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북한은 스탈린의 주도와 후원 아래 건국된 국가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 ⑥·끝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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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1-01-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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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분단 75년… 왜, 어떤 과정을 거쳐 분단됐나

    • 소련은 38도선 이북을 사실상 ‘직접’ 통치했다

    • 대중조작(大衆操作) 기술에 능통했던 김일성

    • 분단인가, 분열인가, 분할인가

    • 한반도 분단은 내쟁형과 국제형의 복합형

    스탈린 동상. [GettyImage]

    스탈린 동상. [GettyImage]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됐다. 그러면 이 정부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첫째, 이 정부는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집권자들과 그들을 대변하는 북한의 공식 간행물들이 자랑하듯 전(全)조선을 대표하는 통일정부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이미 앞선 연재에서 살펴보았듯, 이 정부를 탄생시킨 조선최고인민회의는 전 조선적 입법기관이 아니라 북조선의 단독 입법기관이었고, 따라서 이 정부 역시 북조선의 단독정부였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한 박명림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 역시 의심의 여지없이 단독정부였다. 그리고 그 길을 남한보다 훨씬 앞서서 나아갔다. 북한은 남북 지역 전체에 걸친 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했다는 점 때문에 오랫동안 통일정부라고 주장해 왔으나 그것은 선전적 의미에 제한될 뿐 북한 역시 분단국가였던 것이다”라고 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격

    둘째, 이 정부는 소련에 의해 북한에 이식된 정부인가? 아니면 내생적인 정부인가? 우선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이 정권은 소련에 의한 북한에 이식된 외생적 정권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소련의 권력을 통해 하나의 공산정권이 아시아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회들 가운데 하나인 ‘북한’에 이식됐다. 북한은 토착적인 혁명을 통해서도 아니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와의 단합을 통해서도 아니라, 소련군대의 등에 업혀 공산주의국가가 됐다”고 썼다. 

    서대숙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소련점령당국은, 그들의 계획에 대한 저항의 결핍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짧은 기간에 소비에트화를 성취했다. 그들은 대중정당의 조직화, 공산주의적 개혁들의 제도화, 그리고 그들이 제도화한 체제를 유지시켜 줄 군부대의 창설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들을 성취함에 있어서 김일성을 이용했다”고 썼다. 그는 이어 “소련점령당국에 의한 모든 행정적 지시와 결정들은 김일성을 통해 집행됐는데, 이것은 그를 조선인민과 점령군 사이의 중추적 고리로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소련은 조선에 공산주의체제를 이식하는 데 성공하면서도, 군사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직접적 조치를 자신이 내린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소련의 “위성국”이라고 보았으며 김일성을 “이 위성국을 운영할 소련의 선택된 대리인(the Soviet Union’s chosen agent to run the satelite)”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류길재 교수는 의의를 제기했다. 그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과정을 주로 인민위원회의 발생과 성장에 초점을 맞춰 분석한 뒤, “북한의 국가 건설 과정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 대체로 소련의 개입에 의한 ‘소비에트화’ 또는 외삽국가(外揷國家)의 수립과정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일정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란코프 교수는 재반론을 제시했다. 그는 “(북조선 정권이) 자신의 소비에트 창조자들에 대해 초기에 보여준 종속(dependency)을 저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 실제에 있어서 소비에트의 존재는, 참말로 편재(遍在·omnipresence)는, 1940년대 말의 북조선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북조선 역사의 첫 몇 해 동안, 김일성과 그의 정부는 소비에트의 괴뢰 주인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괴뢰 이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썼다. 



