동안 울며 허락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즉위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시(午時)에 대신들이 어보(御寶) 받기를 청하니 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되지 않자, 면복(冕服·면류관과 곤룡포)을 갖추고 부축을 받으며” 마침내 즉위식이 거행됐으나 막상 경희궁 숭정문으로 들어선 이후에도 “울먹이며 차마 어좌(御座)에 오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대소신료와 종친들이 좌우에서 눈물로 청하였으되 “왕이 울부짖기를, ‘이 어좌는 곧 선왕께서 앉으시던 어좌이다. 어찌 오늘 내가 이 어좌를 마주 대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했다. 대신들이 해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들어 누누이 우러러 청하자, 왕이 드디어 어좌에 올랐는데 백관들이 예를 행하니 면복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즉위식을 마친 후 정조는 “지극한 애통을 스스로 견딜 수 없는데 차마 더욱 굳어지는 당초의 뜻을 늦출 수 있겠느냐마는 대위(大位)를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어찌 막을 수 없는 대중의 심정을 헛되게 하겠느냐?” 하며 왕으로서의 첫 과업을 실시하는데, 그것은 대사면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널리 사면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이니, 어둑새벽 이전의 잡범 가운데 사죄(死罪·사형에 처할 범죄) 이하는 모두 용서해 면제해주라. 아! 오늘날은 처음으로 즉위한 참이기에 마땅히 널리 탕척하는 인(仁)을 생각하였고 나의 일을 끝맺기를 도모하니, 거듭 밝은 아름다움을 보게 되기 바란다”고 윤음(綸音·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을 남겼다.
이윽고 수많은 역사 소설과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조의 실질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첫 번째 정치 행위가 시작된다. 즉위식을 마치고 사면령을 내린 후 정조는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이렇게 선언한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