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개량한옥이 ‘인싸’ 카페로
낡은 공간 전유한 레스토랑‧잡화점에 2030 발길
근처에 이색적 붉은 벽돌 건물 ‘중앙대교당’
일제 속여 모은 돈, 건물 짓고 독립운동 돕고
3·1운동 동갑내기 100년 떡집도
세월 따라 기와 위 더께는 켜켜이 쌓였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돈된 실내에 맛난 음식 냄새며 은은한 커피 향기가 풍깁니다. 최근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는 ‘익선동 골목길’ 얘깁니다. ‘익선동 골목길’의 유행은 ‘레트로(Retro)’ 감성에 기대는 바가 큽니다. ‘레트로(Retro)’ 감성은 ‘회상’ 혹은 ‘추억’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trospect’에서 따온 것이니 ‘복고주의’ 내지는 ‘복고풍’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익선동 골목길'은 '레트로 감성'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입니다. [김우정 기자]
‘익선동 골목길’만 ‘핫플’이 아니다
좁은 길들이 종횡으로 만나는 ‘익선동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삼일대로라는 왕복 6차선 길이 나옵니다. 삼일대로 부근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핫 플레이스’였습니다. ‘사바나 이리저리’의 첫걸음은 삼일대로가 지나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 일대로 향합니다. 자주 지나치면서도 미처 몰랐던 도시의 숨은 기억들. 1919년 3월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3·1운동의 기억을 따라 걸어봅니다.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 계단을 나와 보니 제법 높은 기와담벼락이 이어집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살던 운현궁(사적 257호)입니다. 그가 아내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 재황, 즉 고종이 태어나 즉위 전까지 지낸 잠저(潛邸)기도 합니다.
운현궁(종로구 운니동) 정문 모습. [김우정 기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에도 삼일대로 일대는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외침을 잉태한 곳이었습니다.
삼일대로에 아로새겨진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중 지방에 있던 4명을 제외한 29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 같은 시각 학생대표와 시민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탑골공원(사적 354호)이 모두 삼일대로 연선에 있습니다.1966년 서울시는 고시1093호를 통해 안국동로터리부터 중앙극장을 지나 충무로2가로 이어지는 도로를 ‘삼일로’로 명명했습니다. 이 일대의 역사성을 고려한 것이죠. 삼일로는 이후 도로 구간이 한남대교 북단까지 연장돼 총거리 약 4.8km인 삼일대로로 이어집니다.
시위대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이어가자 어느새 운현궁 담벼락이 끝납니다. 지금은 덕성여자대 종로캠퍼스가 된 운현궁 양관(洋館) 구역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콘크리트 빌딩들 사이로 이색적인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띕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서울시 유형문화재 36호, 대교당)입니다.
“천도교와 이곳 중앙대교당 건물도 3·1운동과의 인연이 깊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 전경 [김우정 기자]
그의 집안은 1910년대 조부가 천도교에 입교한 후 자신까지 3대째 신자라고 합니다. 선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나온 천도교 관련 자료를 보고 관심이 동했다는군요. 2000년대 초반부터 언론사 자료실, 헌책방 등을 돌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에는 ‘천도교중앙대교당 50년 이야기’라는 책도 냈습니다. 천도교에서 교서편찬위원 등 간부직을 역임하고 교리와 교단 역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자금 보태느라 작아진 교당”
이 씨가 설명을 이어갑니다.“1918년 의암성사(천도교에서 제 3대 교주 손병희를 이르는 말)가 중심이 된 천도교 총회는 숙원이던 교당 건축을 위해 전국 교인들에게 성금을 걷기로 결정했습니다. 반 년 만에 8만6000원이 모였죠. 이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의심한 일제가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을 구실로 성금 반환을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돈을 돌려받은 척하며 모금을 계속했죠. 모금액의 상당부분을 독립운동 지원에 써서 1921년 준공된 실제 대교당은 원래 계획보다 작게 지어졌습니다.”
이런 자금 지원은 물론 3·1운동을 준비, 실행하는 과정에서 천도교의 역할은 컸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을 종파별로 구분하면 각각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입니다. 교주 손병희를 필두로 민족대표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천도교는 3·1운동에 전국적 조직망과 자금력을 동원했습니다. 새삼 대교당 근처를 둘러보니 3·1운동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네요.
6월 12일 이동초 씨가 천도교 중앙대교당 강당에서 궁을 문양을 가리키며 설명중입니다.[김우정 기자]
“종파 떠나 국민 모두의 역사”
삼일대교 대로변의 ‘독립선언문배부터’ 표지석. 담장 너머 천도교 중앙대교당 첨탑이 보입니다. [김우정 기자]
이곳에서는 지금도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 100~150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 의식인 ‘시일식’이 열립니다.
“이곳 대교당은 우리 신자들에게 천도교 하면 으레 떠오르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에요. 하지만 대교당과 일대의 역사는 종파를 떠나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합니다.”