    반면에 암스트롱 교수는 스칼라피노-이정식 교수의 견해와 서대숙 교수의 견해 및 란코프 교수의 견해에 대조되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우선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치 그 시기에 중국과 베트남에서 그러했듯, 북한에서도 또는 코리아 전체에서도 “공산주의운동은 권력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가설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면서, “북한판 공산주의에 내재한 민족주의와 대중주의의 강력한 핵심”이 북한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북한에서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충실한 복사(a faithful copy of the Soviet Union)”가 아니라고 보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크게 보아 형태에 있어서는 스탈리니스트였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내용에 있어서는 명백히 민족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과정에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직접 개입한 폭은 참으로 넓으면서도 컸다. 갖가지 발표문과 법안들에도, 김일성의 연설문들에도, 북조선노동당의 창당에도, 헌법의 제정에도, 그리고 정부 구성원의 인선에도, 사실상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깊이 개입했다. 이렇게 볼 때, 건국 과정에서 소련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그 국가의 최고권력자도 소련에 의해 선택되고 후원됐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가 이미 자세히 살폈듯, 김일성은 스탈린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일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적절히 이용했다는 사실도 공평하게 지적돼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우선, 서대숙 교수가 지적했듯, “옛 공산주의자들의 패배(the defeat of the old Communists)”를 자신의 자산으로 활용했다. 김일성보다 투쟁 경력이 많으며 조선에 널리 알려진 박헌영을 비롯한 “옛 공산주의자들”이 소련군이 주둔한 평양으로 와서 소련군에 협력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서울에서 미군을 상대로 협력을 제의하거나 또는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에 만들어놓은 공간을 김일성이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스탈린의 비호 아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내각 청사 앞에서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주요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를 대표하는 당 중앙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허가이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김일성 내각 수상, 레베데프 소련군 민정사령관,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소련 민정부의 이그나치예프 대좌, 김책 부수상 겸 산업상. 뒷줄 오른쪽부터 주녕하 교통상, 박일우 내무상, 최창익 재정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직후 내각 청사 앞에서 소련군 민정사령부의 주요 간부와 북조선노동당의 주요 계파를 대표하는 당 중앙위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허가이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김일성 내각 수상, 레베데프 소련군 민정사령관,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소련 민정부의 이그나치예프 대좌, 김책 부수상 겸 산업상. 뒷줄 오른쪽부터 주녕하 교통상, 박일우 내무상, 최창익 재정상. [미디어한국학 제공]

    서대숙 교수는 이어 “김일성은 (…) 소련군정의 결정을 아주 충실하게 집행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맡은 일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를 따르는 빨치산의 수는 적고 무명에 가까웠던 반면, 국내에 꽤 알려진 공산주의자들은 수적으로도 월등했다. 북한에 마침내 정부가 수립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공포됐을 때 김일성이 당당히 나라를 다스리게 된 것은 소련군의 도움도 있었지만 스스로 주어진 조건을 잘 이용해 그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성취한 데도 있다. 이런 점에서 김일성은 유능한 정치지도자라고 하겠다”고 썼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김일성의 정치기술과 관련해, 중요하게 기억돼야 할 사실들이 있다. 첫째, 김일성은 입북 당시부터 무력장악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력이라고는 소련주둔군만이 존재하던 북한에, 소련주둔군의 설계에 맞춰, 자신과 빨치산투쟁을 함께 한 동지들과 부하들로 하여금 북조선 자체의 군사조직과 경찰조직을 단계적으로 만들어나가게 했다. 그 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시점에서 그들이 군경조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일성을 전적으로 뒷받침했던 것이다. 10년 넘게 빨치산투쟁에 전념했던 그는 무력만이 권력 장악과 권력 유지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신념을 내면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군사국가로 만들어나가고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군사력과 전쟁을 중심으로 파악하게 된다. 

    둘째, 김일성은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궁극적 목표와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감추고 자신이 직면한 단계에서 수용될 수 있는 목표와 지향점만을 발표했다. 쉽게 말해,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철저히 감추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처럼 연설했다. 이러한 위장은 김일성과 그가 이끄는 정권이 공산주의를 실시하려고 한다는 북조선 주민들의 의심을 희석시켰으며, 자연히 그의 대중적 지지 기반 확장을 도왔을 것이다. 

    셋째, 김일성은 대중조작(大衆操作) 기술에 능통했다. 그는 만주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에도 곳곳에서 연극대회를 열어 군중을 자신의 조직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그는 소련군의 북한점령기에도 악대 동원, 풍물놀이패 동원, 연극대회 및 시 낭독 등의 문화예술적 활동을 통해 군중을 집결시키고 군중의 의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미군의 남한점령기에, 남한의 지도자들이 그러한 대중 동원 기술을 발휘한 예는 드물다. 

    종합적으로 말해, 서대숙 교수가 지적했듯, “김일성은 성공적 혁명가의 자질 중 몇몇을 갖고 있었다(Kim did have some the attributes successful revolutionary).” 같은 맥락에서, 이정식 교수는 “자신의 동료들을 제거하는 그의 마키아벨리적 방법들(his thoroughly Machiavellian methods of removing his colleagues)”을 상기시키면서 “우리는 (김일성) 그 사람 자체의 능력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one must not underrate the capabilities of the man himself”라고 평가했다.


