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량안천하(猪糧安天下·돼지고기와 식량이 천하를 평안케 한다)라는 경구에서 미뤄볼 수 있듯 돼지고기는 중국인의 주식(主食)이다.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종식되지 않으면 축산물 세계 시장 가격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육류 소비자도 피해를 본다.
중국 푸젠성 장저우 축산 농가가 사육하는 돼지.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이 블랙홀처럼 지구의 특정 자원을 흡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중국이 블랙홀 노릇을 한 것은 다가올 미래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두 차례의 선례가 있다.
중국이 경험한 첫 번째 블랙홀은 종료됐다. 블랙홀의 문이 닫혀 역사가 됐다. 두 번째 블랙홀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살아 있는 역사다. 영어 시제로 말하면 과거에 시작해 현재까지 계속되는 현재완료형의 계속적 용법이다.
첫 번째 블랙홀은 18세기 중반 시작해 19세기 중반 끝났다. 중국은 가장 가치 있는 재화 중 하나이던 은(銀)을 빨아들였다. 중국으로 들어간 은은 외부 세상으로 다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강력한 구심력(centripetal force) 때문이었다.
첫 번째 블랙홀, 銀
블랙홀 이론과 관련해 두 명의 물리학자가 자주 언급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theory of general relativity)으로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면, 스티븐 호킹이 이를 수정하고 보완했다.호킹의 이론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증발이론(Hawking radiation)이다. 외부로부터 얻는 질량보다 더 많은 질량을 잃으면 블랙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중국의 첫 번째 블랙홀이 19세기 중반 사라진 것은 호킹의 이론처럼 중국으로 유입된 은의 양보다 외부로 유출된 양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첫 블랙홀이 나타난 18세기 중엽 중국의 지배 민족은 4억 인구의 절대다수 한족(漢族)이 아니었다. 과거 여진(女眞), 말갈(靺鞨)로 불리던 만주족(滿洲族)이 중국을 지배했다. 만주족이 세운 청(淸)은 당시가 전성기였다. 성세(盛世)의 시작은 천고일제(千古一帝), 즉 1000년에 한 번 나오는 황제인 강희제(康熙帝) 때부터다. 그의 치세는 아들 옹정제(雍正帝), 손자 건륭제(乾隆帝)로 이어지며 130년의 강건성세(康乾盛世)를 꽃피운다. 그 건륭제 치세 때 블랙홀이 나타났다.
청이 은을 끌어모을 때 은은 지금의 미국 달러화와 비슷한 기축통화(Key Currency) 구실을 했다. 청은 은본위제(silver standard) 국가로 세금도 은으로 거뒀다. 전조(前朝)인 명(明) 때부터 실시되던 일로 명의 조세제도인 일조편법(一條鞭法)과 청의 지정은(地丁銀)은 모두 은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청과의 교역은 은으로 이뤄졌다.
세계 은의 3분의 1이 중국에 있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청은 막대한 은을 보유했다. 청의 은은 정복전쟁을 통해 빼앗거나, 식민지 착취 행위로 모은 게 아니라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것이다. 당시 청의 무역은 독특했다. 상품을 외국에 팔기만 하고, 사지는 않았다. 그 결과 청은 매년 막대한 무역흑자를 달성했고, 엄청난 은을 보유하게 됐다.
외국 상인은 중국에서 물건을 구입해 서구에 팔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 청의 수출품은 차(茶), 도자기, 비단 등으로 품질 면에서 확실한 국제경쟁력을 갖췄다. 특히 수출액의 90% 정도를 차지한 차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중국의 차는 18세기 중반 국제 무역시장에서 킬러 애플리케이션(killer application)이었다.
18세기 ‘소확행’, 티타임
홍콩의 한 창고에서 열린 차 경매에 참석한 유럽 차 상인들(오른쪽).중국 은(銀) 동전(아래). [위키피디아, REX]
18세기 중국산 차는 서구인을 매료시켰다. 구매력이 큰 소수의 귀족뿐 아니라 중산층은 물론 노동자들까지 차를 찾았다. 서구는 향긋한 차가 주는 매력에 푹 빠졌다. 유럽인은 동방의 차를 구입하고자 적지 않은 비용을 들였다. 달콤한 비스킷 한 조각과 함께 차를 마시는 티타임(tea time)은 새롭게 경험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요즘도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경우가 꽤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이지만 커피가 주는 즐거움이 한 끼 밥이 주는 만족보다 클 때도 있다. 18세기 유럽인에게 중국의 차는 이와 비슷했다. 당시의 차는 현대의 커피보다 훨씬 비싼 사치품이었다.
