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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역사기행

빛의 도시, 프랑스 파리

문화와 혁명이 공존하는 예술의 본고장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 chonmyongdo@naver.com

빛의 도시, 프랑스 파리

  • ●여전히 진행 중인 프랑스혁명
    ●역사와 운명을 함께한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인의 자존심, 베르사유 궁전
    ●나폴레옹이 혁명가인 이유
[GettyImage]

[GettyImage]

빛의 도시, 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프랑스 파리를 ‘예술의 도시’라고 부른다. 패션의 도시, 요리의 도시, 와인의 도시…. 상황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러한 호칭 중에서 파리의 가치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는 바로 ‘시민의 도시’가 아닐까 싶다. 

파리는 예부터 일부 귀족이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골목길 어디에서든 시민 누구나 주인 행세를 하며 정답게 대화를 나눈다. 아름다운 뤽상부르 공원에서는 우아하게 피크닉을 즐기며 자유롭게 이 도시를 향유한다. 

또한 파리는 혁명의 도시다. 예술 분야에서도 많은 혁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몽마르트르에서 예술혼을 불살랐던 이들의 이름을 떠올려보자.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반 고흐를 들 수 있다. 1886년 파리로 온 그는 1년 남짓 이곳에 머물며 새로운 화풍의 세례를 받고, 후기 인상파의 거장으로 거듭났다. 

화가뿐만 아니라 시인, 작가, 음악가 등 수많은 예술가가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파리의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에 고이 잠든 이들도 있다. 안개가 자욱한 12월 어느 날 나는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에 한 송이 붉은 장미를 바쳤다. 

정치적 혁명은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혁명의 시발점으로 시민군이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킨 사건을 기념해 해마다 7월 14일이 되면 축제가 열린다. 도심을 환히 밝히는 그날의 불꽃놀이를 본 사람이라면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이곳 시민들에게 프랑스혁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란 것을 말이다. 파리 시민들은 툭하면 파업을 열고 시위도 자주 한다. 올해는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노랑조끼’ 물결이 크게 일렁였다.




성모마리아에게 봉헌된 노트르담 대성당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내 발길은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했다. 2017년 한 해 12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했단다. 그다음으로 방문객 수가 많은 명소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우뚝 솟은 사크레쾨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퐁피두센터, 오르세 미술관 순이다.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이 있는 생트 샤펠, 판테온, 튈르리 공원, 콩코르드 광장, 개선문 등도 인기다. 

많고 많은 명소 중에 왜 관광객들은 유독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고 싶어 할까. 이유는 바로 이곳이 프랑스인들에게 특별한 역사적 경험을 안겨준 곳이라는 데 있다. 파리에서 만난 친구 알랭은 노트르담의 역사적 의미를 오랜 시간에 걸쳐 설명해줬다. 우리는 성당의 첨탑이 보이는 센 강가의 어느 주점에서 보르도 지방, 정확히는 메독에서 생산된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주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성모마리아에게 봉헌된 것으로 알려진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딕 건축의 묘미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걸작이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와 19세기의 예술품도 한데 모여 있다. 예수가 쓴 가시관, 그를 십자가에 박을 때 사용한 못도 보관돼 있다. 13세기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왕은 빚 수렁에 빠진 라틴왕조의 보두앵 2세에게 거금을 주고 이 성물들을 가져왔다. 이외에도 노트르담 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오르간, 웅장한 교회 종소리 등으로 유명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0년 공사를 시작해 1260년경 한 차례 완성됐다. 프랑스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목성을 모신 신전이었는데, 기독교 수용 후 처음에는 성 스테판 교회였다가 네 번 개축 후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그것을 다시 고딕 양식으로 고쳐 지은 것이 현재의 대성당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역사의 산실이다. 1431년 헨리 6세는 백년전쟁 때 이곳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당시 그는 10살밖에 안 된 ‘소년 왕’이었다. 1548년에는 프랑스의 신교도, 즉 위그노와 종교전쟁을 벌였는데, 성당의 석상들을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를 훼손했다. 이후 루이 14세는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그는 1699년 부왕 루이 13세의 유지를 계승해 노트르담을 더욱 화려하게 단장했다. 루이 13세와 14세가 피에타상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을 아로새긴 제단도 만들었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로 명성 되찾아

하지만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성당은 수난을 당했다. 혁명의 열기 속에서 많은 예술품이 파괴됐다. 교회의 재산도 몰수돼 공공재산이 됐다. 결국 성당 내 종교 활동까지 금지되면서 이곳은 한낱 창고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다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1801년 7월 16일,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와 조약을 맺어 가톨릭교회가 시민 대다수의 종교임을 인정했다. 이로써 노트르담은 본래의 위상을 회복했다. 

