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찰(察)이다. 남을 관찰(觀察)하고, 나를 성찰(省察)하며, 세상을 통찰(洞察)하는 도구여서다. 찰과 찰이 모여 지식과 교양을 잉태한다. 덕분에 찰나의 ‘책 수다’가 묘한 지적 쾌감을 제공한다. 정작 살다 보면 이 쾌감을 충족하기가 녹록지 않다. 검증된 지식 커뮤니티가 우리 사회에 드물어서다. 이에 창간 88주년을 맞는 국내 최고 권위의 시사 종합지 ‘신동아’가 ‘지식커뮤니티 Book치고’를 만들었다. 회원들은 한 시즌(4개월)간 월 1회씩 책 한 권을 고재석 ‘신동아’ 기자와 함께 읽는다. 5월 28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Book치고 세 번째 모임이 열렸다. 함께 읽고 토론한 책은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의 저서 ‘축적의 길’과 공저서 ‘축적의 시간’이다. 멤버들이 정성스레 써온 서평 중 일부를 골라 소개한다.
[편집자 주]
크기 때문이었다. 손바닥 크기만큼 부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선생님은 설명했다. 내가 부친 녹두전은 손바닥보다 검지 손톱만큼 더 컸다. 굽기도 적당하고 모양도 반듯한데, 조금 크다고 감점이라니. 어린 나이였지만 분하고 억울했다.
바로 그날,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가정실습 이후 교과서는 내 바이블이 됐다. 주관대로 행동했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시험 기간이면 조사 하나도 다르지 않게 교과서를 달달 외웠다. 성적은 오르고 또 올랐다.
비단 나뿐일까. 배짱 두둑한 괴짜가 아니고서야 성적이 걸린 일에 위험을 무릅쓰긴 쉽지 않다. 주관을 묻는 시험지엔 교과서에 적힌 모범 답안만 가득하다. 한국 교육에 대한 갑론을박이 식지 않는 이유다.
‘축적의 길’의 저자는 괴짜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 그려놓은 밑그림을 뚝딱 만들어주는 ‘실행’ 역량을 가진 모범생만으로는 한국 산업의 성장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게 ‘개념설계’ 역량이다. 백지 위에 밑그림을 잘 그려내야 기업과 산업이 발돋움할 수 있다.
단, 오해는 금물. 흔히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하지만 산업 현장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홀연히 세상에 나타나 혁신에 성공하는 ‘고독한 천재’는 없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을 내놓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실패로 내몰았다. ‘개념설계’ 역량은 제품의 밑그림을 그려보고 뒤엎고 다시 적용하는 시행착오 속에 배양된다.
그러려면 실패에 초연하고 정답에 목매지 않는 괴짜가 필요하다. 괴짜가 상처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학생의 창의적 답안에 감점을 매기지 말고 존중을 표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산업에서의 새로운 시도를 냉대해서는 안 된다. 실패해도 일어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 금융, 정책, 문화가 맞물려 견고한 지지대 노릇을 할 때 가능한 일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부담을 나누어지는 ‘위험공유 사회’에서 시행착오의 총량은 늘 수 있다.
종종 그날의 결심을 후회한다. 실습 이후 담대한 도전을 이어나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송편을 네모 모양으로 빚고, 김치를 썰지 않고 기다랗게 죽죽 찢어 김치전을 부쳤다면 어땠을까. 보나마나 0점이겠지만 삶은 더 풍요로워졌을 거다. 과감히 도전하고 실패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오늘도 교과서를 외우며 ‘암기왕’이 되고 있을 출중한 괴짜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꽉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