문제는 중국과 서구의 평평하지 않은 무역 구조가 고착화했다는 점이다.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만성적인 대중(對中) 무역적자에 시달린 영국은 비열하게도 반칙과 무력을 사용했다. 영국은 아편을 식민지 인도에서 들여와 청의 뒷골목에 유통시켰다. 아편의 위력은 대단했다. 영국은 무역수지 균형을 단기간에 맞추고 종국에는 무역흑자까지 발생했다. 청의 뒷골목에서는 아편중독자가 늘어났다. 청의 분노는 극에 달해 아편은 압수되고 불태워졌다.
아편 사업 회복을 원한 영국은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인 아편전쟁(The Opium War)을 일으켰다. 전쟁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청군(淸軍)은 평화에 중독돼 이빨과 발톱이 빠진 호랑이 신세였지만, 전쟁을 일으킨 영국군은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국의 첫 번째 블랙홀은 완전히 증발하고 만다.
두 번째 블랙홀, $
덩샤오핑의 업적을 기리는 선전물. [윤완준 동아일보 기자]
두 번째 블랙홀의 기획자는 실용주의자 덩샤오핑(鄧小平)이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이념의 울타리에 매몰돼 있던 낙후된 중국 경제를 정치에서 분리해낸 업적을 가지고 있다.
덩샤오핑은 1978년 정협(政協)의 주석(主席) 자격으로 중국의 실권을 잡는다. 그는 모든 가치의 최우선에 경제를 뒀다. 그의 집권 이후부터 중국은 매년 가파른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성장한 제조업 강국 중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같은 쟁쟁한 경제 대국을 경제 규모 면에서 앞서게 됐다. 이제는 미국에 이은 두 번째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중국 성장의 자양분은 수출이었다. 중국은 수출을 통해 막대한 규모의 무역흑자를 거뒀다. 하지만 거대한 무역흑자는 중국에 양날의 검과 같다. 중국의 흑자가 다른 나라에는 적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막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하던 미국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공자(公子)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지나친 것은 화(禍)를 부른다.
2018년 미국의 무역적자는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상품수지 적자 규모가 8913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중 대중(對中) 적자는 4192억 달러로 전체 적자의 47%를 차지했다. 참다못한 미국은 거대한 관세폭탄을 중국을 향해 투하하고 있다.
기축통화인 미국의 달러화를 무섭게 빨아들이는 두 번째 블랙홀은 첫 번째 블랙홀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중국은 두 번의 블랙홀에서 상대방의 값진 재화를 엄청난 규모로 흡수하면서도 상대방의 물건을 구입하는 데는 별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두 번 모두 심각한 갈등이 발생했으며 충돌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전쟁이 일어났으며, 두 번째는 무역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두 번째 블랙홀은 중국 외교정책의 전환과도 관련이 있다. 1978년 집권한 덩샤오핑은 2078년까지 100년 동안 중국의 내실을 다지는 일에 노력을 집중한다는 노선을 내세웠다. 국제사회에서 함부로 근육을 자랑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덩샤오핑의 이 같은 외교는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로 요약된다. 도광양회는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안하며 꺼낸 말이다. 제갈량은 중원에 기반을 잡은 조조와 강동에 터를 잡은 손권에 대항하려면 파촉(巴蜀)에 웅크려 충분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외교의 방향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3년 발표된 외교정책 방향인 화평굴기(和平崛起)는 평화롭게 우뚝 선다는 뜻을 가졌으나 방점은 화평이 아닌 굴기에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중국의 패권 추구를 더는 숨기려 하지 않는다. 시진핑은 2012년 미국과 동등한 관계, 국제사회에서 위상 찾기, 경제 패권국가로의 도약 등을 내용으로 한 중국몽(中國夢)을 발표했다. 또한 중국 주도의 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도 추진하고 있다.
시진핑 집권 후 미국과 중국 양국은 곳곳에서 갈등을 빚는다. 2078년까지 도광양회할 것을 당부한 덩샤오핑이 맞을지, 패권의 의지를 드러낸 시진핑이 맞을지는 시간과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두 번째 블랙홀의 증발과도 관련이 있다.
