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만행, 김훈 중위 의문사, 오청성 귀순 ‘역사 현장’
초대형 태극기와 인공기는 체제경쟁 기억 떠올려
5월 1일 재개방, 부대 구호 ‘in front of them all’(최전방에서)
한국인 ‘여친’ 둔 맥셰인 소령, 북한군에 ‘자랑’
9·19 평양선언 훈풍…권총 대신 전투복에 베레모
공동경비구역 자유왕래 언제쯤 가능할까
[홍중식 기자]
1952년 창설된 JSA경비대대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왼쪽)과 소회의실(T3). [홍중식 기자]
첫 번째 검문소 통과 후 다시 5분여를 달리니 태극기와 성조기로 장식된 진입로가 나타났고, 이어 두 번째 검문소가 보였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를 담당하는 유엔사경비대대(통칭 JSA경비대대) 입구다. 부대 구호는 ‘in front of them all(최전방에서)’, 최전선을 지키는 부대답다. 스피커에서 ‘전선을 간다’ 등 군가가 흘러나와 ‘군사지역’에 들어섰음을 직감했다.
JSA경비대대는 6·25전쟁 중이던 1952년 5월, 장교 5명, 병사 10명으로 창설됐다. 주 임무는 정전회담 지원이었다. 1953년 정전(停戰) 무렵에는 부대원 수가 1만9000명에 달했다. 현재는 한국군 600여 명과 유엔군 70여 명으로 구성돼 있다. 예하 2개 경비중대, 1개 민정중대로 편성돼 있으며, 1개 경비중대와 1개 민정소대 병력이 교대로 최전방에 배치된다. 그중 JSA 지역에는 경비대대 소속 인원 35명, 북측 인원 35명이 교대 근무한다.
첫 번째 검문소는 무사통과했으나, 두 번째 검문소에서 길이 막혔다. 초소 경비병은 “판문점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내자 인솔이 필요하다”며 차를 돌려 대기할 것을 권했다. ‘12시 30분에 통일대교에서 만나자’던 유엔군사령부 공보실 관계자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먼저 검문소를 통과한 것이 화근이었다. 부대 정문 옆 주차장에서 40분여 기다리자, 차량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도 차량에 탑승한 한 한국 남자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따라오세요”라고 안내한다. 김영규 유엔사령부 공보관이었다. 선도 차량을 따라 부대 경내로 진입했다.
오후 1시, 안보교육관에 입소했다. “북한군이나 민간인을 만날 때 말을 걸거나, 손짓 등 호의를 보이는 행동은 엄격히 제한한다” 등 주의사항이 담긴 보안서약서에 서명한 후, 기자 완장을 착용하고 25인승 버스에 탑승했다. 차량에는 미디어데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5개 내·외신 기자, 김영규 공보관 외 유엔군사령부 공보실 직원, JSA경비대대 정훈·공보장교와 안내병사, 미군 관계자가 동승했다.
김훈 중위 의문사한 ‘오바마 초소’
북한군이 판문점 북측 판문각에서 망원경으로 남측 지역을 살펴보고 있다. [홍중식 기자]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니 차창 밖으로는 ‘대성동 마을 입구’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자유의 마을’로도 불리는 대성동 마을은 47가구, 94명이 거주한다. 대성동 마을은 대한민국 영토 내에 자리하지만,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역이다.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며 민정(民政) 업무도 JSA경비대대 예하 민정중대가 맡는다. 마을 주민은 참정권·교육권을 가지고 있으나, 납세·병역 의무는 면제받는다. 매일 저녁 7~10시 민정중대의 가구별 인원 점검을 받아야 하고, 자정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가 실시된다. 주민은 1년에 8개월 이상 마을에 거주해야 거주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대성동 마을 현황 설명을 듣는 사이 대형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일명 ‘대성동마을 태극기’다. 국기 게양대 높이는 아파트 33층에 해당하는 99.8m다. 게양된 국기는 가로 19m, 세로 12m. 1980년 12월 18일 85m 높이로 건설된 게양대는 이듬해 보수 공사를 거쳐 현재 높이가 됐다. 차창 오른쪽을 바라보니 대형 인공기도 보인다. 대성동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1.8km 떨어진 북한 ‘기정동마을 인공기’다. 남한의 태극기에 자극받은 북한은 1982년 2월 16일 높이 165m 철탑을 세워 가로 30m, 세로 15m의 인공기를 게양했다. 치열했던 남·북한 체제경쟁, 체제 선전전의 산물이다.