    일제의 패망에 한(조선)인 독립운동이 미친 영향

    첫째,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 및 사회주의운동이 일제의 패망 및 한민족의 해방에 미친 공헌에 대한 논쟁이다. 어떤 항일독립운동가들과 어떤 학자들은 전자가 후자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북한 정권의 공식적 해석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후자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어떤 다른 학자들은 연합국의 승전이 후자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한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은 참으로 끈질겼으며 후대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 무명과 유명의 한인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험난한 조건 아래서 가시발길을 걷는 가운데 투쟁을 계속했으며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이 애국자들의 투쟁은 일제에 일정하게 타격을 주었으며 연합국들이 코리아의 독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독립을 약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연합국의 승전이었다. 바로 이 사실로 말미암아, 일제 패망 이후의 코리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고 통제되며 미국과 소련 사이에 격화된 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돼 결국 대립하는 두 국가의 성립을 보게 된다. 

    일제의 패망을, 한민족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으로 그리고 하나의 정치통일체(政治統一體)의 복국(復國)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합국들은 우선 한민족을 “잠정적으로 나누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서 “나눈다”라는 말의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영어권 학자들은 그것을 동사 divide와 partition, 그리고 명사 division과 partition으로 표현했으며, 독일어권 학자들은 trennung 또는 teilung 등의 명사로 표현했다. 일본의 학자들은 한자로 分斷(분단)·分離(분리)·分裂(분열)·分割(분할) 등으로 표현했으며 영어로는 division·disjunction·dismemberment·par -tition·secession 등으로 표현했다. 한민족 스스로는 때때로 분할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으나 대체로 분단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그래서 분단국이라는 표현을 써왔다. 다만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임현진 박사는 분단국가라는 용어 대신에 “결손국가(缺損國家·a broken nation state)”라는 독창적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남북한은 분단국가라기보다 두 개의 국민을 가진 결손국가다” 

    코리아를 비롯해 독일과 중국 및 베트남 등 분단국들의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국제적 관심이 높아진 때는 대체로 분단의 원인으로 간주된 국제 냉전이 완화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전반 사이였다. 이 시점에 국제사회는 분단국들의 유엔(UN) 동시가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경우는 1971년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축출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 가입하며, 독일의 경우는 1973년 동독과 서독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베트남의 경우 1975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써 “해방” 또는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를 비롯한 미국 대학교수 12명이 1967년부터 코리아를 비롯해 독일·중국·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몽골·아일랜드·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르완다·부룬디·팔레스타인 등 “나누어진 국가”들을 비교하는 연구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를 1974년 출판했다. 그들은 그 나라들을 “divided nation”과 “partitoned country”로 분류했다. 

    전자는 대체로 “인종적 또는 민족적 동질성(ethic homogeneity)”을 가졌으며 성공적인 정치통일체로서의 공통적 전통과 경험을 가진 나라로서 외부적 압력이나 영향에 의해 인위적으로 나누어진 경우이다. 코리아 · 독일 · 중국 · 베트남 · 몽골 등이 여기에 속한다. 

    후자는 하나의 정치단위 안에 거주하는 “이질성(herogeneity)”을 지닌 그룹들 사이에서 인종적 · 민족적 · 언어적 · 종교적 갈등 가운데 어느 하나의 갈등으로 또는 그 이상의 갈등들로 말미암아, 바꿔 말해, 내부적 원인들로 말미암아, 나누어진 경우다. 남아시아대륙을 차지하고 제국을 형성했다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뒤 독립을 얻은 인도가 종교 갈등으로 말미암아 인도와 파키스탄 및 스리랑카로 나뉜 사례, 파키스탄이 지역 갈등으로 말미암아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나뉜 사례, 그리고 아일랜드가 종교 갈등으로 에이레(Eire)―오늘날 아일랜드공화국으로 불리고 있다―와 북아일랜드로 나뉜 사례 등이 여기에 속한다. 아일랜드는 영국 본토(Great Britain)와 함께 통합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 “divided nation”과 “partitioned country”를 한국(조선)어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이영일 전 국회의원은 국토통일원―오늘날의 통일부―에서 고위직을 맡았던 때 전자를 “분단국”으로, 후자를 “분열국”으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고심(苦心) 끝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역어들 사이의 차이는 물론 원어들 사이의 차이도 국제정치학 전공 전문가들에게도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일본 학자들의 사례를 보기로 한다. 국제정치학자인 다나카 나오키치(田中直吉) 교수는 분단국이라는 용어 대신 분열국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는 하나의 민족이 분할되고 그 각기(各己)가 상이한 사회체제를 가진 국가를 형성해 스스로 자신만이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호칭하는 상태의 국가가 분열국이라고 정의하면서 남·북조선이 거기에 속한다고 보았다. 