저량안천하, 중국 통치자가 명심할 경구
가까운 미래 중국에 등장할 블랙홀은 앞서 발생한 것과는 성격이 다를 것이다. 미래의 블랙홀은 돈이 아닌 식량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의 주식(主食)이나 다름없는 먹을거리를 중국이 엄청나게 빨아들일 것으로 추정된다.18세기 중반 첫 번째 블랙홀이 발생했을 때 중국 인구는 4억 명이었으나 세 번째 블랙홀 발생이 임박한 21세기 초반 인구는 그때보다 10억 명이나 증가한 14억 명에 달한다. 14억 중국인을 이끄는 정치지도자가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경구(警句)가 하나 있다. 저량안천하(猪糧安天下), 돼지고기와 양곡이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뜻이다. 거꾸로 해석하면 돼지고기와 식량이 부족하면 나라의 안정이 담보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저량안천하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글자의 배열 순서다. 돼지고기 저(猪)가 양곡(糧穀)의 양(糧)보다 먼저 등장하는데, 이는 중국인이 돼지고기를 양곡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방증한다. 따라서 평안하게 정치하려면 시장에 돼지고기의 공급이 부족해서는 안 되며, 돼지고기를 충분히 먹는 세상이 태평성세인 셈이다.
2017년 기준 세계 돼지고기 소비량은 1억1059만t이다. 그중 중국이 소비한 양은 절반가량인 5494만t. 14억 중국 인구가 70억 인류가 먹는 돼지고기의 절반을 먹은 셈이다. 엄청난 돼지고기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중국은 세계 돼지 사육 두수의 절반에 달하는 4억5000만 마리를 길렀는데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160만t의 돼지고기를 수입했다(2017년 기준).
중국 돼지를 살찌우는 것은 잔반(殘飯)이 아닌 콩이다. 콩으로 만든 대두박(大豆粕)이 돼지의 주식이다. 중국은 2018년 기준 1420만t의 콩을 생산했으나 그 정도로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결국 9600만t의 콩을 수입해 돼지들에게 먹였다.
중국은 돼지고기 생산량이 소비량에 약간 미치지 못해 소량을 수입해야 하고, 돼지 사료인 콩은 절대량이 부족해 해외에서 대량 수입해야 한다.
2018년부터 미·중 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면서 상대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한다. 중국은 돼지의 주식인 미국산 대두는 물론 미국산 돼지고기에 대해서도 높은 관세를 매기고 있다. 이는 공화당 정권을 지지하는 팜 벨트(farm belt) 지역의 농민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풀이된다. 이 조치 때문에 중국 내 양돈 농가와 소비자가 경제적 부담을 떠안고 있다.
세 번째 블랙홀, 세상의 모든 육류
5월 16일 홍콩에서 한 시민이 냉동 돼지고기를 구입하고 있다. 중국에서 수입한 돼지에서 돼지열병바이러스가 검출돼 홍콩도 비상이다. [뉴시스]
네덜란드 금융기관인 라보뱅크(Rabobank)는 올해 2억 마리의 중국 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해 폐사 혹은 살처분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돼지고기 생산량이 전년 대비 30% 정도 감축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중국의 돼지고기 부족 사태가 단기간에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돼지고기는 살아 있는 돼지의 몸에서 생산된다. 부족 물량을 공장에서 생산할 수가 없다. 돼지는 생육기간을 가진 포유동물이다. 임신, 출산, 성장, 비육 기간을 거쳐야 한다.
중국 돼지에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되는 아프리카돼지열병과 관련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발병 36년과 35년이 지나서 전염병 종식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이 치러야 할 전염병과의 전쟁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중국인 1인당 매년 40㎏에 가까운 돼지고기를 소비한다. 돼지고기가 없는 중국요리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돼지고기는 다른 육류가 가지지 못한 깊은 풍미와 부드러운 질감을 갖고 있다.
중국은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종식될 때까지 과거보다 많은 물량의 돼지고기를 수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돼지고기는 국제시장에서 대량 구입이 어렵다. 2017년 기준 세계 돼지고기 생산량은 1억1059t인데, 그중 수출량은 7.5%에 불과한 828만t이다. 생산국에서 내수용으로 대부분 소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이 수입을 통해 돼지고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 피해가 없던 2017년 돼지고기 소비량 5494만t을 중국의 평균 돼지고기 소비량으로 가정하고, 여기에 라보뱅크가 추정한 생산량 감소 비율인 30%를 넣고 계산하면, 1648만t의 부족분이 나온다. 이는 돼지고기 국제 수출량 828만t의 두 배에 달한다. 해외로부터 조달이 불가능한 수준의 물량이다.
세 번째 블랙홀은 중국 양돈산업이 당하는 피해 규모에 따라 크기가 다를 것이다. 라보뱅크의 전망대로 상황이 전개되면 중국인은 돼지고기 대신 쇠고기와 닭고기 같은 대체품을 찾을 것이다. 하루빨리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종식되지 않으면 세계시장에서 축산물 가격이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육류 소비자도 피해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