“테이블에 물건 올리지 마세요”
남북 장성급 회담 시 양측 군 대표단이 마주 앉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 테이블 위 마이크 장치는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한다. [홍중식 기자]
안내에 따라 T2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 건물에 들어섰다. 남·북한 장성(이성장군·남한은 소장, 북한은 중장)을 대표로 하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개최 장소다. 회의장 내에서는 남북 경계 없이 자유로이 월경(越境)할 수 있다. 중앙에 놓인 회담 테이블의 가운데를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취재수첩을 테이블 위에 올리자 동행한 한국군 병사가 “테이블 위에 물건을 올리지 마세요”라며 주의를 준다. 회의장은 남·북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한국 측에 관리책임이 있는데, 상대방에 대한 배려 차원이라는 설명이다. 남북한이 ‘공유’하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에는 남북 양측에서 입장이 가능하다. 서로 조우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한 규칙도 있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먼저 구경하는 선착순 원칙이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5월 26일 금강산에서 첫 회담을 연 후, 2018년 10월 26일 제10차 회담이 개최됐다. 10차 회담에서 적대행위 중지, GP 시범 철수, 공동 유해 발굴, 임진강 수로 조사 등을 합의했다.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 밖에는 남한군 경비병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지난날 영화나 사진에서 보던 차림새(MP 글자가 찍힌 방탄모를 쓰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의 병사는 없었다. 그냥 평상 전투복에 베레모를 썼을 뿐이다. JSA 경비대대 병사의 특권이자 상징처럼 여겨지던 권총도 휴대하지 않았다.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 중 군사 분야 합의의 산물이다. 합의서 2조 3항에서 남북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를 합의했다. 이후 비무장화가 진행됐고 10월 26~27일 공동경비구역 내 남북 시설물 상호 공동검증을 거쳐, 28일 유엔군사령부는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를 선언했다.
회의실을 나오자, 한 미군 장교가 취재진의 이목을 끈다. 대니얼 맥셰인(Daniel McShane) 해군 소령이다. 유엔군사령부 일직(당직) 장교로 북한군과의 연락을 담당한다. 공동경비구역 남측 구역에 자리한 일직사관 사무실에서 38m 떨어진 북측 통일각에는 직통전화가 가설돼 있다. 2013년 3월 북한의 일방적 정전협정 무효 선언 후 단절됐던 직통전화는 지난해 7월 재개됐다.
매일 통화하는 미군 장교와 북한군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도보다리’ 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7월 직통전화 재개 이후 현재까지 180회의 통화가 이뤄졌다. 비무장지대(DMZ) 지뢰 제거, 6·25전쟁 전사자 유해 송환 등이 대화 주제였다. 2013년 2월부터 판문점 근무를 시작한 맥셰인 소령은 곧 6년 4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북한군을 만나 악수하며 작별인사를 전하는 것이라고 한다.
오후 1시 40분 마지막 견학 장소로 향했다. 지난해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산책하며 단독 대화를 나눈 도보다리다. 다리는 6·25전쟁 정전 직후 중립국(당시 체코, 폴란드, 스위스, 스웨덴) 감독위원회 장교들이 판문점을 드나들 때 동선을 줄이기 위해 습지 위에 놓은 것이다. 원 이름은 ‘풋 브리지(Foot Bridge)’인데 우리말로 직역해서 ‘도보다리’라 불린다. 한동안 거니는 사람도 돌보는 사람도 없던 이 다리는 지난해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했다. 유엔군사령부의 상징색인 파란색 페인트도 칠했다. 이후 ‘블루 브리지’라는 새 별칭을 얻었다. 남측 관할구역 밖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로 이어지는 다리는 중간에서 더는 건널 수 없다. 사건 현장에 설치된 노란색 ‘폴리스 라인’처럼 ‘출입금지’를 의미하는 파란색 경계라인이 설치됐다.
분단의 상징, 한반도의 방아쇠
1992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에서 남북한 군인이 엇갈려 선 채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김녕만 사진작가 제공]
공동경비구역은 1963년 설치된 이래 유엔사령부 측과 북측(북한·중국) 관계자는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경비초소도 남북 양측에 혼재돼 있었다. 남측에도 북측 초소가, 북측에도 남측 초소가 있었다. 분단 이후 남북한이 유일하게 자유 왕래가 가능했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도 ‘분단’이 찾아온 것은 1976년이다. 그해 8월 18일 공동경비구역 남측 유엔군 제3초소 앞에서 경계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감독을 하던 JSA경비대대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1943~1976) 대위, 경비소대장 마크 배럿(1951~1976) 중위가 북한군 30여 명이 휘두른 도끼에 목숨을 잃었다.
격분한 미국 정부는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고, 공동경비구역 내 북한군이 불법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실시했다.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미국 전설에 등장하는 거구의 나무꾼 ‘폴 버니언’에서 따온 작전명)이었다.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3’가 발령되고, F-4 전투기,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B-52 폭격기가 한반도에 급파됐고, 미 해군 제7함대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도 한반도 해역에 진입했다.
전쟁 위기 상황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은 “인민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가장 빠른 방법으로 당신 측(유엔군 측) 총사령관에게 전해주기 바랍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에 유감을 표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라고 유감을 표명했고, 미국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전쟁 발발은 피했다. 대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 남북 간 경계가 설정됐다. 9월부터 군사분계선 시설물이 들어섰다. 공동경비구역 외곽, 건물이 없는 지역에는 1m 높이의 흰 말뚝이 10m 간격으로 126개가 설치됐다.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등 시설물 사이에는 높이 5㎝, 폭 50㎝의 콘크리트 경계석이 놓였다. 사건 10주기인 1986년 8월 18일, JSA경비대대 캠프 키티호크(Kitty Hawk)가 보니파스 대위를 기려 캠프 보니파스로 개칭됐다.