나폴레옹은 건물을 보수해 자신의 황제 대관식도 이곳에서 거행했다.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황제의 관을 들어 올려 자신의 머리에 얹었다. 이 장면은 한 편의 그림으로 기록돼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나폴레옹이 쓰러지자 노트르담은 또 황폐해졌다. 하지만 1831년 빅토르 위고가 쓴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 덕분에 다시금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기 시작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민심이 바뀌자 국왕 루이 필립은 성당을 새롭게 수리할 것을 명령했다. 1844~1864년에 성당재건사업이 추진됐다.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의 주인공은 종지기 꼽추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다. 15세기 후반을 무대로 한 작품으로 두 명의 주인공말고도 주임 신부 프롤로와 근위대장 페뷔스가 등장한다. 작가는 에스메랄다를 둘러싸고 세 명의 남성이 겪은 갈등을 다각도로 묘사했다. 이 소설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으며 훗날 뮤지컬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각색됐다. 앤서니 퀸이 콰지모도를 연기한 영화(1957)는 몇몇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현대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1944년 8월 26일, 파리가 나치 정권으로부터 해방되자 이곳에서 특별 미사가 집전된 바 있다. 프랑스의 영웅 드골 장군도 참석했다. 훗날 드골의 장례미사도 이곳에서 열렸다(1970). 1996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미사 역시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됐다. 

프랑스인의 눈으로 보면 노트르담 대성당은 특정한 종교기관이 아니다. 지난 1000년간 프랑스가 겪은 역사적 경험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뜻밖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19년 4월 15일 대형 화재가 난 것이다. 보수공사 중이던 성당은 15시간이나 불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당의 주요 유물은 무사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불타버린 노트르담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현대사 주요 무대로 사용된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궁전. [GettyImage]

베르사유 궁전. [GettyImage]

‘태양왕’ 루이 14세를 빼놓고 파리를 논할 수 없다. 그가 지은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상징하기도 한다. 호사스럽기 그지없는데, 특히 거울의 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설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부왕 루이 13세 때만 해도 사냥터에 있는 자그만 오두막에 불과했다. 루이 14세는 이 볼품없던 공간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궁전으로 바꿔놓았다. 

베르사유 궁전 앞에 선 각국의 사절단들은 찬탄을 마지않았다. 18세기 이후 유럽 각국은 이 궁전을 모방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당시 유럽 내에서 프랑스의 위상은 대단했다. 유럽 모든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게 유행이었다. 변방인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19세기까지 러시아 귀족들은 외국인 가정교사를 초빙해 프랑스어를 비롯해 영어, 독일어, 라틴어 등을 배웠다. 덕분에 수백 년 동안 프랑스의 가난한 귀족과 교양 계층은 각국으로 진출해 가정교사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다시 루이 14세 때로 돌아오면, 당시 부르봉 왕가는 전쟁과 사치를 일삼았다. 결국 재정은 바닥났고 분노에 휩싸인 프랑스인들은 18세기가 끝나갈 무렵 사상 초유의 시민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왕정이 무너진 뒤에도 베르사유 궁전은 역사의 주요 무대로 활용됐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승전국과 패전국은 베르사유 궁전에 모여 전후 처리를 논의하는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당시 승전국 중 하나였던 중국은 일본의 외교 공세를 막지 못하고 모욕과 좌절에 빠졌다. 일본은 이른바 21개 조항을 들고 나와 열강의 동의를 얻었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다. 그보다 두 달 앞서 한반도에서 점화된 3·1운동의 열기도 베르사유와 관련이 깊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3·1 운동의 기폭제가 됐으니 말이다.
 
베르사유의 한 식당에서 알랭과 나는 치즈플레이트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치즈의 나라답게 프랑스에는 300개가 넘는 다양한 종류의 치즈가 있다. 이들의 치즈 사랑은 무척이나 유별나 “치즈로 위장을 열고 치즈로 위장을 닫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프랑스인이라면 식사의 시작도 마무리도 치즈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날 우리가 주문한 치즈는 카망베르, 콩테, 미몰레트, 블루 도베르뉴 그리고 에푸아스 등이었다. 치즈라면 다 좋아하는 나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푸른곰팡이가 혀를 유혹하는 블루 도르베뉴가 가장 맛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양면성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개선문. [GettyImage]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개선문. [GettyImage]

이날 우리는 루이 14세에 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왕은 무려 72년하고도 110일 동안 왕좌를 차지했다. 절대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최장기 통치자였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 남아 있던 봉건주의의 잔재를 깨끗이 쓸어낸 뒤 호화찬란한 베르사유 궁전으로 귀족들을 불러 모았다. 귀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의 거처를 제공하기 위해 별도의 주거시설도 마련했다. 베르사유로 생활 터전을 옮긴 귀족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어울리는 넉넉한 생활을 위해 더 많은 연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왕에게 더욱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4세는 궁정의식을 장엄하고 정교하게 다듬어 왕의 권위를 높였다. 그는 기억력도 비상해, 언제 어느 귀족이 궁정 모임에 출석했는지 다 꿰고 있었다. 귀족들은 왕의 눈도장을 찍고자 열심히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무서운 왕이었다. 자신의 말이 곧 법이라고 선포한 루이 14세는 전쟁광에 가까웠다. 네덜란드, 스페인, 아우크스부르크 동맹(프랑스가 라인강 동쪽으로 뻗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결성된 동맹)과도 혈투를 벌였다. 

