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년의 밤’ ‘28’ 등의 소설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정유정 작가가 신작 ‘진이, 지니’를 펴냈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육사의 영혼이 보노보 몸속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판타지 소설이다. 사람과 동물이 ‘종의 울타리’를 넘어 소통하는 이 작품을 놓고, 정 작가와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가 이야기를 나눴다.
[박해윤 기자]
‘진이, 지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번 작품에 보노보라는 낯선 동물을 등장시켰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비슷하게 생긴 유인원이다. 콩고민주공화국 밀림에 모여 산다. 한국 사람이 이 생명체를 마주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동물원을 비롯해 국내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진이, 지니’를 읽으면 이 미지의 생명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보노보의 숨소리, 웃는 모양, 털 움직임에 익숙해진다. 무리 지어 사는 그들의 생태와 독특한 가족관계, 사회구조도 이해하게 된다.
정 작가가 보노보를 이렇게 묘사할 수 있었던 건 상당 부분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덕분이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 영장류 연구를 개척한 인물로 통한다. 최 교수 제자 중 여럿이 보노보, 침팬지 등을 관찰, 연구했다. 정 작가는 최 교수와 그 제자들이 일궈낸 연구 성과를 상당 부분 이 작품에 녹여냈다. 다큐멘터리만큼이나 사실적인 판타지 소설은 그렇게 태어났다.
갓 출간된 ‘진이, 지니’를 앞에 놓고 최 교수와 마주 앉은 정 작가는 “교수님 도움이 없었으면 이 소설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최 교수는 “작품 기획 단계부터 가까이서 지켜봤는데 판타지 소설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책장을 넘기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화답했다.
작가를 꿈꾼 과학자
최재천 | 작가님을 만나면 그것부터 묻고 싶었어요. 애초에 판타지를 구상한 것인지, 아니면 쓰는 도중 방향이 바뀐 것인지. 소설 앞부분은 굉장히 사실적이잖아요. 고발문학 같은 느낌도 들고요. 저는 작가님 취재 과정을 지켜보며 딱 그런 분위기의 작품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런데 다음 장에서 판타지로 방향을 확 트시더군요. ‘와, 이거 봐라’ 싶었죠.정유정 | 교수님을 찾아뵙고 도움 청할 때부터 판타지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어요. 하지만 판타지라고 하면 과학적 내용을 가볍게 다루는 걸로 오해하실까봐 그 부분은 말씀을 안 드린 거죠(웃음). 큰 틀이 판타지여도 보노보와 침팬지에 대해서는 사실적이고 진지하게 다루고 싶었거든요.
최재천 | 네. 소설을 읽으며 정말 열심히 공부하셨구나 생각했어요. 2년 전 겨울 무렵, 우리 연구실에 처음 찾아오셨을 때도 그랬죠. 초반엔 침팬지에 대해 물어보셨잖아요. 그런데 좀 얘기를 나누다 쓱 보노보 얘기를 꺼내셨고요. 속으로 ‘이 양반, 제법 많이 준비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노보에 대해 잘 모를 때예요. 과학책을 즐겨 읽는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소설가가 보노보를 소재로 들고 오다니. 호기심이 생겼어요. ‘진이, 지니’에도 묘사하셨듯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훨씬 협조적이고 다정한 영장류로 여겨져요. ‘그런 내용을 풀어내는 소설을 쓰시려나 보다’ 생각했죠.
정유정 | 제가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한 건 2017년 여름 무렵이에요. 그때부터 자료조사를 저 나름대로 열심히 했어요. 주인공의 직업인 사육사에 대해 취재하고자 서울대공원 우경미 사육사님도 만났고요. 그때 우 사육사님이 “최재천 교수님을 찾아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처음엔 ‘교수님이 나를 만나주실 리가 있나’ 생각했죠. 모르는 사람이 불쑥 “소설 쓰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하면 이상하게 여기시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e메일을 드렸는데 흔쾌히 만나자고 하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솔직히 환호성을 질렀어요.
최재천 | 제 어릴 적 꿈이 작가였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평생 소설을 수십 번 썼다 지웠다 하며 살았어요. 작가라는 직업을 흠모합니다. 작가님이 보자시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버선발로 뛰어나가죠(웃음).
정유정 | 그저 만나주시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질적인 도움도 정말 많이 주셨어요. 제게 “보노보를 직접 보셔야죠?” 하면서 일본 보노보 연구 공간에 갈 길을 열어주신 게 결정적이었죠. 교수님이 그쪽에 잘 말씀해주신 덕에 현장에서 여러 연구를 참관할 수 있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온 연구자들과 보노보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고요.