기자를 배웅하며 이 씨가 덧붙인 말입니다.
대교당을 나선 시간은 오후 4시 반경. 삼일대로를 따라 낙원동 악기상가 방향으로 150m 가량 걷자 이번에는 ‘서북학회 터’라고 적힌 표지석이 보입니다. 서북학회는 1908년 이동휘를 회장으로 안창호, 박은식 등 황해도·평안도·함경도 출신 독립 운동가들이 세운 애국계몽단체입니다. 삼일대로변에서 만난 또 다른 역사의 발자취군요.
새빨간 아구찜
점심밥은 벌써 소화되고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허기가 집니다.길 건너편에 ‘아구찜·해물찜’ 간판이 즐비하네요. ‘낙원동 아구찜거리’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횡단보도를 건너가 찬찬히 보니 인근 직장인들의 회식 장소로 유명한 맛집들이 여럿 있습니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 전이라 한산한 풍경입니다. 드문드문 있는 손님들의 식탁 위 새빨간 양념의 아구찜이 먹음직스러워 보입니다. 끼니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입맛만 다십니다.
한편 간판들 사이로 보이는 골목길은 삼일대로 28길입니다. 이 길 따라 종묘 방향으로 쭉 가면 나오는 것이 바로 ‘익선동 골목길’이죠. 일제강점기 지어진 개량한옥을 개조한 카페며 레스토랑 특유의 ‘레트로 감성’이 ‘인싸’들의 감성을 자극한다는 평인데요.
‘인싸’들이 간다는 카페에라도 가볼까 싶어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범상치 않은 가게가 눈에 띕니다. 간판에는 ‘낙원떡집’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점포 앞 벽면에는 ‘서울미래유산’이라 적힌 동판도 눈에 띄고요.
2013년부터 서울시는 공식적으로 등재된 문화재는 아니지만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시내 유무형 자산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하고 있는데요.
100년 이어온 원조 떡집
‘낙원떡집’은 ‘평양냉면’이나 ‘수원갈비’ 정도는 아니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상호입니다. 하지만 이 가게는 3·1 운동과 같은 해 1919년부터 떡을 만들어 팔아온 말하자면 ‘진짜’ 원조집입니다.6월 12일 ‘낙원떡집’(종로구 인사동)을 꾸려가는 3대 사장 이광순 씨(앞)와 아들인 4대 사장 김승모 씨입니다. [사진 김우정 기자]
사장인 김승모(49) 씨의 설명입니다. 가게를 창업한 고이뻐 씨와 2대 김인동 씨, 그리고 김승모 사장의 모친 이광순(75) 씨에 이은 4대째입니다. 오랜 가게 역사만큼 사연도 많다는 군요.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우리 가게 손님이셨습니다. 그 외도 정‧재계 인사며 유명인들 중 단골이 숱하죠. LG그룹 여의도동 본사 준공식 때는 트럭 2대 분량, 지금 돈으로 1억 원치 떡을 납품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김 씨는 “손님이 누구든 떡에 들이는 노력과 정성은 똑같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쌉싸래한 맛의 ‘시그니처’
만드는 떡 종류는 40여 개에 달하지만 현재 ‘시그니처 메뉴’는 하루 천개 이상 팔리는 ‘쑥인절미’.세월 따라 바뀌는 입맛에 맞춰 쑥개떡과 인절미를 결합해 내놓은 떡이라는데요. 은은한 쑥 향기가 입안에 기분 좋게 퍼집니다. 제주도 소재 농장과 계약해 한 해 1톤씩 쑥을 공급받습니다. 찹쌀로 만든 데다 손바닥 절반만한 크기로 두툼하게 썰어놓은 덕에 제법 요기가 되네요. 백년가게도 고민은 있습니다.
“원래 20곳 가깝던 인근의 떡집들도 4곳 밖에 남지 않았어요. 우리 가게도 최근 10년 전에 비하면 매출이 30%이상 줄었습니다. 매년 하락세죠.”
먹거리가 다양해져 떡의 위상이 좁아진 것은 이미 오랜 일이랍니다. 여기에 생일이나 결혼 등 잔칫상에 떡을 푸짐하게 올려 여럿이 나누던 모습이 점차 자취를 감춰가는 세태도 한 몫 한다는 설명입니다.
“장사도 장사지만 전통 음식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가게를 둘러보며 김 씨가 남긴 말입니다.
역사는 도심 풍경에 녹아들고
6시가 넘어 떡집을 나섰지만 해가 길어져 아직 주변은 밝습니다. 골목은 어느새 퇴근한 직장인이며 저녁 마실 나온 젊은이들로 붐비기 시작하고요. 100년 전 함성 가득했던 삼일대로 부근, 오늘 사람들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집니다.저 많은 '쑥인절미'를 집에서 혼자 다 먹었다는 후문. [김우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