    다나카 교수의 뒤를 이어 고다니 쓰루지(小谷鶴次) 교수가 분단국에 대한 정의를 시도했다. 국제법학자인 그는 분열국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분단 (division) · 분할(dismemberment)·분리(secession 또는 disjunction)라는 용어를 함께 썼다. 풀어 말해, 그는 분단국가(divided states)란 한 국가 안에서 분할 또는 분리 등이 발생함으로써 두 개의 정부(governments)가 서로 갈등(conflict)을 계속하고 있는 상태의 국가라고 정의하고 그러한 상태의 국가를 분열국이라고 명명한 뒤 여기에 독일·중국·조선·베트남을 포함했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이미 나타났듯, 그는 분단국은 분열국이라고 말함으로써 두 용어가 사실상 구별이 불가능한 같은 것임을 시사했다. 

    국제정치학자인 가미야 후지(神谷不二) 교수는 분단국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그것을 우선 “국제형 분단”과 “내쟁형 분단”으로 분류했다. 전자는 독일과 코리아처럼 강대국들이 인위적으로 나눈 경우에 해당되며, 후자는 중국과 베트남처럼 내부적 상쟁으로 말미암아 나뉜 경우에 해당된다. 그는 이어 “안정형 분단”과 “불안정형 분단”으로 분류했다. 독일처럼 분단된 쌍방이 각각 상대방을 무력이나 폭력으로 전복할 의도를 포기한 채 교류와 협력을 발전시키는 경우 그 분단은 “안정”을 유지하지만, 코리아와 중국 및 베트남처럼 분단된 쌍방이 각각 상대방을 무력이나 폭력으로 전복할 의도를 가진 채 대결을 계속하는 경우 “불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독일 학자들의 사례를 보면, 그들은 분단으로 번역되는 trennen이라는 동사와 trennung이라는 명사보다 분할로 번역되는 teilen이라는 동사와 teilung이라는 명사를 선호했다. 분단은 “분리되어 단절됨”의 뜻이 강한 반면, 분할은 “전체의 일부”라는 뜻을 함축함으로써 언젠가 “전체로서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독일 학자들의 이론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자세히 살피기로 하겠다. 

    중국의 경우를 살피기로 한다. 서방 학자들은 중국을 분단국으로 간주했다. 중국이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섬의 중화민국으로 분단됐다는 것이었다. 비록 한쪽은 너무 크고 다른 쪽은 거기에 비해 너무 작아 그 분단은 “불균형 분단”이지만, 분단은 현실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분단은, 앞에서 검토한 여러 학자가 이미 지적했듯, 기본적으로 내쟁의 결과였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오랫동안 전개된 내전의 산물이었다. 물론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그리고 미국의 중국국민당 지원과 소련의 중국공산당 지원이, 국공내전에 개입됐다. 그러나 독일의 국제정치학자 에리히 베데(Erich Weede) 교수가 지적했듯, 중국의 경우에는 독일이나 코리아의 경우에 비해 외세의 영향이 덜 강했다. 

    중국 분단의 이러한 내쟁적·내전적 성격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의 중국 통일정책에 반영됐다. 양자는 모두 중국이 “분단”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신들을 “분단국”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덧붙일 것은 그들은 다른 “분단국가”들에 대해서도 “분단국가”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용어 대신에 “분열국가”라는 용어를 쓴다. 예컨대, 한(조선)반도에 대해 두 개의 “분열국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양자는 모두 중국은 하나이며 자신만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이고 타방은 하나의 지역(地域) 또는 지구(地區)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논리에서 섬의 중화민국 정부는 대륙으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으며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섬을 해방하겠다고 공언했다. 

    변화는 양자 모두에서 일어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80년대 이후 중국이 하나의 국가이나 현실적으로 두 개의 체제를 갖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일개국가 양개체제(-個國家 兩個體制―약칭 일국양제(―國兩制―)” 공식에 따른 화평통일(和平統一)을 지향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중화민국 학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분단국이라는 용어보다 다체제국가(multi-system n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의했다. 타이베이(臺北·대북)에 위치한 국립교통대학 정치학 교수 웨이융(魏鏞) 박사가 이 개념을 개발한 대표적 사례다. 그에 따르면, 다체제국가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체제가 공존하는 상태의 국가다. 

    2000년 5월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취임한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의 독립을 부르짖으면서 중화민국은 별개의 독립된 주권국가라고 칭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타이완의 독립은 중국의 “분열”을 가져온다고 반발하면서 2005년 3월 반국가분열법(反國家分裂法)을 제정했다. 