교수님 제자들을 소개해주신 것도 매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분들이 해주신 말씀, 연구 내용 등이 소설 곳곳에 담겨 있어서 아마 읽으며 찾는 재미가 있으셨을 거예요.
침팬지가 “와하하” 웃으니…
[박해윤 기자]
정유정 | 네. 그런데 교수님은 너무 유명하셔서,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볼까봐 이야기를 좀 흩어놓았어요. 진이가 사육사가 된 계기를 설명하는 대목 등, 소설 여기저기에 교수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들어 있죠.
최재천 | 저는 그 내용들을 기억하니까 책을 읽으며 눈에 좀 띄더라고요. 우리가 나눈 대화가 이렇게 이야기가 됐구나 되짚어봤고, 자연스레 소설쓰기를 좀 배운 느낌이에요. 마음 한편에 ‘나도 언젠가 소설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도 생기고요(웃음).
정유정 | 칼 세이건도 소설을 썼잖아요. 그의 작품을 읽었는데 매우 훌륭했어요.
최재천 | 가까이는 미국에 계신 제 지도교수님도 몇 년 전 ‘개미언덕’이라는 소설을 내셨어요. 서문에 “그동안 과학책을 여러 권 썼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소설로 한번 독자에게 감동을 줘봐야겠다. 예술이 가진 엄청난 힘이 있지 않나” 하는 포부를 밝히셨죠. 결국 큰 호응은 못 받으셨지만요(웃음). 작가님 글은 분명 과학적 내용을 다루는데도 술술 읽혀요. 판타지 장르 소설은 처음 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 첫 작품부터 멋지게 성공하셨네요.
정유정 | 판타지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게 쓰지는 않았어요. 지금까지처럼 철저히 취재에 바탕을 뒀죠. 예를 들어 소설 속 진이가 쓴 논문 주제 ‘침팬지가 사회적 털 고르기를 할 때 서로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실제로 김예나 박사님이 쓴 논문 주제잖아요. 김 박사님께 허락을 받고 그대로 갖다 썼어요. 진이가 침팬지를 대하는 모습, 그때 침팬지의 반응 등도 제가 현장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아요. 침팬지가 김 박사님을 보고 “와하하” 웃으니 김 박사님이 똑같이 마주 웃어주시더군요. 숨을 헐떡헐떡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눈을 맞춰주니 침팬지가 어찌나 좋아하던지, 서로 공감하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것도 꼭 소설에 넣어야지’ 생각했죠. 제 옆에 있을 때는 조심하셔야 해요. 이렇게 다 이야기로 만들거든요.
최재천 | 김예나 박사가 참 멋있죠. 류흥진 박사도 아주 탁월한 연구자고요. 류 박사는 보노보 노안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잖아요. 처음 그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을 때 제가 속으로 통탄했어요. ‘아, 나는 왜 저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요(웃음). 영장류가 서로 털 골라주는 모습을 보면, 나이가 들수록 점점 거리가 멀어져요. 사람이 노안이 왔을 때 책을 멀리 놓고 보는 것처럼요. 대다수 학자가 그걸 무심코 지나쳤는데, 류 박사는 날카롭게 포착해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냈죠. 류 박사 연구 결과가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세계 유수 언론에 많이 실렸어요.
제가 요즘 그런 생각을 해요. 류 박사가 본격적으로 보노보를 연구하기 전에는, 대한민국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보노보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나였다. 그 친구 때문에 순식간에 2인자가 됐는데, 이제는 정 작가님 때문에 그 자리마저 빼앗겼다. 그런 생각이요(웃음).
정유정 | 아이고, 설마요.
최재천 | 진짜예요. 이제는 정말 작가님이 저보다 훨씬 많이 아세요. 이번에 일본에 있는 ‘구마모토 보노보 보호구역’뿐 아니라 독일 베를린까지 가서 보노보를 관찰하고 오셨죠.
“알면 사랑한다”
정유정 | 네, 일본 과학자가 베를린에 꼭 가보라고 추천했어요. 구마모토에 있는 보노보는 실험실 생활에 익숙해져 살이 많이 찐 상태라고, 베를린에 가야 진짜 야생 모습에 가까운 보노보를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현지에 도착한 순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습이 확실히 달라요. 길쭉길쭉하고 얼굴이 맑고 털도 반질반질하고…. ‘아 이게 보노보의 진짜 모습이구나’ 싶었죠.최재천 | 작가님 책을 보면 동물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요.
