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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기행

스페인 마드리드

은유와 상징으로 빚어낸 예술의 도시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스페인 마드리드

  • ●세계 3대 미술관 프라도에서 마음을 빼앗기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이유
    ●내전으로 갈등과 반목 만연
    ●도시 곳곳을 수놓은 이슬람 문화의 흔적들
    ●‘조국의 희망’으로 해석해야 마땅한 돈키호테
마드리드 구시가지의 중심 거리인 그란비아 전경.

마드리드 구시가지의 중심 거리인 그란비아 전경.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현대사의 깊은 암울을 간직하고 있다. 굳이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1892~1975)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19~20세기 스페인은 정치·사회적으로 참담했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마드리드는 매혹적인 예술 도시라는 점이다. 처음 스페인에 갔을 때 나는 ‘프라도 미술관’에 온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이곳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미술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미술관으로 불린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왕가는 회화 작품을 많이 소장했다. 엘 그레코(1541~1614), 벨라스케스(1599~1660),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를 비롯한 스페인과 유럽의 대표적인 화가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돼 있다. 스페인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벨기에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도 적지 않다. 라파엘로·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들도 스페인 화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의 ‘비범함’과 마주하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유화, 국립 소피아왕비 예술센터 소장.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유화, 국립 소피아왕비 예술센터 소장.

마드리드에서 내 눈은 그야말로 호사를 누렸다. 프라도 미술관뿐만 아니라, 국립 소피아왕비 예술센터와 티센 미술관에서도 수많은 걸작을 만났다. 프라도에는 르네상스 이후 19세기까지의 걸작이 수두룩하다. 소피아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유럽 미술사를 이끈 거장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티센에는 중세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명작이 많다. 

국립 소피아왕비 예술센터에서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Guernica)’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란 중 프랑코군을 지원하는 독일 비행기가 이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고 삽시간에 민간인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비보를 들은 피카소는 전쟁의 비극과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게르니카’를 그렸다. 이 그림은 곧바로 파리의 만국박람회에 전시됐고 이후 상당 기간 뉴욕현대미술관에 보관됐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하자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뜻에 따라 고국 스페인으로 돌아왔다(1981). 프랑코 정권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았던 피카소의 비범함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피카소는 6·25전쟁의 참혹함 또한 그림으로 고발했다. 그가 처절하게 묘사한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성은 그의 대선배였던 고야의 주제이기도 했다. 고야는 1808년 5월 3일, 나폴레옹의 침략군이 스페인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화폭에 옮겨 닮았다.


짧은 영광, 긴 오욕

마요르 광장의 돈키호테 동상.

마요르 광장의 돈키호테 동상.

미술관에서 나와 따가운 여름 햇살을 피해 마드리드 왕립식물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현지인 친구 호세와 스페인의 역사를 더듬었다. 스페인 역사는 한마디로 독특하다. 이곳은 오랫동안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다. 처음에는 페니키아와 그리스의 식민지였다가 카르타고, 로마, 이슬람제국에도 지배당했다. 

지중해의 서쪽 끝에 자리한 탓일까? 스페인의 역사적 도약은 오랜 준비와 고난 끝에 가까스로 이뤄졌다. 711년부터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사라센제국의 이슬람 영향권에 들어감에 따라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은 이슬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국토회복전쟁(레콘키스타)에 돌입했다. 1248년 스페인이 세고비아를 정복하면서 국토의 대부분을 회복했고, 1492년 비로소 국토회복전쟁이 종결됐다. 1561년에는 톨레도(Toledo)에 이어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수도로 정해졌다. 이후 마드리드는 통일왕조의 수도로서 ‘황금의 100년’을 맞았다. 