    한반도의 분단 및 분단 고정화에서 관련 국가들의 역할 및 책임

    둘째, 이러한 여러 정의(定義)를 염두에 두면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책임론을 분석하기로 한다. 쉽게 말해, “누가 한반도 분단에 대해 책임이 있는가?”의 물음을 둘러싼 논쟁이다. 이 논쟁과 관련해, 저자는 한반도의 분단을 두 단계로 나누고자 한다. 

    (1)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동시에 성립된 분단이다. 이것은 분단이라기보다 분할이었다.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분할선으로 북위 38도선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잠정적 조치”라는 명분으로 취해진 이 분할은, 논란의 여지없이, 분할에 합의한 연합국들, 곧 미국 · 소련 · 영국 · 중화민국에 책임이 있으며 한민족에는 책임이 없다. 이른바 외인론(外因論) 대 내인론(內因論)의 양분론적 틀로써 접근한다면, 그때의 분할은 외인에 의한 분할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그때의 분할은 강대국들이 또는 전승국들이 어떤 특정한 국가나 지역을 나눠 점령하기 위해 선을 설정함으로써 빚어진 경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점에서의 한반도 분할은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분할 점령 및 오스트리아에 대한 연합국의 분할점령과 범주를 같이한다. 다만 오스트리아의 경우, 수도 빈(Wien)에 오스트리아 사람들에 의한 중앙정부 수립이 허용됐음에 비해, 코리아와 독일의 경우 거기에 상응한 중앙정부 수립이 허용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자신의 중앙정부를 갖고 있었기에 그것에 기초해 1955년 5월 15일 연합국과 조약을 맺고 분할 점령을 종료시키면서 주권을 회복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오스트리아인들은 오스트리아가 분단국가였다는 외부 사람들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 연합국들 가운데 어느 나라에 일차적 책임이 있는가. 그것은 논란의 여지없이 미국에 있다. 분할점령을 발의해 나머지 연합국들에 통고한 나라는 미국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 나라, 곧 소련과 영국 및 중화민국은 미국의 통고를 받고 동의했으므로 부차적 책임이 있다. 그 세 나라 가운데 소련은 영국과 중화민국보다 책임의 몫이 크다. 소련은 일본에 대해 개전하면서 곧바로 만주를 공격함과 아울러 한반도의 동북부에 진공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서둘러 제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우리는 한반도 분단의 뿌리를 아무리 늦게 잡는다고 해도 1943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때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과 소련 사이의 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에 일본을 상대로 참전해 줄 것을 거듭 요청했고 소련은 거기에 응하면서 자신의 작전 지역에 한반도의 “북변항구들”을 포함해 줄 것을 요청해 미국의 암묵적 동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암묵적 동의는 1944년 10월 다시 확인됐다. 

    이상에서 살폈듯, 한반도 분단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미국은 원천적 책임을 일본에 돌린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했을 때, 일본과 일본의 식민지들은 미국이 승전하는 경우 미국이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는 논리다.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일본이야말로 한반도 분단의 근원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일본은 실현 가능성이 낮은 “화평공작”에 매달려 항복의 기회를 여러 차례 늦춰 소련에 일본을 상대로 개전하는 기회를 주고 한반도의 동북지역에 진공하는 기회를 열어놓음으로써 종국적으로 한반도를 분할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우리는 한반도 분단의 원인(遠因)으로 일본과 소련 사이의 대결을 지적하게 된다. 넓게는 동복아시아에 대한 패권이나 영향력을 둘러싼, 그리고 좁게는 한반도에 대한 패권이나 영향력을 둘러싼, 일본과 소련 사이의 각축이 결과적으로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한반도 북부로의 진군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소련에 대한 미국의 경계적 조치로 이어지면서 끝내 한반도 분할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논점이 있다. 소련이 한반도의 북반부로 진공하던 상황에서 미국이 그것을 방치했더라면 한반도 전체는 소련의 군사적 점령통치 아래 놓였을 것이며 따라서 미국의 한반도 분할은 소련의 한반도 전역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예방했다는 차악(次惡)의 선택이었다는 논점이다. 