정유정 | 어릴 때부터 동물과 더불어 살았어요. 어머니가 동물을 좋아하셔서 집 마당에 거위 오리 칠면조 같은 게 뛰어다녔거든요. 시골집은 마당이 넓잖아요. 거기 개 고양이도 다 풀어놓고 키웠어요. 누가 동물을 더럽거나 무섭다고 하면 제가 기분이 상했죠. 저는 뱀도 안 무서워해요. 소설 ‘28’을 지리산 한 암자에서 썼는데, 거기 뱀이 많았어요. 절에 뱀이 나타날 때마다 보살님이 저를 부르셨죠. 좀 멀리 쫓아달라고. 절에서는 뱀도 죽이면 안 되잖아요. 그 일을, 남자 고시생들 다 제쳐두고, 제가 했어요. 이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동물에 대해 거부감이 전혀 없기 때문일 거예요. 교수님은 언제부터 동물을 좋아하셨나요?
최재천 | 저는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에요. 학교를 서울서 다녔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방학은 늘 강릉에서 지냈죠. 하루 종일 동물과 뒹굴며 놀았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한 일이 소 묶어놓은 데 가서 똥을 뒤지는 거였어요. 소똥구리 한 마리를 집어 들고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놔주지를 않았죠. 그게 왜 그리 좋았는지 밤에 자기 전까지 온종일 붙들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해요. 몇 년 전 소똥구리한테 보내는 공개 사과문을 쓴 일도 있습니다. “미안했다. 그때는 네가 힘든 줄 정말 몰랐다” 그런 내용으로요. 그렇게 좋아하던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됐으니,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죠.
정유정 | 이 소설을 쓰려고 교수님을 처음 찾아뵀을 때 동물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보며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때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죠. “사람은 자신이 동물을 도와준다, 동물을 길들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동물이 사람을 선택한 걸 수도 있다. 동물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알고 있고, 또 우리 마음을 움직일 힘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 말씀이 마음에 깊이 남아 있었어요. ‘진이, 지니’를 쓰면서도 동물과 사람의 소통, 공감에 대해 많이 생각했죠.
온몸으로 공감하는 인간
[박해윤 기자]
정유정 | 사람들이 보노보 눈에 대해 잘 모르니, 사람 눈보다는 그쪽을 많이 설명하려 했던 것 같아요(웃음). 인간은 정말 온몸이 의사소통 도구죠. 소통 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존재고요. 그런데 현대인은 왜 이렇게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걸까. 왜 의도적으로 타인과 공감하지 않으려하는 듯 보일까. 요즘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교수님이 번역하신 프란스 드발 저서 ‘공감의 시대’에도 공감이 인간뿐 아니라 많은 동물의 보편적 속성이라는 내용이 있잖아요. 공감 능력이 고장 나면 우리는 사피엔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가 되고 말 거예요. 사회가 점점 날카로워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공감의 힘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최재천 | 네. 제가 ‘공감의 시대’ 번역자 서문에 이렇게 썼어요. “공감력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우리가 미물로 여기는 흰쥐마저 공감 능력을 갖고 있는 게 드러나요. 같은 우리에 있던 동료들이 밥을 굶는 상황이 오면, 자기한테는 먹이가 충분히 공급돼도 같이 굶는 걸 택하죠. 사람 안에는 그런 공감 능력이 다 담겨 있는데 자라는 과정에서 차별과 경쟁, 스트레스 등을 받으며 점점 무뎌져가요. 타인의 고통을 무심히 지나치게 되죠. ‘진이, 지니’에는 그렇게 무뎌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존재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 삶이 힘든 상황에 빠질지라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들이요.
정유정 | 네. 이 소설을 통해 바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우리 안에 있는 공감의 감수성이 무뎌지지 않도록 항상, 좀 스스로 불편해질지라도 지켜보고 돌아보자.
더불어 생명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모든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열심히 살자고 얘기해왔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치열하게 살고 사랑하자. 그게 운명이 우리에게 내리는 유일한 명령이다.’ 이게 제 소설의 공통된 메시지죠. ‘진이, 지니’도 마찬가지예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민주는 스스로 ‘삶이 시시해지는 병에 걸렸다’고 하죠. 하지만 지니를 만나며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돼요. 독자들도 이 책을 읽으며 ‘최선을 다한 삶과 타당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최재천 | 얼마 전 태국인 학생 한 명이 저를 찾아왔어요. 공부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며 “머지않아 한국에 다시 돌아와 사회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친구 얘기가 이래요. “내 고향 또래 친구들의 간절한 꿈은 죽기 전 한국에 한 번 와보는 거다. 여기서 2년이나 살았던 나를 다들 무척 부러워한다. 그런데 정작 한국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많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까. 그걸 막는 운동을 하고 싶다.” 진지하게 하는 얘기를 듣다가 혼자 울컥했어요. 황급히 눈물을 감췄죠. 우리 젊은이들이 ‘진이, 지니’를 통해 작가님이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하게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