스페인의 전성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로 시작됐다. 동아시아를 향한 무역로 개척에 이사벨라 여왕이 투자를 단행한 결과 스페인은 콜럼버스와 함께 아메리카를 정복했다. 그곳에서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은 금은보화를 강탈하고 노예무역과 노예노동으로 부를 쌓았다. 마침내 잉카와 마야문명은 무너졌고 많은 원주민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반면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가져온 자본과 물자로 새로운 도시를 구축하고, 문화재급 건축물을 쌓아올렸다. 또 로마교황청의 권위에 기대고자 했던 스페인의 왕과 귀족들은 가톨릭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신교와의 종교전쟁에 거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결과는 패착이었다. 유럽의 분열만 가속화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스페인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적함대를 자랑하던 스페인은 17세기부터 국운이 기울기 시작해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네덜란드와 영국의 도전에 더는 강자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수세기에 걸쳐 서서히 침몰해간 스페인은 잔혹한 마녀재판과 유대인 학살로 유럽 역사에 짙은 어둠을 몰고 왔다. 급기야 1808년 나폴레옹이 보낸 프랑스 군대의 침략으로 스페인은 일대 위기에 빠졌다. 

1930년대에는 내전으로 홍역을 치렀다. 그 무렵 그리스 시인이자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기행문 ‘스페인 기행’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스페인 내전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공화주의자들과 군국주의자들의 분열을 비롯해 다양한 부류의 갈등 때문에 일어났다. 1900년대 초반부터 스페인은 스페인 문화의 독자성을 고집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유럽적 보편주의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의 갈등이 심화됐다. 또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인들과 과학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세속주의자들의 대립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반목과 갈등은 스페인 사회를 사분오열시켰고 끝내 내전으로 불타올랐다. 

스페인의 분열과 패권투쟁은 여전히 심각하다. 2016년 총선 이후 무려 열 달 가까이 정부를 운영하지 못했다. 연달아 두 번 총선을 치렀지만 연립정부는 끝내 출범하지 못했다. 정치권의 반목과 대립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스페인의 역사를 되짚다 보면 한국의 정치가 자연스레 오버랩돼 씁쓸함을 안긴다.


기하학으로 이어온 이슬람 문화

기하학적 문양의 벽면이 인상적인 알람브라 궁전.

기하학적 문양의 벽면이 인상적인 알람브라 궁전.

스페인에는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역력하다. 안달루시아 지당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을 비롯해 이슬람 문화의 상징인 기하학적 문양이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기하학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해 그리스에서 꽃을 피웠다. ‘기하학 원본’의 저자인 그리스인 유클리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그곳은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유클리드뿐만 아니라 원자론의 주창자인 데모크리토스 등도 활동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이슬람은 고대 서구 문명의 지혜를 고이 간직했다. 중세의 스페인은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기하학을 비롯한 고전 문명의 정수를 이어받았다. 이탈리아 지식인들 역시 스페인을 통해 서구 고전 문명의 본질을 재발견했고, 이러한 연속성은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됐다. 결국 이민족 지배에 따른 스페인의 고통이 훗날 유럽 문예부흥에는 혁혁한 공을 세운 셈이다.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스페인 전성기의 화가 엘 그레코(1541~1614)와 벨라스케스(1599~1660)의 그림에서도 기하학적 구도를 찾아볼 수 있다. 스페인 문학 또한 고도의 기하학적 사고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페인 사람들은 사물의 입체성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추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성향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하학적 사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마드리드 근교에 위치한 중세도시 세고비아에서도 기하학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깊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고비아는 도시 전체가 예술품처럼 아름답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한 이 도시는 기하학적 무늬들로 장식된 건물 외벽이 도시의 품격을 한층 끌어올린다. 

세고비아 사람들에게는 벽이 곧 도화지이자 화판이었다. 사람들은 벽면에 사실적인 장면이 아닌 상징으로 가득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려넣었다. 그런데 도시 사방을 둘러보던 중 문득 ‘스페인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기하학적 인식이 결국 이 나라를 어둠으로 몰아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적인 미학이 종교적 광신으로, 그리고 스페인 특유의 편향적 이데올로기로 발현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20세기 스페인의 지성,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스페인 사회의 어둠을 밝히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시민들을 각성시키고자 공개 강연을 자청했다. 특히 세르반테스의 문학성을 새롭게 해석하며 ‘돈키호테야’말로 실은 진지한 사회비판 정신이 담긴 책이라고 강하게 외쳤다.