    그런데 한반도 분단의 원천적 책임을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에서 찾게 된다면,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를 따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일제의 침략 때문이었나? 거기에 조선의 책임은 없는가? 만일 조선에도 책임이 있다면 한반도 분단의 한 원인(遠因)에 조선 조정의 무능과 조선이라는 국가의 취약성이 개재돼 있다고 할 것이고, 이 점을 강조한다면 내인론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앞쪽에 전남 고흥에서 당선된 오석주(吳錫柱) 제헌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 앞쪽에 전남 고흥에서 당선된 오석주(吳錫柱) 제헌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됨으로써 연합국들의 “잠정적 조치”로 시작된 한반도의 분할은 분단으로 고정화됐고 공식화됐다. 이 과정에서 분단의 책임을 구명하는 일은 앞의 경우처럼 간단하지 않다. 거기에는 국제적 요인에 내쟁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개입됐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국제관계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격화된 냉전에 한반도에서 좌익과 우익 사이에 또는 남과 북 사이에 첨예화된 내쟁이 겹쳐진 결과로 두 개의 대립적 국가가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단계에서의 분단은 국제적 요소가 우세하나 내쟁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개입된 “내쟁형과 국제형의 복합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은 민족 내부의 상쟁이 분단으로 이어진 중국의 분단 및 베트남의 분단과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는다. 중국의 분단과 베트남의 분단 역시 “내쟁형과 국제형의 복합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분단과 베트남의 분단은 내쟁적 요소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나 국제적 요소는 부분적으로 개입됐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경우와 차이점을 보인다. 

    앞에서 살폈듯, 한반도의 분단에는 분명히 내쟁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일차적 책임은 미소냉전을 뼈대로 하는 국제냉전에 있다. 미소냉전은 한반도 안에서의 민족내부적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한반도에 단일의 통일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사실상 막았다. 

    다섯째, “소련은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또는 정치적 아심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어떤 학자들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소련은 만주의 일본군을 궤멸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곧 일본군의 퇴로를 끊으려는 목적에서, 한반도의 “북변항구들”을 장악하기 위해 한반도의 동북부에 진공했을 뿐이며 북한을 점령한 초기에 신중함을 보인 사실이 그 점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소련은 이처럼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과 구체적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도, 미국과 한반도 내부의 우익이 소련이 영토적 야심과 구체적 계획을 가진 것처럼 상정해, 결과적으로 미국으로 하여금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입안하게 만들었으며 한민족의 일부로 하여금 반소(反蘇)정책을 지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소(對蘇)봉쇄정책과 반소정책이 한반도의 분단 고착화에 이바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다른 학자들은 “있었다”고 주장한다. 소련 외무부의 1945년 6월 29일자 보고서, 8월 1일자 보고서, 1945년 9월 초 어느 날의 보고서 등은 소련이 한반도에서 일정한 영항력을 행사하거나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음을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특히 세 번째 보고서는 소련이 한반도의 동해뿐만 아니라 서해까지도 전적으로 지배해야겠다는 놀라운 구상을 가졌음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대체로 후자의 주장에 기운다. 소련은 적어도 자신이 점령한 북한만큼은 자신에게 확실하게 우호적이며 충실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계획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의도에 대해 경계심을 가진 미국 및 남한 사람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된다.

    소련의 북한 통치 성격, 그리고 북한 정치지도자들의 ‘자율성’ 문제

    여섯째, “소련의 북한에 대한 점령통치는 간접통치였던가 군정이었던가?”의 논쟁이다. 소련은 북한을 점령한 기간 전체에 걸쳐 간접통치의 방식을 택했다. 군정청을 설치하지 않고 조선 사람들의 정치기구를 통해, 예컨대,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및 북조선인민위원회 등을 통해 북한을 통치했다. 소련점령군과 북한의 지도자들 및 남한의 좌익은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미군이 남한에 군정청을 세워 직접통치하는 것에 비해, 이것은 소련이 조선 사람들을 존중하는 징표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남한 학계에서는 지난날에는 일부에서만 반론을 폈다. 주로 “우익”이라고 명명된 학자들 사이에서, 소련의 간접통치는 겉모양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군정이었다는 분석이 제시됐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점령군에 관련된 문서가 꽤 많이 발굴된 오늘날, 그리하여 소련 점령군의 실상에 대해 훨씬 많이 알게 된 오늘날, 남한 학계에서는 소련이 사실상 군정을 실시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접근됐다. 그 점은 이른바 진보적 입장의 학자들도 소련이 북한을 점령 통치했던 시기를 “소군정의 시기”라고 단정적으로 명명하는 데서 확인된다. 