하나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올 때도 그는 다음에 일으킬 전쟁을 구상했다. 루이 14세에게 외교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그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교회에 대한 억압으로도 나타났는데, 고위 성직자인 주교들도 왕의 허가가 있어야만 국외로 나갈 수 있었다. 왕이 동의하지 않는 한, 교황이 선포한 모든 규정은 그 어떤 효력도 갖지 못했다. 루이 14세는 책 발간은 물론이고 개인의 편지도 검열 대상에 올렸다. 

대신 그는 화려한 대중 행사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속셈이었다. 또 유능한 평민을 고관으로 발탁했으며, 총애를 얻어 벼락출세한 신흥 귀족을 후원했다. 그들은 당연히 왕당파가 돼 절대왕권에 복종했다. 

루이 14세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후원도 남달랐다. 아카데미프랑세즈(한림원)를 지원했고, 몰리에르와 장 드 라퐁텐 같은 작가를 통해 문학과 연극을 후원했다. 음악과 미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1661년 파리에는 발레학교가 설립됐고, 얼마 뒤에는 오페라학교도 문을 열었다. 게다가 그는 루브르 궁전의 일부를 박물관으로 전용했다. 이것이 후일 세계 굴지의 박물관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루브르 박물관이다. 

문화를 육성했다는 점에서 루이 14세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비슷하다. 물론 세종은 철저히 백성 중심이었던 반면 루이 14세는 오직 왕권 강화에 열정을 쏟았다.


나폴레옹의 등장

파리는 ‘음식의 도시’이기도 하다. 개선문 근처에서 나는 알랭과 함께 뵈프 부르기뇽을 즐겼다. 쇠고기에 양파와 버섯을 얹은 것인데 소스에는 붉은 포도주가 사용된다. 프랑스의 대표 요리 중 하나로 맛이 우리나라 소갈비와 비슷하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개선문을 바라보며 프랑스혁명의 의미를 따져보았다. 그것이 어찌 프랑스만의 것이겠는가. 인류 모두가 그 혜택을 입었으니 말이다. 프랑스혁명이 있었기에 후세는 공화국의 가치를 알았고 자유와 평등이란 지표도 세울 수 있었다. 혁명 당시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설은 많은 이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 당시 시민들이 루소의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었다. 혁명의 열기를 부채질한 책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포르노그래피’다. 국왕 내외를 비롯해 고위 성직자 및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음란을 고발한 문학작품이 선동의 요소로 활용된 것이다. 

혁명 과정은 매우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했다. 1799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에야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은 독재자였다. 하지만 그의 집권을 통해 학교제도가 근대화됐고, 재정도 근대적으로 바뀌었다. 혁명 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민법전이 편찬된 것도 그때다. 

엄밀히 말해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람도 아니다. 그는 코르시카섬의 하급 귀족으로 모국의 독립을 꿈꾸던 젊은이였다. 그랬던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마침내 주민 투표를 거쳐 황제까지 됐다. 극적인 변화요, 아이러니한 일이다. 스스로 황제가 됐다는 점에서 그 스스로 혁명의 본질을 부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개혁을 통해 혁명정신을 철저히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는 혁명가로 평가받을 만하다.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이 짓기 시작했다. 조국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오스트리아 땅 아우스터리츠에서 대승을 거두자, 그는 그때까지 거둔 일련의 승리를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 했다. 결국 로마의 개선문을 모방해 짓기 시작했는데 나폴레옹이 이미 실각하고 난 뒤인 1836년이 돼서야 완성됐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는 또 앞다퉈 개선문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혁명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 결과가 축적돼 있다. 20세기만 해도 이 혁명을 계급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역할이 강조됐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연구 경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아직 새로운 관점이 정확히 세워진 건 아니지만, 기존의 패러다임이 설득력을 잃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마지막으로 파리의 또 다른 별명은 ‘빛의 도시’다. 이 별명 역시 루이 14세 때 붙여졌다. 왕은 파리의 범죄를 줄이고자 한밤중에도 거리를 환히 밝혔다. 그런데 18세기에 접어들면서 파리는 계몽사상의 중심지가 됐고 그때부터 ‘빛’은 중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파리를 빛의 도시라 부르는 건 다소 어패가 있다. 현재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국가 채무도 심각하다. 세상의 빛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의 씨앗은 있다고 본다. 프랑스 파리만큼 이슬람문화권과의 소통에 힘쓰는 도시가 없다. 또 기후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앞으로 파리 공항을 이륙하는 모든 비행기에는 환경세가 부가될 예정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파리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신동아 2020년 1월호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 chonmyongd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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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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