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현 국정원), 실종 열흘 뒤에야 가족에게 알려
국가 위해 헌신한 청년에게 국가는 무엇을 해줬나
국정원 “찾고 있다” “결론 안 났다” “무단이탈 직권면직” 말 바꾸기
미궁에 빠진 사건 45년 만에 재조명되나
변재의 씨가 행방불명된 동생 우의(위) 씨의 사진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현상 기자, 변재의 제공]
1974년 6월 23일 오후 국가정보원(당시 중앙정보부, 이하 국정원) 정규과정 11기 요원 변우의(1947년생, 당시 27세) 씨가 청사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국정원은 열흘 뒤에야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에는 요원들이 가족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말라는 압박까지 가했다. 45년간 가족의 수차례 진정에도 국정원이 가족에게 답한 것은 “아직도 찾고 있다”는 말뿐이었다.
변씨의 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 가운데 맏형 재의(74) 씨는 “내가 죽기 전에 이 문제를 꼭 매듭짓고 싶다”며 “국정원의 초동 대응 부실로 45년이 지나도록 미궁에 빠져 있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말했다.
“그동안 저희 가족은 가슴에 피멍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수사기관이 45년간 직원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말이 됩니까.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젊은이에게 국가는 무엇을 해줬습니까.”
맏형 재의 씨에 따르면, 당시 중정은 사고가 발생한 뒤 열흘이나 지나서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중정 직원인 A지도관이 가족을 찾아와 소지품(안대, 수건, 책, 수첩, 옷 등)이 담긴 큰 가방을 전달하고 행방불명 당시 상황을 전했다. 우의 씨는 6월 22일 토요일 외출했다가 이튿날인 23일 오후 1시경 숙소(2인 1실 사용)로 돌아와 안대를 하고 낮잠을 잤다. 하지만 오후 5시 석식 시간과 6시 점호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중정 직원들은 우의 씨의 자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청사 뒷산인 성북구 천장산 일대를 며칠간 수색했으며, 경찰에도 실종 신고를 했다. 이는 A씨 외에도 복수의 인물이 전한 내용이다.
반면 우의 씨의 동기생 B씨는 “우의 씨가 23일 영내에 들어왔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면서도 “다음 날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아 직원들이 함께 찾아다닌 것은 기억난다. 불가사의하고 전무후무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근무 성적 우수’
변재의 씨 가족은 2008년 가족묘에 행방불명된 우의 씨의 단을 설치했다. [변재의 제공]
군 전역 뒤인 1972년 대학을 졸업한 우의 씨는 외무고시를 준비했으나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등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우의 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공부를 지속했고, 1974년 1월엔 방향을 틀어서 중앙정보부에 합격했다. 이후 우의 씨는 6개월 동안 착실히 근무했고, 성적도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랬던 우의 씨가 갑자기 사라지자 가족들은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재의 씨의 말이다.
“처음엔 대북요원이나 해외 공사로 파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교육생이지만 시대가 워낙 엄혹했고, 동생의 과거 군 경력이나 8형제 중 3남이고 미혼 상태인 점 등을 고려하면 그런 일도 가능할 것이라 봤거든요. 그래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조용히 놔두는 게 동생이 근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이게 아니다 싶어 진정서를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국가안전기획부 등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한결같이 “당국에서도 찾고 있음”이라는 답변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 진정서를 제출한 뒤인 1985년 봄 안기부는 재의 씨를 남산 청사로 불렀다. 재의 씨는 경찰 출신인 매형과 함께 청사로 갔지만, 자신만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혼이라도 편히 머무르시길’
“동생의 소지품을 갖고 저희 집에 왔던 A 지도관과 다른 직원 4명이 저를 취조하듯 캐물었어요. 그때 A 지도관은 제가 동생 일로 진정서를 넣을 때마다 자신이 조사를 받아야 해서 근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며 원망하더군요. 저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그 내용을 제대로 모른 채 서류 2장에 서명을 했는데, 그게 다시는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정부에 진정서를 또 냈을 때 ‘다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서명하고도 ‘왜 이의를 제기하나’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아무튼 그들과 얘기를 하고 나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때 기억이 선명합니다.”학교와 관공서에 비품을 납품해오던 재의 씨는 동생의 일과 관련해 정부에 진정서를 보내면서도 자신의 사업에 영향이 올까봐 늘 조바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제는 저도 인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입니다. 저세상에 가서도 부모님 뵐 면목이 없어요. 70년 전의 4·3사건, 여순사건 등 과거사들이 최근 재조명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 다시 언론에 문제 제기를 하게 됐습니다. 서로 성격은 다른 사안이지만, 진실을 밝혀야 하는 것은 같으니까요.”
2008년 3월 변씨 가족은 가족묘에 우의 씨의 단(壇)을 설치했다. 단에는 ‘혼이라도 편히 머무르시기를’이라고 적었다. 행방불명 34년 만의 일이다. 생존해 있다면 정년으로 은퇴할 나이인 61세 때다.
이 사건과 관련해 5월 말 국회 정보위원회 한 의원실에서 의견을 묻자 국정원은 “최종 결론 난 게 아니어서 자료를 제출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하지만 2주 뒤 국정원의 말이 바뀌었다. 신동아 질의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기록을)다방면으로 찾아보았으나,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의 씨는 1974년 임용돼 교육받던 중 무단이탈하고 미복귀해 직권면직된 기록만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구두로 답변했다.
결국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의원실에 답한 것이 사실이라면, 45년간 ‘미결론’이었던 사건을 언론이 취재에 들어가자 별다른 해명 없이 2주 만에 서둘러 ‘직권면직’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 된다.
‘청와대·국정원 앞 시위하겠다’
변재의 씨는 “수십 년간 찾고 있다고 했던 국정원이 이제 와서 ‘무단이탈로 직권면직됐다’고만 말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 아닌가”라며 “45년째 행방불명인 국정원 요원의 명예를 더는 짓밟지 말고, 모든 사실을 투명하게 밝혀라”라고 주장했다. 변씨는 또 “국정원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희생된 요원들을 보국탑에 별로 기리고 있는데 동생도 별로 기려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된 최덕근 영사 등 18명만 별로 기리고 있고, 변우의 씨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변씨는 앞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동생의 사건이 제대로 해명될 때까지 청와대와 국정원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