    일곱째, 바로 위의 논쟁은 “소련이 점령했던 시기에 북한의 집권자들이 행사한 자율성의 폭이 어느 정도였느냐?”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 논쟁은 이 논쟁의 참여자에 따라 그 시기의 북한 정권이 소련의 단순한 “위성정권”이었는지 비교적 자율성을 지닌 정권이었는지의 논쟁으로 확대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시기의 북한 정권은 소련의 단순한 “위성정권”이었다고 평가한다. 소련군정의 지도자들이 스탈린이 설정한 틀에 맞춰 북한에 공산당과 행정기관을 세웠으며 그것들을 통해 소련의 국가적 목표와 이익에 부합하도록 북한을 이끌어나갔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만일 북한의 공산당과 행정기관이 “자율성”을 가진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제한된 범위 안에서였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이 시기에 북한 정권이 상당한 자율성을 행사했다고 주장한다. 공산당과 행정기구를 세우고 그것들을 통해 토지개혁을 비롯한 “민주개혁들”을 성사시킴으로써 반제반봉건혁명을 성취한 것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능동적 판단과 행동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하는 학자들은 소련 정권이, 그리고 소련이, 북조선에 도입한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북조선의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내면화(內面化)됐다”고 주장한다. 북조선이 “소비에트화된”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조선화(朝鮮化)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이 시기의 북한 정권을 소련의 단순한 “위성정권”으로 파악하는 학자들을 비판한다. 

    필자는 이 시기의 북한 정권이 소련의 단순한 괴뢰였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는 이 시기에 북한 정권이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자율성을 가졌다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북한 정권은 소군정의 결정에 어긋나는 독자적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달리 말해, 이 시기 북한 정권은 소군정의 결정과 지시에 철저히 충실했으며 소군정의 결정과 지시를 언제나 찬양했다. 북한 정권이 자율성을 누렸다면 그것은 소군정의 결정과 지시의 범위 안에서였으며 따라서 소군정이 묵인하거나 허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였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 1946년 11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와 그것에 따른 1947년 2월 북조선인민회의 구성도, 1948년 남북회담 개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향한 정치적 일정과 행사들도, 심지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인선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마련했거나 최소한 북조선 주둔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관할한 소련 극동군 연해주군관구가 마련한 큰 그림에 따라 진행됐다. 북한의 헌법 역시 소련이 마련해 주었다.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소련이 북한에서 실시한 정책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실시한 정책에 비해 “더 독재적(more dictatorial)”이었다는 평가다. 이 점을 강조하는 반 리 교수에 따르면, 소련점령군은 1946년 초까지만 북한에서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사실상 완전히 끝냈다.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이 폴란드와 불가리아 및 루마니아에서는 1947년 가을에야 끝났고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48년 초에야 끝났음을 고려할 때, 북한에서는 소련점령군이 얼마나 강력하게 독재권을 행사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이 자율성을 행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뒷받침한다. 

    여덟째, 이 시기에 북한에서 실시된 “일제잔재의 청산”이 밖으로 제시한 명분에 얼마만큼 일치했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어떤 학자들은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항일운동가였기 때문에 항일운동의 정신에 투철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일제잔재의 청산”에 철저를 기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어떤 다른 학자들은 그러한 측면이 있었음을 시인하면서도 정적의 제거 및 계급투쟁의 격화 등 정략적 목적에서도 그 과제를 제기했고 추진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일제잔재의 청산”이라는 의제 설정이 자신들로 하여금 반대 세력을 타도하거나 약화시키는 데 커다란 명분 및 현실적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련은 “일제잔재의 청산”이 북한에서 또는 한반도 전체에서 자신의 안보 목표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때 소련의 북한에서 또는 한반도 전체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목표는 이 지역이 앞으로 다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일본의 대륙 침략 발판이 되는 것을 막는다는 데 있었다. 소련은 이 지역에서 이른바 친일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일본이 대륙 침략을 다시 시도할 때 그들을 활용하리라고 내다보고 그들의 제거를 강력히 요구하고 추진했던 것이다. 

    “일제잔재의 청산”에 관한 미국의 입장 역시 정확히 미국의 국가이익 및 전략 목표라는 틀 안에서 정해졌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곧 소련과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를 예상하면서, 그 경우에 일본이 자신의 안전에 매우 중요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국이었던 이 나라를 육성하고 심지어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을 세웠다. 미국은 그러한 기본적 틀 안에서 일본인 전범 대부분을 석방해 주고 정부와 정계 및 기업계에서 다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이러한 정책은 남한의 “친일파” 문제에 대해 비교적 너그럽게 임하게 만들었다. 

    “일제잔재의 청산”에 관한 소련과 미국의 이처럼 상이한 입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한반도 문제가 거의 철저히 두 강대국의 국가 이익과 전략목표라는 틀 안에 묶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아홉째, 북조선의 정치지도자들이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보인 인식과 자세에 대한 평가다. 어떤 학자들은 그들의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은 아마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표피적 또는 입치레의 언술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그들의 찬양은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조선의 정치지도자들은 진심으로 소련과 스탈린을 존경하고 모방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체로 후자의 견해를 지지한다. 그들은, 특히 김일성은, 스탈린을 속 깊이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통치기법들을 모방하려고 했다. 여기서 저자는 북한에서 전개돼 온 비극의 씨앗을 본다. 