영화와 현실
1976년 도끼만행 사건 이후,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남북 분단 상태는 지속되고 있다. 9·19군사합의서 후속 조치로 공동경비구역 경내 자유 왕래를 위한 공동근무수칙 마련과 감시장비 조정 문제에 대한 협의가 진행됐다. 비무장화는 진행됐지만, 자유 왕래를 위해 필요한 남·북공동 근무수칙은 합의에 진통을 겪었다. 남북 양측은 여전히 경계석을 넘지 못하는 형편이다. 언제 자유 왕래가 이뤄질지도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를 고려하면 요원하다.일반인에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존재 의의를 되새긴 것은 박찬욱 감독의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다. 박상연의 장편소설 ‘DMZ’(1997)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는 1998년 2월 김훈 중위 사망사건 발생 후 ‘현실성’을 평가받았고, 작품성과 상업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JSA경비대대에서 발생한 남북 군인 간 총격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사실과 허구를 교묘히 넘나든다.
주인공 소피 장 소령(이영애 분)은 6·25전쟁 정전 후 제3국행을 택한 인민군 장교의 딸로 스위스 국적의 법무관이다. 중립국감독위원회 소속인 그는 사전 조사를 위해 남북한을 오간다. 하지만 이는 허구다. 정전협정 체결 후 중립국 감독위원회는 남측 유엔군사령부가 지명한 스위스와 스웨덴, 북한·중국이 지명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로 구성됐다. 1990년대 구소련 해체 등 공산권 국가 붕괴 속에서 북한은 1993년 체코 대표단, 1995년 폴란드 대표단을 중립국감독위원회에서 추방하고,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을 폐쇄하는 등 중립국감독위원회 활동을 중단시켰고, 스위스·스웨덴 국적의 장교 출입도 금지했다. 비무장지대(DMZ) 발생 총격사건 등 정전협정 위반 사례 조사는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아닌 군사정전위원회 임무다.
“대결의 장소가 교류의 장소로 바뀐 것”
군사분계선(MDL)을 따라 동서 방향으로 놓인 회의실 앞을 비무장한 군인이 지나고 있다. [홍중식 기자]
“1984년 9월 북한의 대남 수재(水災)물자 제공 제의를 남한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걸 계기로 그해 11월 남북경제회담을 시작으로 적십자회담, 국회회담, 체육회담 등이 연이어 열렸습니다. 이듬해 9월에는 첫 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이 성사돼 남북 간 교류에 물꼬를 텄습니다. 이후 1990년 남북한 총리 간 고위급회담이 열렸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도 서명했습니다. 이후 북핵 위기 등을 거치며 남북관계가 경색되기도 했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판문점 비무장화도 이뤄졌다는 점에서 감개무량합니다.”
김 공보관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역사의 산증인이다. 제주도가 고향인 그는 제주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영어에 친숙했다. 연세대 사학과 재학 시절에는 ‘타임’ 등 영자지를 섭렵했다. 1976년 30세에 카투사에 입대한 그는 미 육군 제2사단에 배치받았다. 부대 배치 후 부대 기관지 ‘인디언헤드(Indian Head)’ 기자로 일했다. 동두천 기지촌 혼혈아 기사 등이 반향을 일으켰다.
김 공보관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도끼만행 사건 때부터다. 취재 명령을 받은 즉시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방탄복 차림이었다. 북한 측이 총 한 방만 쐈어도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목숨을 건 취재였다. 제대 후 미 육군 제2사단 공보실 군무원으로 채용돼 일흔을 넘겨서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다. ‘국토 최남단에서 태어나 최북단에서 일하는’ 그는 유엔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 3곳에 소속됐다. 주한미군사령관이 3개의 직책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명함도 3개가 됐다. 연간 30차례 이상 판문점을 드나든다고 했다.
취재를 마치고 승합차에 오르는 찰나, 김 공보관이 한 표지석을 가리켰다. 표지석에는 국·영문으로 ‘최전방에서 쏘련인 귀순자 사건에서 전사한 장명기 상병에게 헌납 1984. 11. 23.’이라 씌어 있다. 1984년 11월 23일 구소련 관광안내원 바실리 야코볼리비치가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귀순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 경비병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총격을 가했고, 총탄에 장명기 상병(당시 일병)이 목숨을 잃고, 미군 1명이 부상했다. 북한군도 경비병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했다. ‘2017년 북한군 오청성 귀순사건’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총격을 가한 유일무이한 사례로 기록됐다.
7개월 만에 다시 문을 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경비병력 비무장화 면에서는 1976년 이전으로 돌아갔지만, ‘자유 왕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내를 자유롭게 오가는 꿈은 언제 이뤄질까. 반쪽짜리 공동경비구역 취재기가 아닌 온전한 취재기를 쓰는 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