스페인의 양심을 밝힌 돈키호테

메트로 에스파냐 광장역에 서있는 돈키호테와 산초 동상.

메트로 에스파냐 광장역에 서있는 돈키호테와 산초 동상.

‘돈키호테’의 저자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 홀연히 등장했다. 그는 작중 인물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 사회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카잔차키스의 분석에 따르면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는 곧 스페인의 모습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스페인의 혼이다. 끝까지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인 것이다. 돈키호테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저돌적인 인간형’으로 분류해버린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망국의 위기가 날로 짙어가던 17세기의 스페인에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라고 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조국에 희망을 불어넣고자 했다. 내가 읽은 ‘돈키호테’의 돈키호테는 그런 인간형이다. 내 친구 호세도 동의했다.

소설의 출간 당시 대부분의 스페인인은 세르반테스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소설이라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그저 흥미로운 한 권의 기사소설로만 여겼다. 본래는 저자가 필화(筆禍)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수사를 덧칠했을 뿐인데,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소설의 본뜻에 접근하지 못했다. 

‘돈키호테’를 재발견하기 시작한 건 20세기에 다다라서다. 피카소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이는 시대의 고뇌를 묵묵히 감당해낸 선배 돈키호테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역시 돈키호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글에서는 돈키호테를 창작해낸 세르반테스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화가 피카소도, 사상가 가세트도 현대 스페인의 비운을 직시했다. 그들은 스페인을 질곡에 빠뜨린 군국주의자 프랑코 장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독재자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현대판 세르반테스라 할 만하다. 스페인의 양심을 밝히는 길잡이였으니 말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스페인은 정열의 나라다. 투우장 풍경뿐 아니라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는 열기도 대단하다. 또한 정열의 춤 플라멩코는 스페인인의 정체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미술, 특히 회화 부문에서도 스페인인들의 열정이 감지된다. 15세기까지 이슬람 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으면서 서서히 새로운 시각예술이 탄생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유화의 매력을 발견했고, 새로운 형태의 색채미와 조형미를 구현했다. 이후 스페인은 서양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16세기 스페인 왕실은 미술을 집중적으로 후원했다. 세월이 흐르자 이는 스페인 왕실의 전통이 됐다. 또한 외래 종교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종교재판이 자주 벌어진 탓에 감시와 통제가 유독 심했는데 그 덕에 미술에서도 은유와 상징이 자주 사용됐을 것으로 판단한다. 

마드리드를 여행하는 동안 나와 내 친구 호세는 하몽 안주에 리오하산 와인을 마셨고, 때로는 세고비아 기타의 연주를 들으며 타파스(스페인에서 식사 전에 술과 곁들여 간단히 먹는 소량의 음식)를 즐겼다. 그리고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첫째,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야 할 때가 있다. 스페인 미술의 거장들이 걸어간 길에서 배운 바다. 이는 마드리드에 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호세도 나도 역사가다. 우리가 나아갈 길 또한 그러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엘 그레코가 주장했듯이 ‘형체보다 색채가 우선’한다. 구체적 사실 또는 개별적 사건보다는 역사적 맥락이 우선한다는 의미다. 해석이 사실에 앞선다고 말해도 좋겠다. 

둘째, 스페인의 역사적 거인들은 우회적으로 정권과 맞서 싸웠다는 점이다. 이들은 국민의 삶을 옥죄는 기성 체제에 반대하며 때로는 곤욕을 치렀고 세상에서 쉽게 잊혔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 앞에서는 찬란하게 부활했다. 세르반테스의 삶을 보더라도 작가는 지배 체제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세상에 맞설 미학적 구도를 설계하는 데 힘을 쏟았다. 

마지막으로, 스페인의 유명 예술가들은 힘없는 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피카소, 가세트 등은 지배 세력을 대표하는 가톨릭교회의 명령과 질서에 저항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스승이다.




신동아 2019년 7월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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