    1950년 7월, 최고인민회의 제2차 회의 총결 연설 중인 김일성. [뉴시스]

    1950년 7월, 최고인민회의 제2차 회의 총결 연설 중인 김일성. [뉴시스]

    스탈린이 이끌던 소련은 결코 남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고 북한에 대해서도 모범이 될 수 없는 나라였다. 도대체 스탈린이 어떤 통치자였던가? 스탈린은 히틀러보다도 훨씬 더 무도(無道)하면서 포악한 독재자였다. 오죽했으면 레닌이 죽기 전에 “스탈린은 성정(性情)이 포악하므로 내가 죽은 뒤 그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합심 협력하라”고 핵심 간부들에게 유언을 남겼을까. 히틀러가 자신의 통치 기간에 죽었거나 폐인으로 만들었거나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의 수는 대체로 10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에 비해, 스탈린이 자신의 통치기간에 죽었거나 폐인으로 만들었거나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의 수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약 1800만 명을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는 사실이 그 점을 중명한다. 

    스탈린의 통치는 지나친 개인숭배, 거짓말과 허위의 일상화, 비밀경찰에 바탕을 둔 국가폭력의 공공연한 행사로 유지된 공포정치, 반대자에 대한 불법적이면서 무자비한 박해, 피치자를 상대로 한 끊임없는 세뇌와 동원 및 노동력 착취, 약소민족에 대한 철저한 제국주의적 탄압, 국제적 군사 긴장의 조성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거듭 말하거니와, 스탈린이 이끌었고 통치했던 소련은 결코 존경은커녕 모방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미 누누이 보았듯,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은 스탈린과 소련을 승배의 대상으로 바라보았으며, 실제로 북한에 스탈린주의적 정권을 세웠다. 

    북한의 정치지도자들이 스탈린 및 소련에 대해 보여준 언행과 관련해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그들은 어떤 집회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스탈린 만세” “소련 만세”를 불렀으며 스탈린을 자신들이 이끄는 단체나 집회의 “명예의장”으로 추대했다. 이것에 대조되게, 이 시기 남한에서는 어떤 “친미적” 지도자라고 해도 “트루먼 만세” “미국 만세”를 부른 기록이 없으며 트루먼을 자신이 이끄는 단체나 집회의 “명예의장”으로 추대한 기록이 없다. 순전히 점령자에 대한 찬양의 언술에 국한해 비교한다면, 북한의 지도자들에게서는 그들이 그토록 자랑한 “자주성” 또는 “민주적 체통”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 남조선노동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들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가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추종했다. 

    열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성립 과정에 정권의 폭력이 개입된 정도(程度)를 둘러싼 논쟁이다. 어떤 학자들은, 우익세력이 일정하게 저항세력으로 남아 있었던 소련 점령의 초기를 제외하고는, 정권 차원에서 개입한 정도가 낮았다고 본다. 저항세력의 핵심 부분 가운데 대다수는 대체로 1946년 2월과 3월께까지 남한으로 이주를 마쳤으며 따라서 그 뒤의 북한에는 의미 있는 저항세력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가, 북한 정권의 여러 정책은 대다수 주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기에, 정권이 폭력을 행사할 필요가 크게 줄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다른 학자들은 소련 점령의 모든 기간에 걸쳐, 시기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했으나, 정권의 폭력행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본다. 

    저자는 대체로 후자의 견해에 기우는 입장이지만, 잠정적으로 결론을 유보하기로 하겠다. 이 논쟁에 관한 자료가 지극히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남한 사회와 미군정에 대한 자료는 상당히 많이 공개됐거나 발굴됐다. 그렇기에 군정 아래 저질러진 국가폭력이 상당히 많이 드러나게 됐다. 그러나 이 시기의 북한 사회와 소군정에 대한 자료는 아직도 상당히 많이 묻혀 있다. 특히 반대자에 대한 통제와 억압에 관한 자료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소련점령군에 의해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사람이 소련으로 끌려가 거기서 감옥살이를 했거나 처형됐거나 옥사했다는 사실이다. 소비에트러시아가 한때는 한인들의 도피처였으나,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시기에는 한인들의 유형지였던 것이다. 그러했기에 소군정 아래 저질러진 국가폭력의 전모는 가려져 있다. 그 자료가 공개되거나 발굴될 때 소련군이 통치하던 시기의 북한 정권과 김일성의 모습은 더욱 더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며 북한의 국가적, 체제적 성격에 대한 논쟁 역시 더 실증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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